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만장자 행동주의 투자자 칼 아이칸(가운데). 사진 블룸버그
억만장자 행동주의 투자자 칼 아이칸(가운데). 사진 블룸버그

행동주의 투자자는 주주 이익 극대화를 추구한다. 이들은 특정 기업의 주식을 대량으로 매수해 경영 혁신과 구조조정, 자산 매각, 자사주 매입 등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런 요구가 주가를 높이기 위한 목적일 뿐, 몇 달간 주식을 보유하다가 주가가 오르면 매각해 차익을 얻고 떠나 회사 경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그렇다면 행동주의 투자자의 요구가 투자 차익을 거두는 것을 넘어 기업 경영에 도움이 될까? 세계 최초로 복사기를 만든 회사인 제록스와 ‘기업 사냥꾼’으로 불리는 칼 아이칸의 행보를 지켜보면 판단에 도움이 될 듯하다.

제록스는 최근 전자 문서 확산으로 복사기 매출이 급감했다. 지난해 영업이익은 5억7000만달러(약 6100억원)로, 3년간 절반으로 줄었다. 사업 부진에 시달리는 제록스에 나타난 게 행동주의 투자자 칼 아이칸과 억만장자 다윈 디슨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최대주주인 아이칸과 3대주주인 디슨이 제록스에 제프 제이컵슨 최고경영자(CEO)의 즉시 해임, 후지필름과의 합작 관계 단절, 회사 매각 등 전략적 대안 검토 등을 요구했다고 전했다. 아이칸과 디슨의 제록스 지분을 합치면 15%가 넘는다. 후지필름과 제록스의 합작회사 ‘후지제록스’는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제록스 영업을 담당하고 있다.

제록스가 내놓은 대안은 두 투자자의 요구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후지필름에 회사를 매각하는 것이다. 후지필름이 제록스 지분 50.1%를 61억달러(약 6조5000억원)에 인수한다는 계획이다. 두 회사가 만든 합자회사 후지제록스를 제록스가 인수하고, 후지필름이 새로 탄생하는 회사 ‘신 후지제록스’의 지분 50.1%를 갖는다는 안이었다. 후지필름은 제록스 인수 성사를 위해 제록스 주주에게 주당 약 9.8달러, 총 25억달러(약 2조7000억원)에 달하는 특별현금배당을 실시하기로 했다. 제록스 시가총액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두 회사는 합병과 구조조정으로 2022년까지 연간 17억달러의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고 봤다. 후지필름이 제록스를 인수해 미국과 유럽에서 경쟁력이 높은 제록스와 아시아·태평양을 담당하는 후지제록스를 통합하면 세계 영업망을 확보할 수 있어 효율이 높아진다. 지난해 매출액 기준으로 세계 사무기기 시장에서 미국 제록스는 휴렛팩커드(HP), 캐논, 리코에 이어 4위다. 그러나 후지필름과 제록스가 합병하면 세계 시장 1위로 올라선다.

아이칸과 디슨은 크게 반발했다. “제록스의 가치를 심하게 저평가했다”는 게 이유였다. 이들은 다른 주주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후지필름이 제록스를 훔쳐가도록 내버려두지 말 것을 촉구한다”고 했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아이칸과 디슨은 후지필름의 제록스 인수 계획에 대해 “사실상 제록스의 경영권을 공짜로 장악하는 사기와 같은 구조”라고 했지만, 고모리 시게타카(古森重隆) 후지필름홀딩스 회장은 “주주가 이런저런 말을 하고는 있지만, 단 두 명일 뿐”이라면서 당초 계획대로 주주총회에서 승인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이칸과 디슨은 후지필름의 인수 계획에 반대해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4월 27일 미국 뉴욕주 법원은 아이칸과 디슨의 손을 들어줬다. 양사의 합병 타결이 자기 자리 보존에 급급한 제프 제이컵슨 제록스 최고경영자(CEO)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아이칸과 디슨은 지난달 7일 “(인수 조건이) 주당 40달러 이상이면 (후지필름의 제록스 인수를) 진지하게 검토할 가치가 있다”는 견해를 밝혔지만, 후지필름 측은 “(후지필름의) 주주에게 불이익을 주는 일은 할 수 없다”고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인수 발표 전 제록스의 주가는 30달러 수준이었다. 아이칸과 디슨은 인수에 찬성하는 대가로 30%의 프리미엄을 요구한 것이다. 지난달 13일 제록스는 “후지필름 측과 새로운 계약 조건에 대한 합의에 실패해 합병안을 폐기한다”고 밝혔다. 제이컵슨 CEO는 사임했고, 후임으로 새로운 CEO와 5명의 신임 이사가 임명됐다.

하지만 아직 후지필름과 제록스의 교섭이 끝난 것은 아니다. 후지필름은 뉴욕주 법원이 내린 제록스 인수 절차 일시 금지 결정에 불복해 항소했다. 제록스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고, 주가는 후지필름의 인수가 발표되기 전보다 낮은 20달러 후반에서 움직이고 있다. 아이칸과 디슨이 제록스를 사 줄 다른 기업을 찾지 못하면 제록스의 실적은 더 악화될 수 있다.


아마존·테슬라도 행동주의 펀드의 타깃

고모리 회장은 지난 7일 일본 언론 인터뷰에서 “후지필름은 제록스에 계약 이행을 압박할 것”이라면서 새로운 제록스 경영진으로부터 인수에 대한 달라진 제안을 기다리는 기한은 반년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아이칸과 디슨이 내건 ‘1주당 40달러’라는 인수 찬성 조건에 대해선 “지금 주가는 27.7달러다. 40달러는 너무 높다. 보통은 (인수·합병 시 경영권 프리미엄으로 주식을 시장에서 거래되는 가격보다) 30% 높게 매수하지만, 그런 건 하지 않겠다. 돈이 없는 게 아니라 후지필름의 주주를 생각해서다”라고 했다. 주주 이익 보호를 이유로 인수를 무산시킨 아이칸과 디슨에 대해 고모리 회장도 주주 이익 보호를 이유로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맞선 셈이다.

일본 도쿄의 후지제록스 본사 건물 외벽에 걸린 로고. 후지제록스는 일본 후지필름홀딩스와 미국 제록스의 합작 회사다. 사진 블룸버그
일본 도쿄의 후지제록스 본사 건물 외벽에 걸린 로고. 후지제록스는 일본 후지필름홀딩스와 미국 제록스의 합작 회사다. 사진 블룸버그

아이칸과 디슨의 압박으로 제이컵슨 제록스 전 CEO는 사임해야만 했다. 미국에선 행동주의 투자자들이 거대 기업 회장의 거취까지 압박하는 등 경영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경우가 흔하다. ‘섬오브어스(SumOfUs)’라는 미국의 한 행동주의 단체는 지난달 30일 아마존 주주총회가 열린 시애틀 본사 바깥에서 ‘베이조스는 보스가 필요하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항의 시위를 열었다.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가 이사회 회장과 CEO를 겸직하는 것이 지배구조에 도움이 되지 않고 주식 가치에 해가 된다는 주장이다. 이사회 회장은 CEO를 감독하고 주주를 대변해야 하는데, 겸직하면 이해관계가 상충된다는 이유였다.

이달 5일 열린 테슬라 주주총회에서도 행동주의 투자자인 CtW인베스트먼트가 캘리포니아주 교사퇴직연금(CALSTRS)과 함께 일론 머스크 CEO의 측근인 이사진 3명의 교체를 요구했다. 디터 바이제네거 CtW인베스트먼트 CEO는 주주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테슬라는 생산 차질을 빚고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다”면서 “독립적이고 효과적인 이사진을 구축하지 않고 실패가 커지도록 방치한 책임을 묻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 안건은 주주총회에서 부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