2000년대 대박의 터밭은 벤처가 유일무이했다. 그래서 ‘대박 신화’를 만들어가는 벤처인들은 늘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의 첫 스타트를 끊은 이들은 8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풍미했던 벤처 1세대들이다. 과연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박 신화를 꿈꾸던 벤처들은 닷컴 열풍을 지나 IMF 관리 체제하의 혹독한 시련기를 거쳤다. 이때 옥석도 가려졌다. 구조 조정기를 지나 최근 제2 벤처 붐에 이르기까지 국내 벤처산업은 빠르게 움직였다. 지난 10여년 동안 많은 벤처들이 생겼다가 사라진 것이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벤처는 한국 경제의 유일한 대안처럼 여겨졌고, 정부 또한 파격적인 벤처 육성책을 내놓아 연일 벤처 대박이 터지는 듯했다. 수천억원대의 벤처 갑부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수많은 비리와 게이트들이 불거졌다. 도덕 불감증에 걸린 벤처들이 진정한 벤처 정신을 잃고 잿밥에만 눈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요즘 다시 ‘제2 벤처붐’이 불면서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그러나 진흙탕처럼 보이는 벤처업계 이면에는 진정한 벤처 정신으로 세인들의 모범이 된 아름다운 벤처인들도 수없이 많다. 정부가 올해를 벤처활성화의 해로 삼고 벤처 지원에 적극 나서면서 벤처 붐을 이끌었던 이들의 근황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1 한우물 파며 도전 계속 세계적 기업으로 우뚝



 정보기술(IT) 강국으로 이끈 안철수 안철수연구소 이사회 의장, 이재웅 다음커뮤니케이션 사장, 이해진 NHN 부사장, 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 등은 21세기형 벤처기업가로 손꼽힌다.

 바이러스 백신 ‘V3’의 주인공 안철수(43) 의장은 95년 안철수컴퓨터바이러스연구소를 설립한 이후 승승장구, 지금은 국내 벤처인의 대명사가 됐다.  서울대 의대를 나온 안의장은 바이러스에 걸린 컴퓨터를 고치는 백신업계의 대부로 통한다. 그는 의사란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컴퓨터 백신을 만드는 CEO로 변신하면서 화제를 뿌렸다. 안연구소는 지난해 매출 315억원, 영업이익 102억원을 기록하는 성과를 올리면서 글로벌 통합 보안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안의장은 지난 3월18일 창립 10주년을 맞아 CEO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 신선한 충격을 안겨줬다. 그는 “2년 정도의 계획으로 대학원에 들어가 학생으로서 열심히 공부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다음, 미국에도 진출

 이재웅(38) 다음커뮤니케이션스 사장은 1995년 무료 한메일 서비스와 카페 서비스라는 독창적인 모델로 닷컴 열풍을 이끌었다. 10년 전 3명이었던 직원이 지금은 2000명이 됐고, 초기 3억원이었던 매출은 5000억원을 넘어섰다. 국내 가입자 3700만명, 전세계 회원은 5500만명에 이른다. 한국인의 40%, 한국 인터넷 사용자의 60%가 다음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으며, 전세계 네티즌의 7%가 다음을 이용중이다. 야후나 구글에 이어 3위 규모다. 10년 전에는 상상치 못했던 성장을 이뤄냈다. 특히 발상의 전환을 통해 다른 인터넷기업들은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도전을 지속해 왔다. 지난해에는 본사를 제주도로 이전, 미국 라이코스 인수 등을 전격 발표해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사장은 다음이 10주년을 맞아 세계적인 기업으로 거듭나는 한 해가 될 것이라고 소감을 피력하기도 했다. 다음은 지난 10년간 끊임없는 도전과 변화로 국내를 대표하는 인터넷기업으로 우뚝 성장했다.

 인터넷 포털 NHN을 이끌고 있는 김범수(42) 사장과 이해진(41) 부사장은 포털 최대 히트 상품이 된 네이버와 한게임의 합병으로 이 회사를 국내 인터넷 선두 기업으로 올려놓았다. 김사장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1998년 9월 잘 다니던 삼성SDS에 무작정 사표를 냈다. 곧바로 한게임커뮤니케이션을 설립했다. 그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던 중 만난 사람이 평생의 사업 파트너가 된 당시 네이버컴을 이끌던 이해진 사장. 김사장과 이부사장은 삼성SDS 입사 동기다.

 이부사장은 80년대 후반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삼성SDS에 입사, 기술 개발을 담당하면서 인터넷 검색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인터넷 검색이 각광받을 것으로 확신한 그는 본격적인 검색 엔진 개발에 착수했고, 97년 사내 벤처 1호인 네이버 소사장에 올랐다. 네이버는 99년 독립 법인 네이버컴으로 정식 출범한 후 한게임과 합병하면서 지금의 NHN이 됐다. 이들 두 사람은 네이버와 한게임을 운영하는 NHN을 인터넷 포털 1위 업체로 끌어올렸다.

 인터넷과 맞물려 게임산업을 이끌고 있는 인물들도 대거 스타급 대열에 올랐다. 게임 분야의 화제 인물인 김택진(41) 엔씨소프트 사장은 초기 닷컴 붐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그는 게임 하나로 세계를 평정한 인물로 통한다. 게임시장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김사장은 온라인 게임 ‘리니지’로 세계 게임계를 석권, 국산 온라인게임의 해외 진출에서도 선구자 역할을 하고 있다.



 변대규·양덕준, 세계 시장 휩쓸어

 휴맥스 변대규(46) 사장은 96년 아시아 최초이자 세계 세번째로 디지털 위성방송 수신기를 개발하면서 최근 1000억원대 벤처 갑부 반열에 올랐다. 그는 1989년 동료, 후배들과 서울대 부근인 낙성대 입구의 조그마한 사무실에서 출발, 서울대에서 공학박사를 취득한 뒤 본격적인 사업 활동에 나섰다.  그는 “처음에는 엔지니어 출신이라 시장 생리를 몰라 고생을 했지만, 이것이 오히려 약이 됐다”고 말했다. 셋톱박스에 전념하기 위해 다른 사업은 포기했다.

 휴맥스는 지난해 3700여억원의 매출 가운데 90~95%를 세계 90여개국에 셋톱박스를 팔아 벌어들였다. 그는 경쟁력 있는 기술 개발과 건실한 브랜드 이미지 마케팅 등을 통해 세계 3대 셋톱박스 메이커로 키웠다.

 양덕준(54) 레인콤 사장은 MP3플레이어로 세계 시장을 휩쓸고 있다. 양사장은 디자인을 아웃소싱하고 별도의 판매 법인을 두는 등 글로벌 브랜드 마케팅을 강화, 세계적인 MP3플레이어 메이커로 성장했다. 국내 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하는 한편, 미국에서도 플래시메모리 타입 시장의 20%를 점유하며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다. 지난 99년 11억원에 불과하던 매출이 지난해 4528억원으로 급성장했다.



 조현정, 인재 양성에 힘써

 올해 벤처기업협회 회장에 선임된 조현정(49) 비트컴퓨터 회장은 인하대 전자공학과 재학 시절 국내 대학생 벤처기업 1호격인 비트컴퓨터를 설립했다. 소프트웨어란 단어도 생소했던 1982년 국내 최초의 어플리케이션 소프트웨어인 보험 청구 프로그램을 개발, 보급하면서 낙후돼 있던 의료정보산업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를 통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한 의료 정보 선두 업체로 자리잡았다. 조회장은 중학교를 중퇴하고 충무로 기술자에서 검정고시를 거쳐 인하대에 입학, 대학 3학년 때 비트컴퓨터를 설립한 입지전적인 이력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2000년 1월에는 사재 20억원을 현금으로 출연, 학술장학재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특히 IT업계의 사단으로 지칭되는 비트교육센터를 통해 90년부터 지금까지 7000여명의 전문 인력을 양성, IT업계에 배출했다. 그는 프로젝트의 프로그래밍 기법과 소스까지 매달 공개, 후배 양성과 벤처 키우는 데 주력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벤처업계 리더로 통하는 그는 벤처 활성화를 위한 각종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등 90년대 벤처 붐을 일으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휴먼컴퓨터 개발이사를 거쳐 국내 인터넷 전도사로 꼽혔던 허진호씨(43). 한국과학기술원(KAIST) 공학박사 출신인 허진호 사장은 기술력과 경영 능력을 겸비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허사장은 휴먼컴퓨터, 삼보컴퓨터에서 기술 개발과 마케팅을 익힌 후 1994년 국내 첫 민간 인터넷서비스업체(ISP)인 아이네트를 설립했다. 아이네트를 한국통신(KT), 데이콤에 이어 국내 3대 ISP업체로 성장시켜 이를 외국계 업체인 피에스아이넷(PSInet)에 매각한 뒤 2000년에 네트워크 관리 솔루션업체인 아이월드네트워킹을 설립했다. 그는 2004년에 인터넷기업협회 회장에 재선임돼 2006년까지 회장직을 수행한다. 허사장은 요즘 사이버윤리척도 공동 개발 등으로 자율 규제 정착에 나서고 있다.

 오치영(37) 지란지교소프트 사장은 충남대 전산학과 4학년이던 94년에 회사를 세웠다. 오사장은 “젊음과 열정밖에 없던 시기였다”며 당시를 회고하고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인복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회사는 스팸 메일 차단 솔루션과 업무용 메신저 분야에서 1위 브랜드를 창출한 소프트웨어 전문 기업이다. 국내 최초의 윈도우용 통신 프로그램 ‘잠들지 않는 시간’으로 창업한 이래 대덕밸리와 테헤란밸리를 기반으로 10여년간 꾸준히 성장해 왔으며, 이젠 세계로 진출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오사장은 요즘 일본 시장 공략에 힘을 기울여 10억원 정도의 매출을 올릴 계획이다.



 #2 성공과 실패 굴곡 거쳐 재기

 

 무엇보다 국산 워드프로세서 ‘아래아한글’의 개발 주역인 이찬진(40) 사장은 여러 차례 인생의 굴곡을 경험했다. 이사장은 한컴을 떠나 현재 포털업체 드림위즈 대표로 활동중이다. 그는 아직도 드림위즈 사장보다는 국내 첫 워드프로세서인 ‘아래아한글’을 개발하고 한글과컴퓨터를 설립한 국내 소프트웨어 1세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한컴 이후 인터넷 포털로 눈을 돌려 인티즌을 인수하고 1999년 드림위즈를 설립했다. 드림위즈는 최근 10여개에 달하는 국내 최대 분야별 마니아 커뮤니티를 더욱 강화하고 3~5개의 마니아 커뮤니티를 추가로 영입할 예정이다. 온·오프라인 행사를 통한 고객들의 로열티를 높이고 공동 구매 등을 통한 쇼핑 매출도 높일 방침이다. 이사장은 ‘한국의 빌 게이츠’로 불리기도 했다. 아내인 탤런트 김희애씨가 만화영화 <캔디> 주제곡을 부르면서 고개를 떨구며 걸어가는 남편을 위로해 주는 생명보험사의 CF가 이사장의 재기 시점과 맞물려 세간에 화제를 낳기도 했다.



 이찬진·전하진·홍윤선 “아직 죽지 않았다”

 가장 주목받는 인물은 ‘e마켓플레이스’ 붐을 일으킨 인터넷 전도사 이금룡(54) 사장. 이사장은 옥션 대주주 이베이와의 갈등으로 한동안 업계의 관심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런 그가 온라인 결제 전문 업체인 이니시스에 둥지를 틀고 옥션과 유사한 온라인 마켓 포털 온켓을 만들었다. 그는 최근 온켓을 다음에 매각했다.

 2001년 9월 네띠앙을 떠났던 홍윤선(43) 사장도 1년여 기간 동안 재충전 시간을 보내다 2002년 4월 이메일 마케팅 업체 웹스테이지를 설립하고 재기에 나섰다. 홍씨는 89년 하이텔 전신인 케텔(KETEL) 시절부터 PC통신 활동을 시작한 우리나라 인터넷 1세대다. 95년 삼성SDS 유니텔 마케팅 책임자로 근무하며 PC통신과 인터넷 대중화를 선도했으며, 99년 6월부터 28개월 동안 인터넷 포털사이트 네띠앙의 대표이사로 일해 왔다.

 하지만 2001년 9월 벤처 경기 침체에 따른 실적 부진을 책임지고 대주주인 한글과컴퓨터와 갈등을 빚으면서 네띠앙의 대표이사직을 사퇴했다. 홍사장은 네띠앙 재직 시절부터 ‘네티켓 캠페인’을 벌이는 등 인터넷 문화에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현재 그는 오즈메일러라는 이메일 마케팅서비스 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인터넷과 관련된 문화비평가로도 활약중이다.

 1세대 닷컴의 대표주자인 전하진(47) 전 네띠앙 사장도 닷컴 거품 붕괴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98년 한글과컴퓨터 CEO로 선임되면서 집중 조명을 받았지만 2001년 9월 실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낙마, 네띠앙으로 옮겼다.  하지만 이마저 여의치 않아 네띠앙이 부도 위기가 감돌던 2004년 사장직을 사임했다. 최근 그는 국내 벤처기업들의 해외 사업을 지원하는 인케코퍼레이션 설립을 주도, 사장을 맡으면서 활동을 재개했다. 

 국내 벤처의 대부 이민화(52) 메디슨 전 회장도 회사 부도 후 두문불출하다가 조심스럽게 재기를 노리고 있다. 지난 2002년 1월 메디슨 부도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던 그는 지난해부터 당뇨 체크 모바일 서비스를 제공하는 헬스피아의 경영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재기에 나섰다. 헬스피아는 혈당을 측정하고 당뇨 관련 데이터를 관리해 주는 휴대폰 특수 칩과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회사다. 하지만 헬스피아측은 그가 거의 회사에 나오지 않고 있어 근황을 알 수 없다고 전했다.

 1세대 벤처기업가로 널리 알려진 박규헌(42) 이네트 전 사장도 2004년 대표이사직을 내놓고 후선으로 물러났다. 박씨는 지난 97년부터 이네트 대표이사로 일해 왔다. 인터넷 붐과 함께 전자상거래로 회사 방향을 잡아 인터넷 시대의 총아로 떠올랐다. 지난 2000년에는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뽑은 전세계 20대 유망 중소 벤처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인터넷 버블이 붕괴되면서 회사 실적도 악화돼 지난 2001년부터 2003년까지 3년 연속 500억원 가까운 적자를 냈다. 2002년부터 기존 사업 이외에 게임 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지만 크게 재미를 보지 못한 채 대표이사에서 물러난 것이다. 박씨는 이네트와 결별 후 중국을 대상으로 한 사업을 구상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33세의 나이로 야후, 다음과 함께 포털 3강 체제를 구축하는 신기원을 이뤘던 가종현(38) 전 라이코스 사장은 대기업으로 옮긴 케이스. 그는 2002년 라이코스가 SK텔레콤에 흡수되면서 SK커뮤니케이션즈 부사장직을 맡고 있다가 지난해 SK텔레콤의 포털사업본부에서 수석팀장(상무)을 맡고 있다.

#3 실패한 CEO의 공통점 ‘도덕 불감증’



 아직까지 대박 신화의 스폿라이트를 받으며 벤처 세계에서 우뚝 서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라진 스타들 가운데는 아름답지 못한 뒷모습을 보여준 경우가 많아 씁쓸함을 더해 준다. 재기에 나선 인물들과 달리 아직은 활동을 삼간 채 조용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인물도 있고, 또 해외에서 도피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이진성 “내년 IT외 분야에 도전”

 인츠닷컴의 이진성(38) 사장과 새롬기술의 오상수 사장은 법정을 오가는 최악의 시련을 겪은 경우. 인터넷 광고사이트 ‘보물찾기’로 출발, 400억원 펀딩의 주인공으로 유명세를 한 몸에 받았던 이진성 사장은 2001년 8월 실적 부진에 따른 주주와의 갈등 등이 불거지면서 회사를 담보로 무리한 대출을 했다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으로 6개월 동안 구속되기도 했다. 2002년 9월 집행유예로 풀려난 후 지금은 아내(영화배우 이지은)와 함께 어린이 전용 미용실을 운영하며 조용히 지내고 있다. 미용실 관계자는 1년 전에는 1주일에 한 번씩 미용실에 나왔지만 최근에는 두문불출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재도약 기회를 기다리며 자숙하고 있었다며 내년쯤 IT 이외의 분야에서 사업을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넷 무료 전화 다이얼패드로 닷컴 최고의 스타로 부상했던 새롬기술 오상수(40) 사장은 허위 공시, 분식 회계 등의 혐의로 지난해 7월 징역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는 비운의 스타가 되고 말았다.

 닷컴 열풍의 원조인 골드뱅크 김진호(37) 사장은 경영권 분쟁에서 밀려 회사를 떠난 후 일본에서 다시 닷컴 비즈니스를 해오다가 2002년 국내에서 다시 활동을 본격화해 재기하는 듯했다. 비전텔레콤과 코스닥 등록 기업인 아이빌소프트 등을 인수했지만, 이들 기업을 이용해 횡령한 혐의가 드러나 그는 해당 기업들로부터 고소된 상태며 현재 해외 도피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코스닥시장에서 분탕질만 거듭하다가 해외로 도망쳤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한편 ‘커뮤니티 유료화’의 산파 격인 전제완 전 프리챌 사장도 증자 과정에서 무리수를 두면서 결국 구속이란 파멸을 맞았다.



 #4 아름다운 은퇴



 97년 야후코리아를 설립, 2001년 4월 돌연 사임할 때까지 닷컴 열풍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염진섭(51) 사장. 불치병에 걸린 두 자녀를 돌보기 위해 억대 연봉의 CEO 자리를 그만둬 세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2001년 12월과 2002년 5월 자신이 투자한 업체인 트레블라이너와 배움닷컴 대표이사로 현역에 복귀했다. 하지만 2~3개월만에 모두 사임하고 공식적인 활동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현재 강연 활동 등을 하며 자녀의 건강을 돌보고 있다고 전해진다.



 정문술 전 회장 사재 털어 수백억원 기부

 벤처업계의 대부로 통한 미래산업의 정문술(67) 회장은 2001년 “착한 기업을 만들어 달라”는 말을 남기고 돌연 은퇴했다. 은퇴하면서 수백억원을 기부, 많은 기업인의 귀감이 되기도 했다. 그는 요즘 아침에 10여개의 신문을 읽고 오후에는 집 뒤에 있는 청계산을 오르는 것으로 소일한다고 전해진다. 그는 지난 83년 반도체 제조장비 업체인 미래산업을 창업, 모범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씨는 반도체 제조장비 업체인 미래산업을 창업하고 초기 제품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기업의 토대를 다지게 된다. 하지만 세계 최초로 ‘무인 웨이퍼 검사 장비’ 개발에 뛰어들어 3년간의 악전고투 끝에 심각한 도산 위기에 몰렸다. 가족 동반 자살까지 결심했을 정도로 좌절을 겪게 되지만 그간 축적된 첨단 기술을 기반으로 반도체 검사 장비 ‘테스트 핸들러’의 국산화에 재도전, 마침내 성공을 거뒀다.

 이후 전자상거래 보안솔루션 회사, 휴대용 컴퓨터통신 단말기업체, 인터넷 포털업체 등 IT 벤처 분야에 파격적으로 지원함으로써 ‘벤처 대부’란 칭호를 얻었다. 2000년에는 국내 최초로 미래산업을 미국 나스닥에 상장시키기도 했다.

 그는 2001년 1월 은퇴를 선언, 경영권을 직원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리고 장차 우리나라의 국가경쟁력은 바이오, 전자, 기계의 융합 기술에 있다고 판단해 KAIST에 300억원의 사재를 기부했다.

 한 세대 벤처를 풍미한 이들 기업인은 자신만의 독창적 아이디어로 승부수를 던졌다. 성공하기도 했지만 실패한 경우도 많다. 제2의 벤처 붐을 맞아 또 어떤 스타들이 뜨고 질 것인지. 또다른 도약을 준비중인 벤처업계에 화려한 스타 탄생을 또 한 번 기대해 본다.



INTERVIEW ②



안철수연구소 이사회 의장

안철수



“순익 100억원 넘어도 사옥 욕심 없어요”

박인상 기자 edream@chosun.com



 지난 3월2일 오전 10시 서울 여의도동 CCMM빌딩 6층 본사에서 만난 안철수(43) 안철수연구소 이사회 의장. 95년 3월 창업, 그가 의사 가운을 벗고 사업가 길로 나선 지 만 10년이 흘렀다.

 안의장은 지난 3월18일 창립 10주년을 맞아 CEO에서 물러나 이사회 의장으로 남기로 했다. 직원 3명으로 출발한 회사는 300명으로 불어났다. 창업 첫 해 5억원이던 매출액은 10년만에 355억원(2004년말)으로 70배나 커졌다. 현재 시가총액은 2000억원으로 초기 자본금 5000만원에 비하면 4000배 덩치다.

 벤처 1세대로 성공한 몇 안되는 기업가로 목에 힘을 줄 법도 한데 겸손한 자세나 조용조용한 어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인터뷰 장소가 할 때마다 바뀌었다는 점이다. 그가 벤처 후배들에게 던지는 첫 마디도 “겉멋을 버려라”는 메시지다.



 10년새 회사만 6번 옮겨

 그는 지난 한 해만 순익이 100억원을 넘겼다. 그런데도 아직 사옥을 지을 생각이 없다. 적어도 2010년 보안업계 세계 톱10이 되기 전까지는 ‘말도 꺼내지 말라’는 분위기다.

 “차도 못 들어가는 골목길에도 있어 봤고요. 어떤 땐 유흥가 건물이라 밤새 작업할 때 시끄러워 고생도 많이 했지요.”

 그는 사업 10년 사이에 사무실을 여섯 차례나 옮겼다. 95년 3월 서울 서초동에서 시작, 남부터미널→강남역→삼성동→수서에 이어 지난해 초 여의도로 들어왔다. 그는 “보통 전세 계약을 2년 하는데 1년만 지나면 늘어나는 직원을 수용치 못해 기간도 채우지 못한 채 이사하곤 했다”고 말한다.

 현재는 국민일보빌딩으로 더 잘 알려진 CCMM빌딩 6층과 10층 1000여평을 사무실로 쓴다. 안의장은 “워낙 비싼 땅이라 웬만한 빌딩 한 채를 살 수도 있다”며 웃는다. 굳이 전세살이를 고집하는 건 ‘외화내빈’을 멀리 하겠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면서 그는 10년 전 창업 때 얘기를 꺼냈다. 지금은 술을 끊었지만 사실 그는 ‘두주불사’파다. 스스로 “주량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소위 ‘필름’이 끊긴 때는 딱 한번 있었다. 창업 전 94년말 때 일이다.

 “처음에 공익 법인 형태로 회사를 만들려고 했지요. 그런데 대기업도 그렇고, 정부 쪽도 그렇고 아무도 도와주질 않더군요. 의사가 컴퓨터 사업을 하겠다니 아무도 믿지 않는 거죠. 너무 힘들어 당시 지인(컴퓨터업계지 기자)들과 술을 한잔 했어요. 그때 어떻게 집에 들어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사업 10년간 언제 가장 힘들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창업 후엔 없었고 창업 직전 그때가 가장 힘들었다”며 말을 이어 나갔다. “결국 안면 정도 알고 지내던 이찬진 당시 한글과컴퓨터 사장이 OK하더군요. 초기 자본금 5000만원 중 51%(안철수)대 49%로 지분을 나눴습니다. 저는 연구 개발만 하고 독점 판권은 한컴이 쥐는 조건이었죠.”

 그는 “요즘 벤처사업가들은 ‘여건이 받쳐 주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라고 잘라 말한다. 벤처는 원래 그런 것이라는 게 안의장의 생각이다.

 “10년 전엔 사람 구하기도 어려웠어요. 연봉 수준이 워낙 낮았기 때문이죠. 그때 벤처캐피털이라고 뭐 있었나요. 여건 극복을 못한다면 아예 벤처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죠.”

 안의장은 “무임승차할 생각을 버려라”라고 단언한다. 실제 지난 1999~2000년 벤처붐 때 지인들의 조언을 뒤로 한 채 코스닥 입성을 하지 않았다.



 매출액도 일부러 줄여서 발표

 그가 코스닥시장에 들어선 때는 벤처 거품이 빠진 2001년 9월11일이다. 공교롭게도 ‘9·11 테러’가 있던 날이다. 주가가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던 그때 그는 시장에 나온 셈이다.

 그는 “벤처는 사업에 대한 모험심을 갖는 것이 본 뜻”이라면서도 “경영은 방어적으로 해야 살아남는다”고 들려준다. 특히 안철구연구소는 회계 기준을 보수적으로 잡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해 매출액 발표만 해도 그렇다. 공시는 315억원으로 냈지만, 실제는 350억원에 달했다는 게 안사장의 귀띔이다. 실적 뻥튀기에 능한 벤처인들에 대한 질타인 셈이다.

 그는 벌써 3년째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한다. 서울대 의대 1년 후배인 김미경씨(서울삼성병원 의사)가 미국 로스쿨에 유학중이기 때문이다. 고등학생인 딸 설희(17)도 함께 떠나 그는 가락동 집을 혼자 지킨다. 이 때문인지 평소 좋아하는 책도 더 많이 읽고 있다.

 1년에 평균 50권씩 읽는 그다. 요즘 본 책 중 가장 권할 만한 책은 ‘뉴요커’ 칼럼니스트인 말콤 글래드웰이 쓴 <블링크(원제 Blink)>다. 안의장은 “이 책은 ‘感’(감)에 대한 책”이라며 “벤처사업가라면 꼭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권한다.

 그는 다독(多讀)하면서 다작(多作)하는 경영자다. 사업하며 바쁜 가운데서도 6권을 냈다. 2001년 펴낸 <영혼이 있는 승부>는 지금까지 72만부가 팔려나갔다. 지난 연말 펴낸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도 100일도 못돼 판매 부수만 현재 4만부를 넘어섰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뭐냐는 질문에 그는 “한마디로 상식”이라고 말한다.

 “작은 회사를 점점 키우다 보니 ‘시스템’과 ‘가치관’이 없으면 롱런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굳어져 갑니다. 한마디로 영혼이 있는 기업을 만들겠다는 게 제 목표이지요.”

 그는 최근 창업 10주년을 맞아 4일간 전직원 교육을 통해 핵심 가치를 새삼 강조했다. 그의 핵심 가치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첫째 조직 개인이 발전할 것, 둘째 회사 자체가 성장할 것, 셋째 고객을 만족시킬 것 등이다. 평범함 속에 숨겨진 가치를 찾고 있는 셈이다.

 그는 2010년 매출액 2500억원 달성과 함께 세계 10대 보안회사 진입이란 목표가 뚜렷하다. 최근엔 브라질 보안업계에 진출,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다. 그런 가운데 포스코 사외이사까지 맡는 등 대외 활동도 활발하다.



안철수 의장의 조언 5가지

1. 겉멋을 버려라→10년새 여섯 차례 전세살이

2. 여건을 탓하지 마라→10년 전엔 5000만원 빌리기도 어려웠다

3. 무임승차하지 마라→벤처 붐 꺼진 2001년 하반기 코스닥 입성

4. 보수경영을 하라→뻥튀기 대신 실적도 줄여 발표

5. ‘감’을 키워라→틈날 때마다 독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