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 풍납동에 위치한 서울아산병원 전경. <사진 : 서울아산병원>
서울 송파구 풍납동에 위치한 서울아산병원 전경. <사진 : 서울아산병원>

3월 28일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과 진료실. 30·40대 학부모와 초등학생 자녀들이 진료를 받고 있었다. 또래보다 키가 작은 자녀가 성장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또는 남들보다 발육 속도가 빨라 성조숙증인 것은 아닌가 걱정하는 부모와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의료진은 환자의 왼손을 엑스레이(X-ray)로 촬영해 골(骨) 연령을 판독한 뒤 본격 검진을 했다. 이진성 영상의학과(소아영상 전문) 교수는 “과거엔 골 연령을 판독하는 데 5분이 걸렸지만, 인공지능(AI) 기술을 적용한 뒤로는 불과 20초 만에 판독이 가능해졌다”면서 “의료진이 책자로 된 가이드라인 영상을 찾아가며 환자의 엑스레이 영상과 일일이 비교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영상의학과 의료진은 지난 2014년 초부터 보다 효율적이고 빠르게 골 연령 영상을 판독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병원은 그 해법을 인공지능에서 찾았다. 병원은 인공지능 관련 스타트업인 뷰노코리아의 기술력을 알아보고 2015년부터 골 연령을 판독하는 데 딥러닝을 적용하기 위한 공동 연구에 돌입했다. 딥러닝은 인간의 뇌를 모방한 컴퓨터 시스템인 인공신경망을 바탕으로 기계가 학습하는 것을 말한다.

서울아산병원과 뷰노코리아는 이미 판독한 수만장의 영상 데이터를 딥러닝 기법으로 컴퓨터에 학습시키며 1년 넘게 연구해 골 연령 판독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


국내 병원 첨단화·대형화 선도

김종재 아산생명과학연구원장은 “인공지능·3D(차원)프린팅·모바일기기 등 과학기술이 의료분야에 활발하게 적용되는 융합의 시대인 만큼, 서울아산병원은 미래의학 기술을 선점하기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환자 개인마다 다른 유전자, 신체적 특성, 환경이나 생활습관을 반영해 개인 맞춤형 치료를 제공하는 ‘정밀의료’ 시대를 위해 서울아산병원이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국내 병원의 대형화와 첨단화는 1989년 서울아산병원 개원 이후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읍·보성 등 농어촌 의료취약지역에 먼저 종합병원을 건립한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는 한국 의학 발전의 중추 기능을 담당하는 세계적 수준의 병원을 짓겠다는 목적으로 서울아산병원 건립을 추진했다.

“원하는 것은 모두 지원할 테니 제대로 된 병원을 지으라”는 게 그의 주문이었다. 정주영 창업주는 이문호 당시 서울대병원 내과 과장(초대 서울아산병원장)과 민병철 당시 고대구로병원장(제2대 서울아산병원장)을 초청해 병원 운영의 전권을 넘겼다. 이 전 병원장과 민 전 병원장은 최고 의술을 가진 국내외 의사들을 서울아산병원으로 영입했다. 이 전 병원장은 미국 전역을 돌며 현지 대형병원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한국인 의사 23명을 초빙했다. 한국인 의사로 미국 외과 전문의 자격을 처음 취득한 민 전 병원장을 따르는 후배와 제자들도 합류했다. 의료진 확보와 육성에 투자하면서 서울아산병원은 의료계에 ‘수술 잘하는 병원’으로 알려졌다.

간 이식 분야 명의로 꼽히는 이승규 교수는 1992년 8월 처음으로 간 이식 수술을 시작하고 지난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5000회의 대기록을 달성했다. 이 교수는 지난 2000년 세계 최초로 2 대 1 간 이식에 성공하면서 세계 간 이식의 역사에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간 이식 수술 건수는 물론 환자 생존율도 95%로 세계에서 독보적인 수준이다.


암병원 의료진과 아산생명과학연구원 연구진이 한자리에 모여 암 환자의 유전체를 분석하고 있다.
암병원 의료진과 아산생명과학연구원 연구진이 한자리에 모여 암 환자의 유전체를 분석하고 있다.

병상규모 확대해 규모의 경제 실현

서울아산병원 개원 때부터 지금까지 심장병원을 이끌고 있는 세계적인 심장 권위자 박승정 교수는 1991년 협심증 환자에게 금속망을 넣어 심장혈관을 넓히는 스텐트 시술을 국내 최초로 성공했고 2010년 심장판막질환에 스텐트 치료를 국내 최초로 도입했다. 300건이 넘는 대동맥 판막 스텐트 시술을 해왔으며 지난해 시술 성공률은 98%에 달했다.

위암 명의 김병식 교수는 복강경 위암 수술 세계 최다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부인암 분야 1인자로 꼽히는 남주현 교수는 복강경을 이용한 수술로 여성암 수술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울아산병원은 병상 규모를 2704병상까지 늘려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면서 의료서비스와 병원시스템의 수준을 끌어 올렸다.

서울아산병원은 또 한 번 ‘혁신’을 주문하며 새 모멘텀을 준비하고 있다. 대형병원의 양적 팽창 시대가 저물고 저(低)성장 시대에 접어든 상황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이다. 서울아산병원은 2011년 설립한 국내 첫 민간 주도형 바이오 클러스터인 ‘아산생명과학연구원’을 발전시켜 미래의학기술을 선도할 계획이다. 환자와 가족들이 느끼는 신체적, 정신적 불안감을 분석하고 이를 위한 맞춤형 해결책을 도출하는 ‘이노베이션 디자인센터’, 병원에 축적된 의료용 빅데이터를 치료와 연구에 활용하기 위한 ‘헬스이노베이션 빅데이터센터’ 등도 함께 구축했다.

아산생명과학연구원 내에는 3개의 연구소와 8개의 센터가 있다. 임상 교수진과 연구원들이 함께 유전체·신약 관련 연구부터 세포치료 연구, 환자맞춤형 의료기기 개발 연구, 빅데이터 및 인공지능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최근 암유전체연구센터에서 40여명의 연구자들이 암 발병의 원인이 되는 유전자 기능 및 활성조절기전 연구를 기반으로 암 진단 바이오마커와 표적 치료제 연구가 한창이다. 김종재 아산생명과학연구원장은 “유전체 분석기법을 이용한 암 특이적 유전자변이를 발굴하고 있으며, 유전체 분석의 핵심인 NGS(차세대염기서열) 기술을 활용해 진단기술과 새 항암요법 개발에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

줄기세포분야와 항암면역세포치료분야의 경우, 미국 미네소타대의 줄기세포센터, 오리건보건과학대의 슈크라트 미탈리포프 박사팀과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환자 맞춤형줄기세포, 유전자편집세포 등 세포 치료와 미토콘드리아유전병의 궁극적 치료를 위한 ‘세부모 아기’ 연구 등이 주요 연구 테마다.

연구원 내 의공학연구소를 중심으로 3D프린팅을 활용한 맞춤형 의료기기 연구개발도 이뤄지고 있다. 시술과 수술용 시뮬레이터, 가이드, 이식보형물 등을 환자 맞춤형으로 개발 제작해 임상에 적용하고 있다.


생명과학연구원 설립해 미래의학 선도

작년에는 유방·내분비외과 안세현·고범석 교수와 융합의학과 김남국 교수팀이 3D프린터로 환자 맞춤형 수술 가이드를 제작해 활용하는 방식으로 유방암 수술의 정밀도를 높여 재발을 줄이는 동시에 불필요한 유방 절제를 줄이기도 했다. 고난도 신장암 부분절제술에서 환자의 신장 부위 CT(컴퓨터 단층촬영) 영상을 설계도로 사용해 실제 신장과 같은 3D모형을 만들어 시뮬레이션하는 방식으로 보다 정밀한 수술이 가능하도록 하는 기술도 개발했다.

한국형 인공지능을 개발 중인 서울아산병원의 인공지능 의료영상 사업단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암을 진단하고 치료하기 전 의료진은 CT, MRI 등 의료영상장비로 환자의 암 위치와 크기, 주변 장기의 구조와 혈관의 진행 방향을 검사한다. 영상 판독 결과에 따라 진단과 수술 절제범위 등 치료법이 달라지기 마련인데, 문제는 아직까지 검사 장비마다 선명도 등 시그널이 다르고 표준화가 돼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영상을 판독하는 데 시간이 걸릴 뿐더러 다수의 보조 인력이 필요한 현실이다. 환자 역시 판독 결과가 나오기까지 마음 졸이며 기다려야 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열쇠로 바로 ‘인공지능 기술’이 떠올랐다. 최근 서울아산병원은 주요 질환의 영상 판독을 지원하는 한국형 인공지능 기기 개발에 착수했다. 이를 위해 산업계와 학계, 연구, 병원 네트워크로 구성된 ‘인공지능 의료영상 사업단’을 발족했다.


서울아산병원 아산생명과학 연구원.
서울아산병원 아산생명과학 연구원.

한국형 의료 인공지능 개발 도전

100억원대의 정부 및 민간 사업비가 투자된 이번 프로젝트를 이끄는 서준범 인공지능 의료영상사업단장은 “2020년 11월까지 폐암, 간암, 관상동맥질환의 영상판독을 지원하는 인공지능 기기를 개발할 계획”이라며 “식품의약품안전처 승인을 받아 의료기기로 상용화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병원이 쓰는 각종 의료영상 소프트웨어에 ‘인공지능’ 기술을 접목하는 것이 핵심으로, 인공지능 원천기술을 개발하고 의료영상저장전송 시스템과 연계해 상용화할 계획이다. 서 단장은 “지금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암을 판독할 수 있는 인공지능 기기 개발로, 환자 치료와 국내 병원에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Plus Point

한국인 잘 걸리는 5대 암(癌) 환자별 정밀치료기술 개발

같은 폐암 진단을 받은 환자일지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특정 항암제의 치료 효과가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런 치료 효과 없이 부작용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환자마다 암세포의 유전 변이 특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서울아산병원은 이를 개선할 대안으로 꼽히는 새로운 암 치료 기술인 ‘오가노이드’를 개발하고 있다. 오가노이드(Organoid)란 장기 주변 조직을 떼어내 만든 시험관 배양 인공장기다. 이를 통해 먼저 시험 치료를 시행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환자 개인별로 가장 높은 치료 효과를 보이는 항암제를 선택하면 맞춤형 정밀 치료가 가능해진다.

서울아산병원은 한국인의 5대 고위험 암인 간암·위암·대장암·폐암·췌장암의 오가노이드 바이오뱅크를 구축하고, 한국인의 유전체 특성이 반영된 한국형 정밀의학 플랫폼을 개발할 계획이다. 연구책임자인 장세진 병리과 교수는 “병원에서 보유하고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임상데이터와 독자적인 종양 오가노이드 배양기술 및 유전체 분석기술을 바탕으로 환자에서 유래된 종양 바이오뱅크를 구축해 한국형 정밀의학 모델을 선도해 나갈 것”이라면서 “대량의 종양 오가노이드를 한꺼번에 배양·분석할 수 있는 유체칩 개발도 성공해 우리나라 암 생존율을 향상시키고 보다 효과적인 항암제 개발이 이뤄질 수 있도록 매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Plus Point

interview 김영학 헬스이노베이션빅데이터센터 소장
“병원이 첨단 의료기기 개발·사업화 주도할 것”

“심장내과 교수로서 빅데이터 기술 활용에 관심이 많았어요. 심혈관 질환을 앓는 환자들도 많고, 기존 방식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들이 많이 있어요.”

김영학 헬스이노베이션빅데이터센터장은 센터 설립 전부터 빅데이터 활용에 관심이 많았다. 3년 전 그는 2007년 1월부터 2011년 6월까지 서울아산병원 건강증진센터에서 건강검진을 받은 5만7000여명의 데이터를 분석해 ‘한국형 심혈관질환 예측 모델’을 개발했다.

나이·당뇨병·고혈압·흡연·관상동맥질환 가족력·백혈구·크레아티닌·당화혈색소·심방세동·혈압지표·콜레스테롤 지표 등 11개 예측인자를 선별해 기본 건강검진 항목만으로도 뇌졸중, 심근경색증의 발생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 한국인 맞춤형 예측 도구를 개발했다.

김 센터장은 “30세부터 80세까지 혈압, 혈액검사 등의 기본 건강검진을 받은 사람들의 결괏값을 각각 11개 예측인자에 적용하면 향후 3년과 5년 내 심혈관질환의 발생을 예측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 센터장은 “다양한 의료 빅데이터를 활용하면 질병을 조기에 예측하고 환자 개개인의 특성에 맞는 치료법에 접근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서울아산병원은 의료 빅데이터 분석 플랫폼을 기반으로 맞춤형 통합 의료 서비스를 시행할 계획이다. 이를 실현시킬 핵심 기지가 바로 헬스이노베이션 빅데이터센터다.

지난해 9월 국내 의료기관 최초로 개소한 빅데이터센터는 올해 ‘헬스이노베이션빅데이터센터’로 조직을 개편했다. 공학박사, 법률전문가, 빅데이터 전문가, 각 과의 의료진이 포진하고 있으며 병원이 보유한 430만명의 환자, 6억7700여만건의 처방, 2억6800만건의 진료 기록, 2200만건의 영상 기록 등 빅데이터 인프라를 제대로 분석 관리하기 위한 ‘프라이빗 클라우드’환경을 구축하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 의료기관 역사상 처음으로 의료 빅데이터를 외부에 공개했다. 마이크로소프트코리아와 함께 의료빅데이터 분석경진대회를 개최해 병원이 구축한 의료 빅데이터 플랫폼을 일반인들에게 개방한 것이다. 김 소장은 “오픈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의 첫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며 “병원의 익명화 시스템인 ‘에이블(ABLE)’을 통해 데이터 내 민감 정보들을 삭제하고 법무팀, 의학연구윤리심의위원회와 함께 검토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의료 빅데이터의 접근성을 넓혀 산업적 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시도였고 첫 대회에 학생, 공학자, 기업, 공공기관 등 115개팀이 참여해 큰 관심을 보였다”고 밝혔다.

서울아산병원 헬스이노베이션빅데이터센터의 궁극적인 목표는 빅데이터를 활용해 환자 치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의료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한국의 의료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데 있다.

김 소장은 “병원 안에서 빅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일과 함께 거창하지만 한국 의료산업의 발전을 일으키는 데도 주요 역할을 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그는 “최근 미국에서 열린 정보과학회 행사에 갔는데 가전, 통신, 의료기기 등 여러 분야의 기업들이 참여했고 그 중심에 병원이 있었다”며 “병원이 기술·제품의 개발 및 사업화를 주도하고 각종 혁신의 테스트베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아산병원 역시 의료진과 각 분야의 전문가, 스타트업, 대기업이 융합해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는 중추 역할을 한다는 구상이다. 센터는 헬스케어 산업에 진입하려는 기업들에 병원의 경험과 전문지식 등을 지원, 자문하는 프로젝트를 곧 시작할 계획이다. 김 소장은 “우리나라도 병원이 주요 산업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