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리행 이탈로(Italo) 고속열차가 이탈리아 로마 티부르티나 역을 출발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나폴리행 이탈로(Italo) 고속열차가 이탈리아 로마 티부르티나 역을 출발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항공 업계를 뒤흔든 저비용항공사(LCC)의 수익 모델이 유럽 철도 업계 지형도까지 바꿔놓고 있다.

유럽연합(EU)이 2020년까지 역내의 모든 상업 철도를 완전경쟁 체제로 운영하도록 지침을 내리면서 LCC 스타일의 ‘저비용 고속철’ 서비스 도입을 추진 중인 관련 기업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과 유럽 대륙을 잇는 유로터널의 운영사인 프랑스의 겟링크(Getlink)와 마드리드에서 세비야까지 이어지는 ‘아베(AVE)’ 고속철을 운영하는 스페인의 국영 철도 기업 렌페(Renfe)가 대표적이다. 겟링크는 유로터널을 통과하는 영국 런던~프랑스 파리 구간에, 렌페는 스페인의 마드리드~바르셀로나 구간에 각각 저비용 고속철 서비스 운영을 준비 중이다.

이들이 추진 중인 저비용 고속철 운영 방식은 LCC와 매우 흡사하다. 우선 특실을 없애 전 좌석을 일반석으로 운영하고 식당칸 대신 자판기를 설치해 운영 비용을 줄일 예정이다. 렌페의 경우 기존 고속철에서 4명이 나란히 앉던 좌석을 5명이 이용하도록 개조해 탑승 인원을 30% 늘린다는 계획도 세웠다.

자크 고논 겟링크 최고경영자(CEO)는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유럽) 철도 업계는 2003~2005년 LCC의 성장으로 항공 업계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변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며 “프리미엄 서비스와 저가 서비스가 공존하는 시대가 올 것”으로 전망했다.

도심이 아닌 외곽의 기차역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외곽의 공항을 주로 이용하는 LCC의 경우와 닮았다. 중앙역을 이용하는 기존 고속철보다 시간은 조금 더 오래 걸리지만 그만큼 가격이 저렴하다. 외곽이라고 해도 대중교통 환승이 편한 국제공항 인근이 대부분이어서 큰 불편은 없다. 라이언에어와 이지젯 등 유럽의 주요 LCC들이 도심에서 차로 1~2시간 떨어진 공항을 이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을 생각하면 감지덕지할 일이다.

현재 런던~파리 구간을 운영하는 유일한 고속철인 유로스타의 경우 소요 시간은 편도 2시간 17분에 요금은 왕복 400파운드(약 58만원)다. 예약 시기를 앞당길수록 요금이 싸지는 시스템은 저비용 고속철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전망이다.

겟링크는 런던 동부 스트랫퍼드역과 파리 샤를드골공항에 인접한 르와시역 이용을 검토 중이다. 이 경우 약 3시간이 소요되지만, 요금은 유로스타보다 25~30% 저렴하게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고논은 전망했다.

겟링크는 철도 전문 기업이 아니기 때문에 새로운 고속철 서비스를 운영하려면 운영사를 선정해야 한다. 운영사 선정에서 운영 개시까지 18개월 정도가 소요될 전망이다. 현재 SNCF와 탈리스 등 유럽의 주요 고속철 운영사는 물론 런던~파리 구간 기존 운영사인 유로스타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로스타가 같은 구간에 저비용 서비스를 운영할 경우 준비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렌페는 ‘이브(EVE)’라는 브랜드로 내년부터 마드리드~바르셀로나 구간 저비용 고속철 서비스를 시작한다. 마드리드에서는 중앙역인 아토차역을, 바르셀로나에서는 외곽에 있는 엘프라트 국제공항역을 이용하며 온라인 예매를 통한 전자티켓 발행으로 인건비도 절감할 예정이다. 요금은 같은 구간을 아베 고속철로 이용할 경우보다 20~25% 정도 저렴하게 책정될 것으로 보인다.


저비용 고속철 확산에 LCC 업계 긴장

유럽 철도 기업들이 앞다퉈 저비용 고속철 서비스에 눈독을 들이는 건 수요를 늘릴 여지가 충분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유럽 고속철 총연장은 9000㎞가 넘지만 이용률은 그리 높지 않다. 런던~파리 고속철의 이용률이 58% 정도에 불과하다. 겟링크는 런던~프랑스 구간의 저비용 고속철 이용객이 연간 40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이탈로(Italo)와 프랑스의 위고(Ouigo) 등 선발 기업의 성공이 좋은 자극제가 됐다. 이탈로는 명품 스포츠카로 유명한 페라리와 프랑스철도청(SNCF) 등이 공동 투자해 2012년 운영을 시작했다. 경쟁자인 국영철도 트레니탈리아(Trenitalia)보다 운임이 40% 정도 저렴하지만 ‘페라리 기차’라는 별명에 걸맞게 시설과 서비스 수준이 높다.

가죽시트로 마감된 좌석엔 콘센트가 있고 와이파이가 무료로 제공되며, 터치스크린과 짐을 보관할 수 있는 코인로커 등도 설치돼 있다. 10억유로(약 1조3000억원)에 달하는 초기 투자금 대부분을 최신 열차 구매 등에 투입했기에 가능했다. ‘떼제베 열차’로 알려진 알스톰의 AGV 25가 주종이다.

이탈로는 토리노~밀라노~베니스를 관통하며 이탈리아 북부를 가로지르고, 밀라노에서 볼로냐, 피렌체, 로마, 나폴리 등 이탈리아 남북 주요 도시를 연결한다. 2014년에 600만 명이던 이탈로의 연간 이용객은 지난해 1300만 명으로 늘었다. 창업 6년 만에 이탈리아 고속철 전체 이용객의 30%를 책임지고 있다. 이탈로는 얼마 전 미국의 인프라 투자사 GIP가 19억4000만유로(약 2조5000억원)에 현금 인수했다.

위고는 프랑스 국영 철도 회사 SNCF의 저가 고속철 브랜드다. 초기부터 주요 도시에서 외곽의 기차역을 이용해 요금을 낮추면서 큰 인기를 모았다. 이탈로도 초기에는 같은 전략을 펼쳤지만, 이탈리아 정부의 권고로 중앙역 이용으로 정책을 바꿨다.

저비용 고속철 서비스의 확산은 LCC에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마드리드~바르셀로나 구간의 경우 기존 아베 고속철과 LCC인 이베리아항공의 운임은 비슷한 수준이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저렴한 저비용 고속철 운행이 시작되면 LCC 업계가 긴장할 수밖에 없다. 이탈리아에서는 이탈로의 급성장 여파로 라이언에어와 이지젯이 로마~밀라노 노선을 폐지하기도 했다. 물론 선택의 폭이 넓어진 고객 입장에서야 손해볼 일이 아니다.

아일랜드 LCC 라이언에어의 마이클 오리어리 CEO는 1994년 부도 직전이었던 라이언에어를 인수한 뒤 차원이 다른 가격 경쟁력 확보를 위해 항공 업계가 아닌 대중교통을 경쟁자로 규정했다. 기차나 버스로 4~5시간 걸리는 거리가 초기 타깃이었다. 대중교통 요금보다 적은 돈으로 비행기를 탈 수 있게 한다는 목표를 정한 그는 다른 항공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료 서비스를 없애거나 유료로 전환했다.

저비용 고속철 서비스의 확산으로 이제 공은 다시 LCC로 넘어갔다. LCC 업계가 새로운 도전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넘길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