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키와 지드래곤(GD)이 협업한 에어포스1 파라-노이즈. 사진 나이키
나이키와 지드래곤(GD)이 협업한 에어포스1 파라-노이즈. 사진 나이키

“한정판 운동화, 백화점 가면 살 수 있나요?” 이렇게 묻는 사람은 구세대일 가능성이 크다. 운동화 좀 사 본 젊은이들은 해당 브랜드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을 쉼 없이 드나들며 발매 공지를 기다린다. 언제든 뛰쳐나가겠다는 각오로.

지난해 11월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한 가수 지드래곤(GD)은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와의 협업으로 공식활동을 재개했다. 그가 내놓은 ‘에어포스1 파라-노이즈’는 나이키 온라인 스토어와 홍대 매장에서 기습적으로 추첨 판매됐다. 나이키는 이날 8888장의 응모권을 배포했고, 다음 날 SNS 계정을 통해 818명의 당첨자를 발표했다. 21만9000원짜리 운동화는 곧 중고 판매 사이트에서 10배 넘는 가격에 재판매됐고, 출시 두 달여가 된 지금도 수백만원의 가격표가 달린 채 거래된다.

운동화의 위상이 높아진 데는 드롭, 래플이라 불리는 독특한 쇼핑 문화가 한몫했다. 드롭(drop)이란 신제품을 기습적으로 출시하는(투하하는) 것으로, 특정 날짜나 시간에 소량의 제품을 판매하는 일종의 타임 마케팅을 말한다. 협업 상품을 한정 발매하거나, 계절 상품을 수차례에 나눠 발매하는 식이다. 기업 입장에서 드롭은 조기 완판은 물론, SNS를 통한 구전효과까지 거둘 수 있어 일석이조다.

1994년 출범한 뉴욕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 슈프림은 드롭 판매로 명성을 얻었다. 매주 목요일 오전 신상품을 발매하는데, 전 세계 11개 슈프림 매장 일대는 쇼핑객으로 혼잡이 빚어진다. 온라인 드롭도 진행하지만, 사람보다 빠른 자동완성봇이 몇 초 만에 상품을 쓸어가는 통에 신상품을 손에 쥐는 건 하늘의 별 따기다.

스트리트 브랜드와 한정판 운동화의 판매 기법으로 등장한 드롭은 이제 패션계 전반에서 선호하는 마케팅 기법이 됐다. 루이비통은 슈프림의 협업 컬렉션을 드롭 방식으로 판매해 매장 앞에 긴 줄을 세웠고, 지난해 하이트진로가 온라인 패션몰 무신사에서 판매한 참이슬 백팩은 기습 발매로 5분 만에 400개를 완판했다.

요즘엔 공정성이 추가된 래플(raffle)이 선호된다. 래플이란 사전 응모 후 무작위 추첨을 통해 당첨자에게 구매 자격을 부여하는 것으로, 기금 모금을 위한 추첨 복권을 뜻하는 영어 단어 래플에서 따왔다.

할인권도 아니고 구매권을 주는 게 뭐 그리 대수냐 싶겠지만, 잘 기획된 래플은 확실한 모객 효과를 보장한다. 무신사는 지난해 블랙프라이데이 한정판 운동화 8켤레를 1000원에 구매할 수 있는 래플 행사를 진행했는데, 4일간 총 69만 명이 응모했다. 이 중 나이키 ‘에어포스1 로우 오프화이트’ 래플엔 1시간 동안 10만 명 이상이 참여했다. 스파오와 펭수가 협업한 ‘남극유치원 스웨트 셔츠’엔 2만5000여 명이 래플에 참여했다.

이해니 무신사 마케팅팀 과장은 “래플은 인기 상품의 공정성을 높일 뿐 아니라, 소비자에게 새로운 쇼핑 경험을 제공해 호응을 얻고 있다”라고 했다.

드롭과 래플은 MZ세대(밀레니얼 + Z세대, 1981~2004년생)의 SNS ‘인증 문화’와 맞물려 하나의 쇼핑 문화가 됐다. 2015년 제조일괄유통화(SPA) 브랜드 H&M이 프랑스 명품 발맹과 협업 상품을 팔 때만 해도 밤샘 줄 서기가 광적인 소비 행태로 치부됐지만, 이젠 어떤 물건이나 새로운 경험을 먼저 해보는 트렌디한 사람으로 대접받는다. 대학생 최정운(25)씨는 “드롭·래플 일정이 뜨면 일단 응모하고 본다. 만약 어울리지 않더라도 한 번 자랑하고 되팔면 그만이다”라며 “인기 상품의 경우 소비자 가격보다 수십수백 배의 웃돈을 벌 수도 있다”고 말했다.


1 캐릭터가 대신 줄 서는 ‘에어맥스줄서기’ 행사. 사진 인스타그램 캡처2 무신사에서 드롭 판매한 참이슬 백팩. 5분 만에 400개를 완판했다. 사진 무신사3 지난해 휠라X유튜브 게이머 협업 드롭 행사에 몰린 사람들. 사진 휠라4 단 30시간만 판매하는 아마존의 ‘더 드롭’. 아마존 웹사이트 사진 캡처5 한정판 상품을 만들어 특정 시간에 독점 판매하는 신세계인터내셔날의 ‘드롭스’. 사진 신세계인터내셔날
1 캐릭터가 대신 줄 서는 ‘에어맥스줄서기’ 행사. 사진 인스타그램 캡처
2 무신사에서 드롭 판매한 참이슬 백팩. 5분 만에 400개를 완판했다. 사진 무신사
3 지난해 휠라X유튜브 게이머 협업 드롭 행사에 몰린 사람들. 사진 휠라
4 단 30시간만 판매하는 아마존의 ‘더 드롭’. 아마존 웹사이트 사진 캡처
5 한정판 상품을 만들어 특정 시간에 독점 판매하는 신세계인터내셔날의 ‘드롭스’. 사진 신세계인터내셔날

놀이가 된 ‘쇼핑’

기습·추첨 판매 방식이 호응을 얻자 패션 유통 업계도 이를 응용한 마케팅을 확대하고 있다. 나이키는 지난해 드롭과 래플을 게임화한 ‘에어맥스줄서기’ 이벤트를 선보였다. 한정판 운동화 구매권을 얻기 위해 사람 대신 캐릭터를 SNS에 줄을 세우는 것인데, 행사 기간 인스타그램에 11만6000여 개의 캐릭터가 줄을 서는 장관이 펼쳐졌다.

행사 참여를 위해 드레스코드를 요구하기도 한다. ‘에어포스1 파라-노이즈’ 추첨 행사를 진행한 나이키 홍대점은 나이키 상의 제품과 ‘에어포스1’ 운동화를 착용한 사람만 응모할 수 있게 했다. 진짜 팬에게만 팔겠다는 것이다. 지나친 상술 같지만, 참여자들은 성실히 이 규칙을 따른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요즘 소비자는 희소성과 새로운 경험 등 자신의 가치를 충족시키는 것에 줄을 서고 지갑을 연다. 힘들게 얻은 것일수록 그 가치는 더 높아진다”고 말했다.

드롭 전문 브랜드도 등장했다. 지난해 세계 최대 온라인몰인 아마존은 세계적 패션 인플루언서(SNS 유명인)와 협업한 제품을 단 30시간 동안만 판매하는 ‘더 드롭(The Drop)’을 출범했고, 신세계인터내셔날은 사내 벤처팀 S.I_랩을 통해 한정판 상품을 만들어 특정 시간에 독점 판매하는 ‘드롭스(DROPS)’를 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