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십자 연구원이 경기도 용인의 R&D센터에서 실험하고 있다. <사진 : 녹십자>
녹십자 연구원이 경기도 용인의 R&D센터에서 실험하고 있다. <사진 : 녹십자>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은 녹십자의 주력 사업은 혈액제제와 백신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 우물만 파온 셈이다. 이런 녹십자의 선택과 집중 전략은 국내 선두 기업을 넘어 전 세계 50개국에 제품을 수출하는 글로벌 제약사로 도약하는 원동력이 됐다.

녹십자가 혈액제제와 백신 분야에 뛰어든 것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제약 산업 상황에서 녹십자의 도전은 말 그대로 무모할 정도의 모험이었다. 혈액제제는 의료계에서조차 개념이 생소했고, 백신은 수익성이 떨어져 국가 주도 사업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알부민’ 등 필수 의약품 국산화

하지만 녹십자는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에서 이미 자급자족하고 있는 필수 의약품을 우리 손으로 생산하겠다는 고집으로, 국산화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1967년 제약 회사로선 엄청난 규모이자 영업이익의 두 배가 넘는 약 2600만원을 투자해 경기도 용인 신갈 공장을 건설했고, ‘일본뇌염백신’과 ‘DPT(디프테리아·파상풍·백일해)백신’을 개발했다. 1971년에는 국내 최초이자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혈액제제 공장을 완공했다. 이후 혈장증량제로 쓰이는 ‘플라즈마네이트’와 ‘알부민’ 등 수입에 의존하던 필수 의약품을 국산화했다.

하지만 녹십자는 백신 개발이라는 낯선 사업 분야와 공장 건설로 인한 막대한 투자비 등으로 경영난에 빠졌다. 녹십자는 이런 위기를 은행 차입이 아닌 필수 의약품 연구·개발(R&D)로 이겨냈다. 녹십자는 오줌이 원료인 혈전용해제 ‘유로키나제’를 순수 우리 기술로 개발했다. 고부가가치 품목이었던 유로키나제는 해외 수요도 많아 핵심 수출 품목 중 하나였다. 녹십자는 유로키나제 성공에 힘입어 1979년 제약사 최초로 수출 1000만달러(약 110억원)를 돌파하며 1982년까지 의약품 수출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기초 백신은 개발 과정이 까다로운 데다 성공한다 해도 시장성이 낮아 대다수 제약사가 개발을 꺼리는 분야다. 지난 반세기 동안 녹십자는 ‘안정적인 백신 공급은 국민의 안전과 직결된다’는 신념 아래 B형간염백신(1983년), 수두백신(1993년), 계절독감백신(2009년) 등을 국내 최초로 개발해 백신 국산화를 이끌었다. 실제로 국가 필수 예방 접종 백신 중 국산화된 백신의 3종 중 2종을 녹십자가 만들었다.

녹십자는 12년간의 R&D 노력 끝에 1983년, 미국과 프랑스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B형간염백신 ‘헤파박스-B’를 개발하며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켰다. 헤파박스-B 개발은 단순한 백신 개발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백신 접종이 시작되면서 13%에 달하던 한국 B형 간염 보균율은 선진국 수준인 2~3%로 떨어졌다.

또 헤파박스-B는 한국이 소위 B형 간염 왕국이라는 외국인들의 우려를 불식시키며 88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데 보이지 않는 기여를 했다. 가격도 기존 고가 수입 제품 백신의 3분의 1로 책정하며 백신 대중화를 앞당겼다. 녹십자는 B형간염백신 성공에 힘입어 제약 업계 4위로 성장했다. 또 여기서 얻은 이익을 임직원만 공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에 환원하는 의미로 1984년 목암생명과학연구소를 설립해 질병 퇴치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


‘국산화 → 사회 기여 → 해외 진출’로 이어져

녹십자는 2009년 또 한번의 전기를 맞게 된다. 그동안 전량 수입에 의존했던 ‘계절독감백신’을 원액부터 완제품에 이르기까지 자체 기술력으로 생산·공급하며 독감백신의 자급자족 시대를 열었다. 당시 정부는 백신 사업이 대규모 시설과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만큼 외국 자본과의 합작을 권유했지만 녹십자는 큰돈이 소요되더라도 단독으로 사업을 추진했다. 이른바 백신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2009년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신종플루 대유행 때도 녹십자는 수개월 만에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신종플루백신’을 개발해 대유행 진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세계적으로 백신 공급이 부족해지면서 가격이 치솟아 수출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우선 공급 원칙을 지켜 국가 보건 안보에 기여했다. 당시 세계보건기구(WHO)는 한국과 녹십자를 신종플루 사태를 가장 모범적으로 방어한 사례로 선정했다.

지난해에도 녹십자는 국내 제약사로는 최초로 지금까지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성인용 파상풍·디프테리아(Td)백신인 ‘녹십자티디백신프리필드시린주’ 품목 허가를 획득했고, 올해 말 출시를 앞두고 있다. 녹십자의 Td백신 국산화로 매년 45만 명분의 수입 대체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Td백신은 10~12세에 1차 접종을 한 뒤 10년마다 추가 접종을 해야 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필수 의약품 국산화를 통한 녹십자의 사회적 기여는 자연스럽게 상업적인 성공으로 이어졌다. 공급자 주도로 시장이 형성돼 진입 장벽이 높은 혈액제제와 백신이 주축인 안정적인 사업 구조로 녹십자는 1967년 창립 첫해 1276만원에 불과했던 매출이 지난해 1조1979억원을 기록했고, 1972년부터 지난해까지 45년 연속 흑자를 달성했다. 올해 실적을 보면, 2017년 3분기 누적 기준 매출 9616억원, 영업이익 902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각각 9.7%, 29.8% 증가했다.

녹십자는 지난해 기준 매출에서 혈액제제(36%)와 백신(27%) 비율이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녹십자 혈액제제 기술의 결정체인 면역결핍치료제 ‘아이비글로불린-에스엔(IVIG-SN)’은 70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고, 이 중 수출이 70%를 차지한다. 지난해에는 브라질 정부로부터 역대 최대 규모인 2570만달러(약 280억원) 규모의 아이비글로불린-에스엔 공급 사업을 수주했다.

녹십자는 현재 국내 3개 공장(충북 오창과 음성, 전남 화순)과 해외 2개 공장(중국, 캐나다)을 운영하고 있다. 생산 품목은 각 공장별로 사업 포트폴리오에 맞춰 효율적으로 분산돼 있다. 오창 공장과 중국·캐나다 공장에선 혈액제제와 유전자 재조합류, 화순 공장은 백신제제, 음성 공장에선 일반제제를 주로 생산한다.

독감백신으로 대표되는 녹십자의 백신 부문도 해외에서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다. 녹십자는 2011년 아시아 최초로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독감백신의 사전적격성평가(PQ) 인증을 받아 범미보건기구(PAHO) 입찰 자격을 확보한 이후 매년 수출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사전적격성평가는 세계보건기구가 백신의 품질과 유효·안전성을 심사해 국제기구 조달 시장 입찰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제도다.

실제로 녹십자는 2014년 이후 범미보건기구 독감백신 입찰에서 다국적 제약사를 제치고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올해도 범미보건기구 남반구 입찰에서 3700만달러(약 403억원) 규모의 독감백신 공급 사업을 수주하며 입지를 공고히 했다. 이번 수주 금액을 포함한 녹십자의 독감백신 누적 수주액은 해외 수출 6년 만에 2억달러(약 2200억원)를 돌파했다. 여기에 2015년 기준 유럽연합(UN) 입찰 시장에서 한국 수주 실적 중 42%가 녹십자 제품일 정도로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에는 세계보건기구로부터 4가 독감백신 ‘지씨플루쿼드리밸런트’의 사전적격성평가 승인을 획득했다. 4가 독감백신으로 이 같은 승인을 받은 것은 사노피 파스퇴르에 이어 녹십자가 세계 두 번째다.

이는 녹십자가 해외 시장 선점을 통해 글로벌 독감백신 시장 점유율 확대에 나선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국제기구 입찰을 통해 좋은 수출 실적을 기록하고 있는 3가 독감백신과의 시너지 효과도 기대된다.

독감백신은 계절성 백신이기 때문에 각기 백신 공급 시기와 균주가 다른 북반구와 남반구 시장에서 공급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사업 확대에 중요하다. 지난해 녹십자는 국제기구를 통한 독감백신 수출 증가에 힘입어 남반구와 북반구 시장 공급의 균형을 50 대 50으로 맞췄고, 향후 선진 시장 진출로 규모의 경제를 통한 성장 전략을 계획하고 있다.


녹십자의 면역결핍치료제 ‘아이비글로불린-에스엔’(왼쪽)과 독감 백신 ‘지씨플루’. <사진 : 녹십자>
녹십자의 면역결핍치료제 ‘아이비글로불린-에스엔’(왼쪽)과 독감 백신 ‘지씨플루’. <사진 : 녹십자>

면역항암제 등 신약 개발에 집중 투자

녹십자의 백신 수출 부문의 한 축을 담당하는 ‘수두백신’의 경우, 1993년 출시 당시부터 중남미와 아시아 등에 수출했고, 지난해에는 약 60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특히 예방접종 사업을 확대하고 있는 브라질, 에콰도르 등을 공략해 매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율이 90%가 넘는다. 올해 1월에는 범미보건기구의 2017~2018년 공급분 수두백신 입찰에서 6000만달러(약 725억원)의 수두백신 사업을 수주했다. 이는 범미보건기구 수두백신 전체 입찰분의 66%에 해당하는 규모다.

녹십자는 주력 사업인 혈액제제와 백신의 글로벌 진출을 위한 개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은 물론 혁신 신약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를 위해 매년 매출의 10% 이상을 R&D에 투자하고 있다. 단기적으로 이익 감소가 불가피하더라도 차세대 성장 동력 발굴을 위해 최근 5년간 R&D 비용을 두 배가량 늘리며 꾸준히 미래 지향적 가치 실현에 앞장서고 있다.

녹십자 R&D의 방향성은 명확하다. 그동안 회사 성장 원동력인 혈액 및 면역 분야의 약물 개발 기술을 토대로 바이오 신약과 차세대, 또 그 이후 세대의 혁신 혈우병치료제, 면역항암제 분야에 집중한다는 전략이다. 지금까지 녹십자를 포함해 국내 제약 기업이 다국적 기업을 따라가는 형세였다면, 이제 녹십자는 이미 잘하고 있는 분야와 이를 토대로 더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해 추종자가 아닌 선도자로 도약한다는 계획이다.

현재 녹십자는 약효 지속 시간을 크게 늘린 차세대 장기지속형 혈우병치료제를 개발 중이다. 이미 기존 약물보다 1.5~1.7배 약효 지속 시간을 늘린 혈우병치료제가 글로벌 시장에 출시됐지만 녹십자는 기존 약물 대비 약 3배 약효 지속 시간을 늘린 차세대 제품을 개발 중이다.

이 약물의 개발 속도는 다국적 제약사 제품과 비교해 동등 이상의 수준이어서 앞으로 개발 속도를 끌어올린다면 충분히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다는 분석이다.

또 B형 간염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로 구성된 바이오 신약 ‘GC1102’는 최종 단계인 임상시험 3상 진입을 앞두고 있다. 이 약물의 개발 속도가 관련 약물 중 세계에서 가장 빨라 기대가 크다.

이외에도 녹십자는 바이오 업계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사인 면역항암제 개발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면역항암제의 개발은 대부분 항체 연구나 면역학과 관련이 있다. 녹십자가 오랜 시간 혈액제제와 백신 사업을 하면서 축적한 연구 역량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녹십자 관계자는 “녹십자는 지난 반세기를 이끌어온 주력 사업인 혈액제제와 백신 분야의 기술과 노하우를 기반으로 차세대 혁신 신약을 개발 중”이라며 “이미 잘하고 있고 또 잘할 수 있는 분야의 R&D에 집중해 시장을 선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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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제제 사람의 혈액 중 액체 성분인 혈장을 원료로 하는 의약품이다. 혈장에서 면역, 지혈 효과가 있는 단백질을 고순도로 분리해서 만든다. 녹십자의 주요 혈액제제로는 자가면역질환, 중증 감염증 등의 면역 및 감염과 관련된 질환에 사용하는 ‘아이비글로불린-에스엔’이 있다.
백신 병원체의 감염이 있기 전 인체 내에 인위적으로 불활화(병원성 제거) 혹은 약독화(병원성 약화)시킨 병원체를 주입해 인체의 면역체계를 활성화하는 항원이다. 백신을 사용하면 인체가 병원체에 감염되더라도 병원체에 의한 피해를 예방하거나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Plus Point

13조원 규모 북미 혈액제제 시장 공략

올해 10월 30일 캐나다 퀘벡주에서 열린 녹십자 캐나다 법인 GCBT의 혈액제제 공장 준공식. 드니 코데(왼쪽 두 번째) 몬트리올 시장, 김영호(왼쪽 세 번째) GCBT 대표 등이 참석했다. <사진 : 녹십자>
올해 10월 30일 캐나다 퀘벡주에서 열린 녹십자 캐나다 법인 GCBT의 혈액제제 공장 준공식. 드니 코데(왼쪽 두 번째) 몬트리올 시장, 김영호(왼쪽 세 번째) GCBT 대표 등이 참석했다. <사진 : 녹십자>

녹십자는 10월 캐나다 퀘벡주 몬트리올에서 캐나다 법인 GCBT의 혈액제제 공장 준공식을 개최했다. 이로써 녹십자는 국내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북미에 바이오 공장을 세운 기업이 됐다.

캐나다 GCBT 공장은 2015년 6월 착공했고, 최근 공장 건축과 기계적인 설비를 모두 완료했다. 총설비투자 규모가 2억5000만캐나다달러(약 2200억원)에 달한다. 100만 규모의 혈액제제 생산 능력을 갖춘 이 공장의 준공으로 녹십자는 세계 의약품 시장의 중심인 북미에 생산 거점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 국내외 혈액제제 생산 능력이 270만 로 늘어나 ‘글로벌 톱5’ 수준으로 올라서게 됐다.

이 공장 설립을 위해 캐나다 퀘벡주 정부는 GCBT에 2500만캐나다달러 규모의 자금 지원은 물론 공장이 본격 가동에 들어가면 면역글로불린(IVIG)과 알부민을 장기간(최소 8년) 구매해주는 혜택을 줬다. 캐나다는 녹십자 공장을 유치해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면역글로불린, 알부민 역내 생산이 가능해져 필수 혈액제제의 수급 안정화와 고용 창출 효과를 얻었다.

주요 글로벌 혈액제제 업체가 공장을 미국에 둔 것과 달리 녹십자가 캐나다에 생산 거점을 마련한 것은 다양한 혜택을 얻으면서 안정적으로 시장에 진입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캐나다 공장은 ‘글로벌 녹십자’를 향한 포석이자 사실상의 첫 단추다. 녹십자는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판매 허가를 신청해 자료 보완 등 막바지 절차를 진행 중인 아이비글로불린-에스엔(IVIG-SN)을 시작으로 혈액제제 사업을 최대 시장인 북미 시장에 진출시킨다는 전략을 진행 중이다.


캐나다에 100만 규모 혈액제제 신공장 준공

북미는 세계 의약품 시장의 격전지로 꼽힌다. 특히 혈액제제의 경우 25조원에 달하는 전 세계 시장 중 북미가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크다. 또 북미 지역은 면역글로불린 가격이 국내에 비해 3~4배 비싸 수익성도 높다. 녹십자가 지난 몇 년간 북미에 선제적 투자를 하고 전사적 역량을 집중하며 성공 의지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녹십자는 FDA 판매 허가를 받으면 연간 140만 규모의 오창 공장에서 생산한 혈액제제를 미국에 수출할 계획이다. 먼저 국내 생산 제품으로 시장에 안착한 뒤 캐나다 공장에서 상업 생산이 시작되면 현지에 직접 공급한다는 전략이다. 녹십자는 캐나다 공장 본격 가동 시 연간 3000억~4000억원의 매출이 창출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녹십자는 공장 상업 가동 시기를 오는 2020년으로 내다보고 있다. 의약품 공장은 제품 양산 전에 설비 적절성 검증, 시생산, GMP(제조·품질관리 기준) 인증 등의 과정을 거쳐야 상업용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

박용선 기자
이코노미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