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 5월 13일 출품 예정이었던 프랜시스 베이컨의 ‘트립틱(triptych)’.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아 연기되거나 온라인 경매가 진행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 5월 13일 출품 예정이었던 프랜시스 베이컨의 ‘트립틱(triptych)’.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아 연기되거나 온라인 경매가 진행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전 세계 미술품 컬렉터(수집가)의 꿈의 장소인 미국 뉴욕 경매장 소더비(Sotheby’s)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일랜드 표현주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1909~92)의 초고가 작품 ‘트립틱(triptych)’을 5월 경매에 출품하려 했지만,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성사가 어려워진 탓이다. 소더비는 올해 3월 이 작품을 최소 6000만달러(약 730억원) 이상으로 경매에 출품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 코로나19가 4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가는 등 맹위를 떨치며 이런 계획이 어그러지게 된 것. 뉴욕 문화·예술계에서는 이번 경매가 온라인 경매로 대체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지만, 이럴 경우 낙찰가가 낮아질 수 있어 소더비는 장고를 거듭하고 있다.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NYT) 등 주요 외신 보도에 따르면 코로나19는 미국 뉴욕에서 관광업에 더해 문화·예술계에도 큰 타격을 입히고 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구겐하임 미술관, 뉴욕현대미술관(MoMA) 등 뉴욕을 대표하는 문화공간이 ‘셧다운(임시운영중단)’에 들어갔으며 많은 경매장도 사실상 무기한으로 문을 닫은 상황이다.

세계 미술계의 관심은 5월 경매에 나올 예정이었던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에 쏠려 있다. 이번 작품은 그가 1962~91년에 만든 28개의 ‘트립틱’ 연작 중 하나다. 이들 28점 중 다섯 작품은 이미 경매에 나왔으며 이번 작품은 여섯 번째다. 베이컨의 작품은 경매에 나올 때마다 고가에 낙찰되면서 화제에 올랐다. 2008년 소더비 경매에서 베이컨이 1978년에 완성한 ‘트립틱’은 8600만달러(약 1060억원)에 낙찰되며 당시 전후 현대미술 경매 사상 최고가를 갈아치웠다. 이 작품은 당시 영국 프로축구 구단 첼시의 구단주이자 러시아 석유 재벌인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샀다.

이후 2013년 베이컨의 작품 ‘루치안 프로이트의 세 가지 연구’는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4200만달러(약 1749억원)에 팔려 본인의 낙찰 기록을 깨는 동시에 당시 현대미술 경매 사상 최고가를 경신하기도 했다. 이 기록은 2015년 11월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 이탈리아 태생의 프랑스 화가 모딜리아니(1884~1920)의 작품 ‘누워 있는 나부(Nu couche)’의 1억7040만달러(약 2098억원)에 의해 깨졌다.

이에 따라 세계 미술계는 베이컨의 이번 작품이 현대미술 최고가를 다시 경신할지 주목하고 있다. 소더비는 6000만달러(약 730억원)에서 경매를 시작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베이컨의 대표작으로도 불리는 이 작품은 그의 일생에 걸친 중요한 작품 중 하나다. 고대 그리스 비극의 영감을 바탕으로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베이컨 특유의 작풍이 담긴 걸작으로 꼽힌다.


모딜리아니의 1917년 작품 ‘누워 있는 나부(Nu couche)’. 이 작품은 2018년 5월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억5720만달러(약 1936억원)에 낙찰됐다. 앞서 2015년 같은 작가의 또 다른 ‘누워 있는 나부’는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7040만달러(약 2098억원)에 낙찰된 바 있다. 사진 소더비
모딜리아니의 1917년 작품 ‘누워 있는 나부(Nu couche)’. 이 작품은 2018년 5월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억5720만달러(약 1936억원)에 낙찰됐다. 앞서 2015년 같은 작가의 또 다른 ‘누워 있는 나부’는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7040만달러(약 2098억원)에 낙찰된 바 있다. 사진 소더비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장 내부 전경. 사진 소더비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장 내부 전경. 사진 소더비

야속한 코로나19에 고민 빠진 소더비

원래 봄 시즌은 뉴욕 경매장에서 대목으로 꼽혀왔다. 지난해 5월 소더비와 크리스티, 필립스 등 뉴욕의 대표적인 경매장은 5일 연속 경매로 총 20억달러(약 2조5000억원)를 쓸어 담았었지만, 올해는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았다. NYT는 4월 19일(현지시각) “베이컨 작품 경매는 이번에 이뤄지지 못할 것”이라며 온라인 경매 진행 가능성에 대해 보도했다. 미국에서 코로나19는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 4월 21일 현재 미국 코로나19 확진자는 78만 명을 돌파했으며 사망자는 4만 명을 넘어섰다. 에이미 카펠라초 소더비 대표는 NYT 인터뷰에서 “온라인 경매가 과연 고객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경매 회사들이 온라인 판매를 고려하는 이유는 비전통적인 젊은 고객들을 유인하기 위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온라인 경매 성사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문제는 낙찰가다. 실제 코로나19에 대응해 소더비, 크리스티, 필립스는 온라인 판매에 나름 박차를 가하고는 있지만, 아직 초고가 작품에 대한 온라인 경매 성사 사례는 없다. 수집가들이 베이컨의 작품 같은 초고가 작품에 대해 온라인에서 적극적으로 입찰하는 건 아직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저명한 딜러이자 미술품 수집가인 아담 린데만은 “가능하다면 반드시 ‘진짜 경매’를 보고 싶다”라며 “나는 ‘온라인 팬’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스위스 금융사 UBS의 아트 마켓 연례 보고서를 작성하는 미술 경제학자 클레어 맥앤드루는 “온라인 경매는 아직 수집가의 최고의 선택지는 아니다”라며 “경매장에서 느낄 수 있는 흥분과 공동체 의식을 온라인으로는 대체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크리스티 경매 전 최고경영자(CEO)인 에드워드 돌먼은 “실물 관람 기회가 없는 온라인 경매가 작품의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민할 여지가 많다”고 했다.

실제 주요 경매장은 일부 작품의 온라인 경매를 하고 있지만 아직은 규모가 미미하다. 필립스는 올해 3~4월 온라인 현대미술 경매에 47개국 입찰자가 참여했다고 밝혔지만, 가장 비싸게 낙찰된 작품 가격이 35만달러(약 4억원)에 불과했다. 또 2019년 전체 미술 시장 매출액 640억달러(약 79조원) 중 온라인 거래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9%(59억달러)에 불과했다.

전문가들은 고가 경매에 대한 온라인 시스템 도입 여부는 코로나19 파장이 얼마나 오래갈지에 달려있다고 전망한다.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둔 미술품 매매 자문회사인 파인아트그룹의 가이 제닝스 상무는 “코로나19가 앞으로 6~9개월 더 지속하면 수집가들이 온라인 경매에 대해서도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지켜보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에드워드 돌먼 전 크리스티 CEO는 “코로나19가 온라인 경매의 ‘티핑 포인트(어떠한 현상이 서서히 진행되다가 작은 요인으로 한순간 폭발하는 것)’가 될 것인지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며 “한번은 큰 고비를 넘겨야 온라인 경매가 광범위하게 확대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