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노후 자금 737조원을 관리하는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가 날로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국민 노후 자금 737조원을 관리하는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가 날로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2018년 스튜어드십 코드(기관 투자자의 의결권 행사 지침) 도입과 함께 주주 활동을 강화하고 있는 국민연금공단이 2020년 주주총회 시즌에도 기업들의 주요 안건에 잇따라 반대 입장을 표명하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국민연금의 반대표 행사가 의도한 결과를 낳지는 못하고 있다. ‘올해도 국민연금은 종이호랑이 신세’라는 비아냥이 나오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의 안건 저지 성공률이 낮긴 해도 다른 기관 투자자를 자극하고 주주 활동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2월 28일부터 3월 31일까지 예정된 정기 주총 안건들 가운데 총 42건(22개사)에 대해 반대 의견을 냈다. 그러나 국민연금이 반대표를 던진 의안이 국민연금 뜻대로 부결된 경우는 아직(3월 26일 기준) 나타나지 않았다. 국민연금이 국내 자본시장에 미치는 엄청난 영향력을 고려하면 초라한 성적이다.

많은 기업이 올해 주총 시즌을 앞두고 바짝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국민연금이 2018년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데 이어 지난해 12월에는 재계의 반대에도 ‘적극적 주주 활동 가이드라인’을 의결했기 때문이다. 또 국민연금은 올해 2월 56개 기업에 대한 주식 보유 목적을 단순 투자에서 지배구조 개선, 배당 문제 등에 관여할 수 있는 일반 투자로 바꾸기도 했다. 재계는 “정부가 연기금을 활용해 ‘기업 길들이기’에 나선다”고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재계의 걱정은 기우(杞憂)였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다. 국민연금은 자신이 최대 주주인 기업에서도 반대한 안건이 죄다 가결되는 굴욕을 당했다. 3월 20일 열린 하나금융지주(국민연금 지분율 9.94%) 정기 주총에서 국민연금은 사외이사 선임안 7건과 감사위원 선임안 4건 등 총 11건에 반대표를 행사했으나 모든 안건이 통과됐다. 국민연금은 같은 날 열린 BNK금융지주(국민연금 지분율 11.14%) 주총에서도 사외이사와 감사위원 선임안에 반대 입장을 밝혔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주총 시즌에도 종이호랑이라는 오명을 얻은 바 있다. 당시 국민연금이 반대한 안건은 총 648건. 그중 국민연금 의도대로 부결된 것은 11건(1.70%)에 불과했다. 이 11건 중에서도 4건은 부결 사유가 ‘의결 정족수 미달’이었다. 국민연금 입김이 반영된 건 7건뿐이었다.

사실 국민연금은 상당수 기업에 주요 주주로 이름을 올리긴 했어도 지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경우는 거의 없다. ‘자본시장의 공룡’이 주총장에서 의외로 맥을 못 추는 가장 큰 이유다. 현재 국민연금이 가장 많은 지분을 보유한 회사는 만도(지분율 14.34%)인데, 이 기업 최대 주주는 두 배 수준인 30.26%의 지분을 갖고 있다. 국민연금을 최대 주주로 둔 기업 7곳에 대한 국민연금의 지분율은 10% 안팎에 그친다.


기업 견제 촉구 선봉장

매년 반복되는 종이호랑이 논란에도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의 주주 활동 자체를 눈여겨봐야 한다”고 조언한다. 안건 저지 성공률은 부차적인 문제이고, 국민연금이 주주로서 국내 기업들의 책임 경영을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진짜 중요한 포인트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했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민연금의 반대가 해당 안건 부결로 이어지지는 못하더라도 국민연금이 반대하는 이유를 공개하면, 이는 시장 전체가 새로운 견해를 수용하는 계기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황 연구위원은 “기업에 필요한 변화의 방향성을 꾸준히 제시하는 국민연금의 행동은 다른 기관 투자자가 주주로서 역할을 더욱 충실히 수행하게 하는 촉매제로 작용한다”며 “궁극적으로 기업의 지속 가능성 제고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많은 기관이 국민연금의 뒤를 따라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에 동참하고 있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에 따르면 스튜어드십 코드에 참여 중인 기관 투자자는 3월 26일 기준 125곳이다. 2018년 상반기에 30여 곳에 불과했던 점을 고려하면 2년 만에 네 배가량 급증한 셈이다. 스튜어드십 코드 참여 ‘예정’ 기관도 35곳에 이른다.

국민연금의 기업 견제 강화 행보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기업 평가 사이트 CEO스코어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지난해 열린 임시·정기 주총(총 626회)에서 다룬 4139건의 안건 가운데 16.48%인 682건에 반대표를 행사했다. 이는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기 전인 2017년의 11.85%보다 4.63%포인트 상승한 수치다. 같은 기간 국민연금의 안건 찬성 비율은 87.34%에서 83.11%로 4.23%포인트 떨어졌다.


불만·불안 토로하는 기업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재계는 걱정이 태산이다. ‘큰손’ 국민연금이 점차 ‘야생호랑이’가 되어가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는 것이다. 현재 국민연금이 5% 넘는 지분을 보유한 회사는 310곳 이상이다. 여기서 지분율이 10% 이상인 기업만 추려도 100곳이 넘는다. 한 대기업 고위 관계자는 “지배구조상 정부 산하인 국민연금이 경영에 개입할 수 있는 기업이 너무 많다”며 “제2의 대한항공 사례가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고 했다.

이 관계자가 언급한 대한항공 사례는 국민연금이 지난해 3월 고(故)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재선임을 반대한 일을 말한다. 당시 국민연금은 대한항공 지분을 11% 넘게 보유한 2대 주주였다. 조 회장은 ‘캐스팅보트’ 국민연금의 반대에 가로막혀 대한항공 경영권을 빼앗겼고, 이후 12일 만에 세상을 떠나 재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재계를 더 불안하게 만드는 건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국민연금의 독립성 문제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CIO)은 공단 이사장 위에 있는 보건복지부 장관이 승인해줘야 뽑을 수 있다. 복지부 장관은 대통령이 택한 인물이다. 기획재정부는 해마다 실시하는 기금 평가에서 국민연금을 늘 이렇게 평한다. “의사 결정 체계의 전문성과 독립성이 부족하고 전문인력 관리도 미흡하다. 기금운용본부가 공단의 한 부서로 소속되고 CIO의 연임 결정 권한도 공단 이사장에게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국민연금이 주식 의결권을 이용해 기업 경영에 개입하는 행위는 지나친 경영 간섭으로 관치 논란을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