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서 나와 스타트업 창업, 해외 투자자로부터 투자금 유치, 창업 4년 만에 미국 글로벌 기업에 인수, 미국 본사 부사장을 거쳐 수석부사장(Senior Vice President)까지 승진. 창업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꿈꾸는 거의 모든 것을 단번에 이룬 사람이 있다. 그랬던 그가 다시 창업판에 뛰어들었다. 그것도 ‘스타트업의 성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다. 기업용 인공지능(AI) 솔루션을 개발하는 창업 3년 차 스타트업 ‘올거나이즈’의 이창수 대표 이야기다.
이창수 대표는 자신이 창업한 모바일 게임 이용자 분석 업체 파이브락스(5 Rocks)가 2014년 미국 모바일 광고 플랫폼 운영사 탭조이에 인수되면서 정보기술(IT) 업계의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다. 인수 대금은 400억~500억원대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표를 비롯한 파이브락스 임직원 5인은 탭조이 본사가 있는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이 대표는 2017년 다시 회사를 나와 현지에서 AI 소프트웨어 업체 올거나이즈를 창업했다.
한 번의 큰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두 번째 창업의 길을 걷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 그 열정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한 기술 스타트업 콘퍼런스 참석차 서울에 온 이 대표를 11월 11일 서울 역삼동 올거나이즈 사무실에서 만났다. 올거나이즈는 서울과 일본 도쿄에 지사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본사가 있다. 그는 미국에 적을 두고 서울과 도쿄를 오가며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올거나이즈는 어떤 회사인가.
“자연어 이해(NLU‧Natural Language Understanding) AI인 ‘앨리(Alli)’를 기업에 판매한다. 규모가 큰 기업부터 작은 가게까지 사업체를 운영하다 보면 내외부에서 많은 질문을 받게 된다. 앨리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빠르게 찾아주는 AI다. 실제로 회사 안에는 엄청나게 많은 문서가 있다. 그리고 그 문서 어딘가에는 질문에 대한 답이 있다. 130쪽짜리에 달하는 복잡한 매뉴얼 수만 개를 올려놔도 앨리는 짧은 시간에 이 문서 속에서 답을 찾아 준다. 임직원이 더 편하게 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대표는 첫 질문을 던지자 바로 자신의 랩톱을 열고 시범을 보였다. 보험사 직원이 된 이 대표가 앨리 대화창에 ‘이빨이 부러졌는데 이것도 커버가 되나요?’라는 질문을 타이핑하자, 0.1초 만에 네 가지 답이 떴다. 보험 약관에 쓰여 있는 용어인 ‘치아’ 대신 ‘이빨’, ‘파절’ 대신 ‘부러졌는데’라고 써도 앨리는 금세 답을 찾아줬다. 이 대표는 은행 업무 편람, 발전소 장비 매뉴얼, 보험사 보험 약관 등 다양한 업종에서 앨리를 활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확도는 85~90% 수준이다. SK텔레콤, LG유플러스, 현대카드, 일본의 전력 회사 J-파워 등이 고객사다. 한국‧일본‧미국 고객사 비중이 4 : 4 : 2 정도다.
앨리만의 경쟁력이 있다면.
“추가 작업이 더 필요하지 않은 똑똑한 AI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보통 AI를 학습시키려면 태깅(tagging‧데이터에 답을 수동으로 알려 주는 것) 작업이 필요하다. A라는 회사가 AI를 도입했다고 치자. 이 AI를 더 똑똑하게 만들려면 수많은 태깅 작업을 또 해야 한다. 사람을 위해 도입한 AI인데, 이 AI를 학습시키기 위해 사람이 엄청난 작업을 더 해야 하는 것이다. 앨리는 이런 과정이 필요 없다. 이미 공개된 수많은 텍스트, 질문 데이터로 학습된 AI다. 머신러닝의 일종인 ‘전이학습(轉移學習‧AI특정 환경에서 학습된 AI를 다른 환경에 적용하는 것)’ 능력이 뛰어나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산학과 자연어 처리 연구실 석사 과정을 밟던 이창수 대표는 박사, 연구원으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진로 대신 대기업에 취직했다. 계속 좋은 논문을 냈지만, 이 대표의 눈에는 논문보다 야후 같은 포털의 영향력이 더 컸다. 박사 과정을 포기하고 찾아간 곳이 윤송이(현 엔씨소프트 사장) 상무가 이끌던 SK텔레콤의 통신지능(CI) 사업본부였다. 이곳에서 그는 팀원들과 몇 개의 AI 로봇을 개발했지만, 사업화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직장 생활 4년 만에 회사를 나와 파이브락스를 창업했다. 대기업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나.
“당시 SK텔레콤에서 했던 일의 방향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당시 기술 수준이 생각했던 것을 충분히 구현할 만큼은 아니었다. 빛도 보지 못하고 사라진 로봇도 있다. 직접 로봇을 들고 유치원에 팔아보겠다고 다니기도 했지만 끝내 시장에 내놓지는 못했다. 다만 이때 AI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공부했다. 파이브락스는 내가 직접 파급력 있는 서비스를 만들어보고 싶어서 퇴사하고 창업한 회사다. 모바일 게임 데이터 분석 솔루션을 만들었다. 게이머 행동 패턴을 분석해 이탈·매출 등을 예상하는 것이다. 딥러닝까지는 아니고, 전통적인 방식의 AI였다. 당시 경쟁사는 통계를 활용해 그룹 단위 계산만 할 수 있었는데, 우리 솔루션은 게이머 개인 모두를 분석했기 때문에 정확도가 높았다.”
과학고, 대학, 직장, 첫 번째, 두 번째 창업 모두 AI 기술과 연관 있다. 이 정도면 AI 외길 인생 아닌가.
“(웃음) 그런 셈이다. 특히 탭조이에서 일하는 2년간 AI 최신 기술인 딥러닝에 대해 많이 공부했다. 유튜브에 올라 있는 관련 영상을 찾아보고, 코세라(Coursera), 유데미(Udemy) 등 온라인 교육 플랫폼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많이 배웠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딥러닝 기반의 고성능 자연어 이해 기술에 집중하게 됐다.”
많이 받는 질문이겠지만, 안 할 수가 없다. 왜 또 창업했나.
“미국에서 딥러닝을 공부하면 할수록 ‘이 기술과 비전을 좇지 않으면 죄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IT 업계에는 이미 두 개의 큰 파도가 지나갔다. 첫 번째 파도는 웹, 두 번째 파도는 모바일이다. 이 모든 것을 집어삼킬 만큼 거대한 파도가 보였다. 바로 AI다. 거대한 파도를 마주했는데 작은 파도에 만족하긴 억울했다. 게다가 개인적으로 나는 성향상 일을 안 하면 안 되는 부류의 사람이기도 하다.”
미국과 일본에서 스타트업 하기는 어떤가.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모두 쉽지 않다. 다만 글로벌 무대에서 활약하려면 B2B(기업 간 비즈니스)가 유리한 것 같다. 국가별 특징은 다 다르지만, 기업은 국적이 달라도 유사한 문제를 안고 있다. 게다가 나도 어느 정도 직장 경험, 회사 운영 경험이 있다 보니 조직 내 업무 흐름에서 어느 부분이 가려운지를 알고 있다는 점이 어느 정도 장점으로 작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