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방사성폐기물 처리시설. 사진 블룸버그
유럽의 방사성폐기물 처리시설. 사진 블룸버그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과제인 고준위방사성폐기물 영구 처분시설 설치 논의가 차일피일하고 있습니다. 안전성이 확보되지 않은 고준위방사성폐기물 임시 저장 시설마저 포화되고 있어 정부가 대책 마련을 더 미뤄서는 안 됩니다.”(익명을 요청한 A 교수)

이르면 올해 말 월성 원전(경북 경주)을 시작으로 2024년 한빛·고리 원전(전남 영광·부산 기장), 2037년 한울 원전(경북 울진)의 고준위방사성폐기물(사용 후 핵연료) 임시 저장 시설(수조 등)이 포화될 전망이다. 그러나 사용 후 핵연료 영구 처분을 위한 정부의 대책은 마련될 조짐이 보이지 않고 있다. 사용 후 핵연료란 원자력 발전 과정에서 전력을 생산하고 남은 인체에 유해한 방사성 물질을 뜻한다.

1978년 첫 원전 상업운전을 시작한 한국에는 사용 후 핵연료를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시설이 아직 없다. 정부는 지난 2014년 10월부터 20개월 동안 공론화 과정을 거쳐 2016년 7월 ‘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을 발표하고 중장기적으로 지역주민 의견수렴을 거쳐 고준위 방폐장(방사성 폐기물 처분시설) 설치 지역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2017년 5월 정권 교체 후 이 기본계획은 사실상 백지화됐다. 이어 지난해 5월 환경단체들이 참여한 ‘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 재검토준비단(이하 재검토준비단)’이 활동에 돌입했다. 정부는 준비단의 의견을 바탕으로 새로운 안을 내겠다고 했으나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A 교수는 “정부는 사실상 환경단체의 요구에 따라 2016년에 발표한 기본계획을 다시 만드는 작업을 해야 한다”면서 “사용 후 핵연료 임시 저장 시설 포화 시점이 점점 다가오는 만큼 원전을 멈추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정부 관계자는 “재공론화 과정을 거쳐 기본계획을 다시 마련하겠다는 방침이지만, 아직 일정은 잡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전 정권 기본계획 백지화 후 차일피일

사용 후 핵연료 처리문제는 그간 ‘당장 급하지 않다’는 이유로 공론화를 거친 대책 마련 후 폐기되는 역사가 13년째 반복돼왔다. 일각에서는 공무원들이 임기기간 중에 민감한 결정을 피하려다 보니 발생한 일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앞서 2006년 8월 ‘지속가능발전‧에너지산업전문위원회’에서 고준위 방폐장 마련을 위한 첫 공론화 논의가 출발했다. 그러나 이후 9차례나 엎어졌다. 가장 최근 사례는 ‘사용 후 핵연료 공론화위원회’에서 권고한 내용을 바탕으로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가 2016년 7월 ‘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당시 산업부 에너지자원실장은 브리핑에서 “2053년부터 고준위방사성폐기물을 땅 속에 묻는 영구 처리시설을 가동하겠다”면서 “이 시설물이 들어설 부지를 12년간 부지공모와 주민의사 확인, 심층조사 과정 등을 거쳐 확정하겠다”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특히 2019년부터 포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월성 원전은 단기적으로 원전 부지 내에 ‘건식저장시설’을 추가로 확보하겠다”고 했다.

산업부는 발표 후 기본계획 실현을 위한 절차법을 만들어 국회에 발의했으나 이는 결국 당시 야당(현 여당)의 반대로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후 기본계획은 사실상 백지화됐다. 백지화 원인은 2017년 5월 정권교체 후 환경단체와 주민의견 수렴 부족을 이유로 기본계획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은 2017년 5월 출범하자마자 ‘탈원전’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며 사용 후 핵연료 처리에 대한 고민은 뒷전으로 미뤘다. 그러다가 지난해 5월 재검토준비단을 출범했다. 이어 지난해 11월 재검토준비단이 정책 건의사항을 정부에 전달했으나, 정부는 ‘검토 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한 산업부 관계자는 “재검토준비단 내부적으로도 이견이 많아 대책 마련에는 시간이 많이 걸릴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했다.

2015년 공론화 위원회에서 활동했던 한 위원은 “이미 공론화를 거쳐 마련한 기본계획을 바탕으로 중장기적으로 차근히 진행하면 될 문제였는데 백지화돼버렸다”면서 “이번에도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면 과거의 역사가 반복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문제는 현재 운영 중인 원전 23기에서 발생한 사용 후 핵연료 양이 2015년 말 기준 누적 1만4000t에 달한다는 점이다. 현재는 이를 각 원전 내 임시 저장 시설에 보관하고 있다. 아직까지 사고는 나지 않았지만, 안전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독일은 비행기가 추락해도 끄떡없을 만큼 견고한 시설을 만들어 이를 보관하고 있다.

특히 일부 원전은 이미 임시 저장 시설이 포화상태로 접어들고 있다. 당장 급한 곳은 월성 원전(1~4호기)이다. 지난해 이미 준포화상태(최고 90.3%)에 달했다. 대책이 시급하다.


정권 관계없는 중장기적 대책 필요

이처럼 대책 마련에 어려움을 겪는 건 일개 부처 차원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측면도 있다. 저장 시설을 어느 지역에 설치하느냐가 핵심 과제이기 때문이다. 지역 주민 설득은 물론 각각의 지역구가 ‘표밭’인 국회의원들이 과연 방폐장 설치를 수용할 수 있느냐가 현실적인 문제다.

원자력학회 자료에 따르면 과거 공론화 과정에서 고준위 방폐장 설치 지역으로 거론된 곳은 울진 7회, 영일 3회, 영광 3회, 고창 3회, 장흥 3회, 영덕 2회, 고성 2회, 양양 2회, 안면도 2회, 굴업도 2회, 비응도 1회, 어청도 1회, 비안도 1회, 원산도 1회, 삽시도 1회, 강화도 1회, 완도 1회, 진도 1회, 태안 1회, 무안 1회, 보령 1회, 양산 1회다. 모두 동해안과 서해안 인접 지역 또는 도서 지역이다.

조성경 명지대 교양학부 교수는 “사용 후 핵연료 처리 문제의 글로벌 모범사례로 꼽을 수 있는 핀란드는 1983년부터 기본계획을 마련해 정권 교체와 관계없이 꾸준한 안전성 테스트와 주민 설득 작업을 거쳐 2023년부터 고준위 방폐장을 운영할 예정이다”라며 “한국 정부도 용기와 의지를 갖고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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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준위방사성폐기물 방사성폐기물은 열과 방사능 농도에 따라 고준위·중준위·저준위· 극저준위의 4가지로 분류된다(국제원자력기구 기준). 열과 방사능 준위(수준)가 높을수록 방사선의 방출 강도가 높아 인체에 더욱 치명적이다. 고준위방사성폐기물(High level radioactive waste)은 원자로에서 연료로 사용된 뒤 배출되는 물질 또는 핵무기 폭발 후 나오는 물질이다. 전자의 경우 사용 후 핵연료라고도 한다. 핵무기가 없는 한국에서는 고준위방사성폐기물과 사용 후 핵연료가 같은 뜻으로 쓰인다.

김문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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