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학 회장은 “내 44년 비즈니스 인생에는 ‘뚝딱’이란 단어는 없다”고 말했다. 노력과 준비 없이 한 번에 뚝딱하고 뭔가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사진 C영상미디어 김종연성기학 1947년생, 서울대 무역학과, 서울통상 직원, 영원무역 회장,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
성기학 회장은 “내 44년 비즈니스 인생에는 ‘뚝딱’이란 단어는 없다”고 말했다. 노력과 준비 없이 한 번에 뚝딱하고 뭔가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사진 C영상미디어 김종연
성기학 1947년생, 서울대 무역학과, 서울통상 직원, 영원무역 회장,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

국내 최대 아웃도어 의류 업체 ‘영원무역’을 이끄는 성기학(71) 회장. 그는 1974년 영원무역을 설립했고 현재까지 44년간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성 회장은 1980년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가 방글라데시의 남부 항구도시 치타공에 의류 생산 공장을 지은 해이기 때문이다. 직접 투자로 공장을 건설해 동남아시아 시장에 진출한 것으로는 국내 최초였다. 지금은 많은 국내 기업들이 저임금을 이유로 동남아에 공장을 짓고 있지만, 1980년만 해도 치타공 같은 곳에 공장을 짓는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었다.

성 회장에게 방글라데시에 그렇게 일찍 진출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물었다. 그는 “누군가는 내게 ‘선견지명이 있었냐’고 하는데, 그런 게 있었을 리가 없다”며 말을 이었다.

“만약 미래를 내다보는 게 가능하다면 한 번에 ‘뚝딱’하고 모든 비즈니스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을 겁니다. 미래 시장에서 A제품이 잘 팔릴 것을 알 수 있다면 A제품을 만들면 모든 게 끝나거든요. 그런데 내 44년 비즈니스 인생에는 ‘선견지명’ ‘뚝딱’이란 단어는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필사즉생의 심정으로 살길을 찾다보니 그 길이 보인 것뿐입니다. 다만 그 길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오래도록 경험과 노하우를 쌓고 또 쌓아온 것은 있겠지요.”

충분한 노력과 준비 없이 한 번에 뭔가를 이룰 수는 없다는 게 성 회장의 지론이다. 국내 기업 최초로 방글라데시에 생산 거점을 구축할 때나, 1997년 미국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를 국내 시장에 들여와 아웃도어 붐을 일으켰을 때나 그는 이 지론을 따랐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존할 방법을 찾았다.

1980년 어떻게 방글라데시에 공장을 지을 생각을 했나.
“누군가는 선견지명이 있냐고 묻는데, 그런게 있을 리 만무했다. 다만 살기 위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 당시 상황이었다. 1970년대 후반 미국과 유럽은 쿼터제(수출 할당제)로 한국산 제품의 수입을 제한했다. 쿼터제에 따라 할당된 물량은 그 때 국내에서 규모가 크고 과거 실적이 많은 기업들이 독식했다. 이런 기업들은 굳이 해외로 나갈 필요가 없었다. 쿼터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영원무역처럼 시장에 진출한 지 얼마 안 되는 신참 기업은 쿼터 물량을 받을 수 없었다. 다른 기업의 쿼터를 조금 빌려 작은 물량을 수출하기는 했는데 이것만으로는 절망적이었다. 그래서 방글라데시에 생산 기지를 건설하기로 마음먹은 거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방글라데시를 시작으로 중국(1995년), 엘살바도르(2001년), 베트남(2004년), 우즈베키스탄(2014년), 에티오피아(2016년) 등에 차례로 의류생산 공장을 지었다. 이렇게 해서 해외 6개국에 공장을 두게 됐다.”

초창기에는 해외에 공장을 짓고 운영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처음에는 치타공의 빌딩 하나를 임대해 제품을 만들었다. 한국에서 생산 라인을 가지고 갔는데 당시 회사 재정 상황이 좋아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다 5년 후 공장을 건설하면서 생산 규모를 확대했다. 이때 절실히 깨달은 것이 ‘중요한 것은 생산 라인을 어떻게 가동하느냐가 아니라 인력을 구성하고 그들을 어떻게 관리하느냐’라는 것이었다. 방글라데시 공장의 경우 인력의 99.9%가 현지인이다. 문화가 달랐지만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동시에 충분한 보상도 했다. 요즘 같은 글로벌 시대에는 현지화가 일반적인 개념이지만 당시에는 현지화라는 게 정말 쉽지 않았다.”

1991년 방글라데시 공장이 태풍·해일로 어려움을 겪었다. 어떻게 극복했나.
“해외에서 공장을 운영하면서 겪었던 가장 큰 위기였다. 태풍과 해일이 발생해 새로 지은 공장이 바닷물에 다 잠겼다. 제품 30만개를 버리고 다시 만들어야 했다. 우선 고객에게 문제를 알렸고, 납기를 맞출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맞추고 아니면 연장해야 했다. 고객들을 백방으로 설득해 한 달의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밤을 새워 공장을 돌렸고 주문량을 모두 납품할 수 있었다.

혼자 노력해서 된 게 아니었다. 직원들이 하나로 힘을 합쳤기에 가능했다. 그때 현지 직원들이 내가 공장 문을 닫고 철수할까봐 걱정하는 모습이 역력했는데, ‘죽어도 방글라데시에서 죽는다’며 그들과 함께 똘똘 뭉쳐 어려움을 이겨냈다. 그 사건 이후, 큰 태풍과 해일이 발생해도 바닷물에 잠기지 않을 정도의 높이로 공장을 새로 지었다.”

방글라데시로 간 것은 낮은 인건비 때문이었나.
“그렇지 않다. 1980년 방글라데시에 진출했을 때는 쿼터제를 피하기 위한 목적이 가장 컸다. 당시에는 한국보다 방글라데시에서 제품을 생산하는 비용이 더 들었다. 1992년까지 그랬다. 처음부터 노동비용, 생산성을 크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업을 계속 하다 보니 낮은 인건비가 경쟁력이 됐고 수익성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현장을 강조하고, 일단 부딪치면서 해법을 찾는 경영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해외 출장이 잦은 편이다. 1년 중 3분의 1 이상은 해외에 있다. 주요 거래 업체 대부분이 해외 기업이기 때문이다. 거래 업체와의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들과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한다. 물론 공장이 방글라데시·중국·베트남 등 해외에 있기 때문에 품질을 직접 챙겨야 하는 이유도 있다.

사업을 할 때 모든 변화를 예측해 투자 계획을 세울 수는 없다. 그래서 70%는 계획에 따라 투자하지만, 나머지 30%는 상황 변화에 맞춰 적절히 조절해 나간다. 그러나 처음 70%는 누구보다 치밀하게 준비한다. 1980년 방글라데시에 진출할 때도 그랬고, 현재의 영원무역을 있게 한 노스페이스 브랜드를 한국에 선보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영원무역은 1974년 설립 초기 단순 무역 중개 사업을 펼쳤다. 당시 세계 최대 스키복 브랜드 ‘화이트 스텍’ 제품의 수출을 중개했다. 그러나 2년가량 사업을 하고 나니 성장 한계를 느꼈다. 성 회장은 고민 끝에 의류 OEM 사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직접 의류 제조·생산에 뛰어들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곧장 화이트 스텍의 도널드 케네디 회장을 찾았다. 제품을 직접 생산해 납품하겠다고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국내 작은 무역 중개 업체를 이끄는 경영자가 하기에는 대담한 행동이었다. 당시 영원무역은 공장도 없었다. 하지만 그동안 화이트 스텍 제품을 수출 중개하며 쌓은 ‘신뢰’라는 무기가 있었다.

그는 케네디 회장에게 “우리가 경기도 성남에 스키복 등 스포츠 의류 브랜드 생산 공장을 6개월 안에 짓고, 1년 안에 제품을 생산해 납품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케네디 회장이 ‘품질이 나쁘면 모두 반품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화이트 스텍 입장에선 나쁠 게 없었다.

영원무역의 방글라데시 생산공장. 이곳에선 의류, 신발, 의류 소재 등을 생산하고 있다. 사진 영원무역
영원무역의 방글라데시 생산공장. 이곳에선 의류, 신발, 의류 소재 등을 생산하고 있다. 사진 영원무역

성 회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있다”고 답했다. 공장은 그의 계획대로 6개월 만에 완공됐다. 성 회장은 납기를 맞추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생산라인을 돌렸다. 품질 개선을 위한 노력도 끊임없이 했다. 그 결과 영원무역은 화이트 스텍이 만족할 만한 품질의 제품을 생산했고, 그렇게 의류 OEM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후 영원무역은 생산 기술과 노하우를 쌓으며 거래 업체(브랜드)를 늘려나갔다. 현재 영원무역에서 생산하는 고어텍스 등 전문 기능성 소재와 무봉제 생산기술(CWS)은 세계 최고 수준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의류 OEM 업체로서 거래 업체와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
“OEM 사업뿐 아니라, 비즈니스는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신뢰가 무너지면 한순간에 업계에서 퇴출될 수도 있다. 영원무역은 원사부터 원단 제조, 최종 제품 생산까지 수직계열화를 통해 빠른 납기는 물론 품질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이것은 OEM 업체가 갖춰야 할 기본이다. 영원무역은 한 단계 더 나아갔다. 한 공장에서 직접 경쟁 관계인 A사와 B사의 제품을 동시에 생산하지 않는 식으로, 거래 업체에 대한 존중을 보여줌으로써 더 깊은 신뢰 관계를 구축하려고 애썼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두 개 브랜드 가운데 한 브랜드의 제품 생산을 맡으면, 경쟁 브랜드와는 아예 거래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영원무역의 성장을 말할 때 노스페이스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아웃도어 의류 브랜드가 국내 시장에서 성공할 것이라고 예상했나.(영원무역은 1997년 관계사인 영원아웃도어를 통해 노스페이스를 국내에 들여왔다. 제품 생산은 물론 한국 시장 판매도 맡고 있다.)
“노스페이스가 국내 시장에서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했다. 그런 걸 알면 ‘경영의 신’ 아니겠나. 다만 국민소득이 높아지고 레저문화가 활성화되면서 국내 아웃도어 시장이 분명히 커질 것이라는 생각은 있었다. 기존 의류 브랜드에 제품을 납품하는 것만으로는 회사가 성장하는 데 한계를 느끼기도 했고, 새로 뭔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절실했다. 그렇다고 영원무역이 한 번에 ‘뚝딱’하고 노스페이스 생산·판매 사업에 나선 것은 아니다. 사업에 나서기 전 20여년 동안 OEM 업체로 수많은 의류 브랜드를 생산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경험과 노하우를 쌓으면서 노스페이스의 성공을 일궈낼 수 있었다.”

2000년대 들어 노스페이스는 해마다 매출 신기록을 쓰며 국내 아웃도어 의류 시장을 이끌었다. 그 전까지 아웃도어 의류 시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관된 콘셉트로 다양한 제품을 내놓은 것은 노스페이스가 처음이었다. 이 시장을 영원무역이 창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 영원아웃도어의 국내 노스페이스 브랜드 매출은 2000년 약 500억원에서 2010년 약 5000억원으로 10년 만에 10배 증가했다. 당시 청소년들 사이에서 노스페이스 점퍼를 입지 않으면 따돌림을 당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2011년 몇 십 만원짜리 노스페이스 패딩을 자녀에게 사주려면 부모의 등골이 휜다는 ‘등골 브레이커’ 논란이 일었다. 판매 감소에도 영향을 줬는데 어떻게 극복했나.
“당시 많은 것을 배웠다. 노스페이스 제품의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비판이 제기됐는데 사실 우리로서는 좀 억울했다. 청소년 사이에 노스페이스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이런 논란이 생긴 것인데, 너무 잘 팔려서 문제가 된 측면도 있다. 우리는 최고 품질의 제품을 만들어 그에 맞는 가격을 시장에 제시했지만, 사회적으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기업을 단순히 제품을 팔고 이익을 내는 조직으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 ‘기업의 장기 성장을 위해서는 사회적 정서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규모와 질 양쪽 모두에서 한 단계 더 성장해야 한다. 미국의 나이키, 일본의 유니클로 등 자체 브랜드를 가진 업체는 지속성장이 가능하지만, 의류 OEM 업체는 지속성장이 어렵다는 이분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다.
야외 활동복과 방한복 그리고 스포츠 의류 등 그 경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세계적인 아웃도어 의류 OEM 업체로 성장할 계획이다.”

 

Plus Point

영원무역은

영원무역은 노스페이스를 비롯해 아디다스, 파타고니아, 폴로 랠프로런 등 아웃도어 의류 브랜드 제품을 OEM 방식으로 제조하고 있다. 브랜드 수만 40여개에 이른다. 영원무역의 OEM 제조 부문 매출은 회사 전체 매출의 74%에 달한다. 나머지 26%는 2015년 인수한 스위스 자전거 업체 ‘스콧’ 등 다른 스포츠용품 부문에서 발생한다. OEM 즉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방식이란, 주문자가 요구하는 사항대로 제품을 생산, 주문자의 상표를 붙여 완제품으로 공급하는 사업 형태를 말한다.

Plus Point

“한국, 섬유·패션 산업에 대한 시각 바꿔야”

성기학 영원무역 회장은 2014년부터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국내에서 섬유·패션 산업이 사양 산업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을 우려했다. 성 회장은 “한국 섬유·패션 산업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이는 단견”이라며 “바로 잡고 싶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섬유·패션 한 길만 걸은 글로벌 기업이 수두룩하다”며 스페인의 자라, 일본의 유니클로, 스웨덴의 H&M 등을 사례로 들었다. 한국에도 이런 기업이 나올 수 있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성기학 회장은 “국내 의류 기업이 신소재 섬유 개발 등 기술적 부분에 집중해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 C영상미디어 김종연
성기학 회장은 “국내 의류 기업이 신소재 섬유 개발 등 기술적 부분에 집중해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 C영상미디어 김종연

성 회장은 정부의 역할도 강조했다. 그는 “정부가 단순히 매출 등 숫자만 보고 (전자, 자동차 산업과 비교하며) 섬유·패션 산업을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며 “산업은 한 번 죽으면 되살리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동안 한국이 쌓은 섬유·패션 관련 원천 기술과 공급 사슬이 무너지면 미래에 다시 육성하려 해도 쉽지 않다는 얘기다.

그는 “기업도 시대 변화에 맞춰 변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일한 노력이 아니라, 필사즉생의 심정으로 혼신을 쏟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 회장은 “최신 유행을 선도하는 디자인, 경쟁력 있는 가격, 빠른 상품 회전율을 특징으로 한 패스트 패션 비즈니스에서는 한국 기업들이 한발 늦었다 해도, 신소재 섬유 개발 등 기술적 부분에 집중해 경쟁력을 갖는 방법도 있다”며 “한국 섬유·패션 산업은 얼마든지 더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용선 기자
이코노미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