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목 대구대 박사, 대구성모여성병원 연구실장, 영남대 연구교수
이동목
대구대 박사, 대구성모여성병원 연구실장, 영남대 연구교수

9월 26일(현지시각) 아일랜드 서쪽 지방 ‘골웨이’를 찾았다. 바람이 거세고 비가 자주 내리는 탓에 도로 곳곳에 검은 돌로 쌓은 돌담이 있었다. 얼핏 제주도 같았다. 골웨이는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절경(絶景) 모허 절벽 그리고 거리 음악으로 알려진 작고 조용한 도시다. 동시에 ‘의료 기술 산업 단지’가 조성돼 있는, 조용하지만 강한 도시다. 1994년 글로벌 의료 기기 제조사 보스턴사이언티픽이 골웨이에 터를 잡으면서, 연계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현지 회사들은 보스턴사이언티픽의 제품에 필요한 고성능 부품을 조달할 수 있는 수준의 기술력 있는 협력업체로 성장했다.

골웨이 시내에서 차로 15분 달려 경마장 ‘골웨이 레이스코스’에 도착했다. 기세 좋은 말들 대신 최첨단 의료 기기 박람회 ‘메디컬 테크놀로지 아일랜드 2019(Medical Technology Ireland 2019)’를 찾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메디컬 테크놀로지 아일랜드는 200개 기업이 참가한 의료 기술 박람회다. 박람회장엔 최신 기술을 적용해 만든 의료 기기들이 넘쳐났다. 로봇 팔이나 의료용 실리콘 튜브, 3D 프린터 등이 눈을 사로잡았다.

그때 익숙한 경상도 사투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눈을 돌리자 한국생산기술연구원(KITECH)의 바이오메디칼생산기술센터(이하 BMTC)의 부스가 보였다. KITECH은 중소·중견기업의 기술 개선을 지원하는 정부 출연 연구기관이고, BMTC는 KITECH의 하부 조직으로 중소·중견기업에 의료 기기 설계 및 공정 지원, 시제품 제작 등을 지원한다.

부스에 자리한 한국 사람 다섯 명이 외국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이동목 KITECH 바이오메디칼생산기술센터장은 “경북 영천시 소재의 중견·중소기업 세 곳과 함께 참가했다”면서 “2010년부터 대구·경북 일대의 전자 부품 제조사들이 바이오·의료 기기 분야로 업종을 전환할 수 있도록 지원해왔고, 일부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영천에 바이오·의료 기기 관련 산업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고 했다.

이 센터장이 소개한 업종 전환에 성공한 기업은 신흥정밀이다. 신흥정밀은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금형(똑같은 모양의 결과물을 반복적으로 생산하기 위한 금속 틀) 제조에 참여하는 1차 협력업체다. 경북 구미에 있던 신흥정밀은 의료 기기 부품 제조를 차세대 먹을거리로 정하고 2013년부터 개발했다. 의료 기기 부품 제조 시설은 경북 영천에 뒀다.

끈기 있게 도전한 끝에 신흥정밀은 2017년 하반기 글로벌 기업 지멘스의 카테터(신체에 삽입하는 얇은 의료용 관)의 맨 끝부분에 들어가는 ‘몰드 팁’을 생산하는 1차 협력업체로 선정됐다. 지멘스는 경북 포항에 카테터 생산 공장을 갖추고 있는데, 이곳으로 납품한다.

업종 전환은 한국 중견 제조기업의 미래 생존을 좌우할 중요한 문제다. 대기업 협력업체 지위에 만족해서는 생존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기존 산업 생태계가 변화하고 있으며, 국내 노동자의 임금 수준이 올라가면서 대기업들이 특별히 어려운 기술이 필요 없는 부품은 저임금 국가에서 조달하는 경향이 늘어나는 탓이다.

‘이코노미조선’은 이동목 센터장이 소개한 신흥정밀의 업종 전환 사례에 한국 제조업 혁신의 실마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센터 부스에 있던 그에게 즉석 인터뷰를 요청해 박람회장에 마련된 간이 회의 장소에서 업종 전환 그리고 신흥정밀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업종 전환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기존 회사들의 전문 기술을 기반으로 산업 생태계를 육성하는 것이 완전히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보다 성공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KITECH과 영천시가 맺은 업무협약(MOU)에 따라 2010년 BMTC가 출범했다. 처음에는 일단 신규 업체의 창업을 지원해 생태계를 육성하려 했다. 하지만 이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산업 생태계를 만드는 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됐다.”

왜 영천에 바이오·의료 생태계를 마련한 건가.
“경상도의 지리적 요지다. 대구·구미 지역의 실력 있는 대기업 협력업체와 만나기 좋고, 의료·섬유·소재 관련 기업이 많은 경산 지역과도 가깝다. 고령자 친화형 의료 기기 산업이 발전하고 있는 부산과도 멀지 않다. 게다가 경제자유구역인 영천하이테크파크지구(규모 124만㎡) 개발이 시작되면 생태계가 더욱 활성화할 것이다. 이곳은 내년 2월 착공해 2023년 완공을 예상하고 있다.”

신흥정밀은 어떻게 BMTC가 지원한 업종 전환의 첫 사례가 됐나.
“신흥정밀은 오랜 기간 삼성전자의 1차 협력업체였다. 그런데 2013년쯤부터 삼성전자가 국내 협력업체 대신 베트남 회사들과의 휴대전화 부품 제조 외주 계약을 확대하려고 했다. 협력업체 입장에서 이런 소식은 큰 위기다. 사업 부문 다각화가 절실하다고 느낀 이 회사의 김용현 대표가 BMTC에 찾아와 ‘BMTC의 조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테니 도와달라’고 했다. 끈기를 가지고 오랜 시간 투자한 끝에 글로벌 기업 지멘스에서 요구하는 수준의 기술력을 갖춰 의료 기기 제조 1차 협력업체가 됐다.”

지멘스가 신흥정밀의 손을 선뜻 잡던가.
“그렇지 않았다. 굉장히 어렵게 성사된 계약이다. 글로벌 대기업에 우리 중견기업이 찾아가봤자 상대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 BMTC 차원에서 지멘스를 찾아갔다. 경북 영천의 바이오·의료 산업 생태계 육성 전략을 소개하며 수차례 문을 두드렸다. 당시 지멘스도 마침 카테터 제조 부품을 한국에서 조달해볼까 하는 의향이 있었던 차였다. 지멘스의 카테터 생산 시설이 포항에 있기 때문이다. 여러 번 찾아가니, 지멘스에서 카테터 부품 하나를 주면서 글로벌 품질 기준을 알려줬다. 그러면서 이렇게 만들어볼 수 있겠냐고 했다. 그걸 받아와서 신흥정밀과 1년간 연구·개발에 매진했다.”

BMTC는 부품 연구·개발 단계에서 어떤 지원을 했나.
“신흥정밀이 지멘스와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의료 기기 부품의 경우 ‘이 부품이 어떤 기계를 통해 생산됐고 특정 국제 표준을 준수하는 제품이다’라는 내용을 담은 각종 자격증과 품질 인증 문서들이 매우 중요하다. 식약처 등 각국 정부 기관에서 의료 기기 인허가를 할 때 부품의 생산 정보도 따지기 때문이다. 신흥정밀이 처음에는 이런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국내 협력업체로 오래 일했던 관성 때문이었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고객사에서 제시하는 품질 기준을 준수하면 됐지, 까다로운 국제 품질 인증까지 받을 필요는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의료 기기의 경우 이런 국제 품질 인증이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절차의 중요성을 꾸준하게 강조했다. 김 대표가 우리의 요구를 끝까지 따라와줬다.”

아일랜드에서 열린 박람회에 참가한 이유는.
“아일랜드는 의료 기기의 제조·수출 강국이다. 2016년, 센터 차원에서 벤치마킹할 대상이 없을까 조사하다가 아일랜드 모델이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좋은 사례라고 판단했다. 아일랜드의 의료 기술 산업 단지와 교류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