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훈(가운데) 다나산업 대표가 8월 26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 본사 옥상에서 아내 서경희(오른쪽)씨, 딸 우희정 다나산업 상품기획실장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채승우 객원기자
우석훈(가운데) 다나산업 대표가 8월 26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 본사 옥상에서 아내 서경희(오른쪽)씨, 딸 우희정 다나산업 상품기획실장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채승우 객원기자

모노즈쿠리(ものづくり)와 마이스터(meister). 각각 장인(匠人)이라는 의미를 담은 일본과 독일 말이다. 그리고 이는 이 국가들이 자랑하는 대를 이은 ‘백 년 기업’의 토대가 된 산업 경쟁력의 기반을 상징하기도 한다. 장인은 오랜 시간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대가를 뜻한다. 국내에도 숨은 장인이 적지 않다. 아직 백 년 기업은 아니지만, 44년간 침낭 개발에 몰두해 산악인의 사랑을 받아온 다나산업(구 다나우모)의 우석훈(78) 대표도 그중 한 명이다.

‘이코노미조선’은 8월 26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 다나산업 본사에서 우 대표를 만났다. 우 대표의 아내이자 사업 동반자 서경희씨와 가업(家業)을 이을 준비에 한창인 그들의 딸 우희정 상품기획실장이 자리를 함께했다. 다나산업은 현재 직원 열 명 남짓한 작은 회사지만, 이곳 제품은 산악인들 사이에서는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생산하는 국산 명품으로 통한다. 주력 제품은 침낭이지만 다운 파카(방한용 점퍼), 다운 베스트(방한용 조끼), 텐트 슈즈(방한용 신발) 등도 제작한다. 대부분은 월 생산량을 미리 정해놓지 않고, 주문에 맞춰 제작하고 있으며 하루 평균 1.5개 정도(침낭 기준)만 일일이 손으로 만든다. 생산 능력을 초과하면 고객에게 기다려 달라고 요청하는데, 품질에 목마른 고객은 흔쾌히 수락한다고 한다.

다나산업의 역사는 197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고등학생 시절 경북학생산악연맹에 이어 서울대 문리대 산악회에서 활동한 우 대표는 산을 사랑하는 건강한 청년이었다. 일례로 대학 3학년 때는 서울 도봉산에 지금도 있는 연기봉(峰) 등반 루트를 동료와 함께 개척하기도 했다. 설악산 울산바위 클라이밍 루트의 일부 구간도 역시 그가 선후배들과 함께 개척해, 산악백과에 그의 이름이 올라가기도 했다.

그는 학창 시절부터 전문 산악인이 되기보다 산악인이 사용하는 장비와 의상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닭털이 들어간 장갑과 침낭 생산으로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오리털을 사용한 파카와 침낭 등의 생산을 본격화하고, 1990년대부터 거위 털 중심의 제품을 출시하면서 우모(羽毛·조류의 깃털) 전문 산악 브랜드 입지를 다졌다. 특히 세계적인 산악인 엄홍길 대장과 고(故) 고미영(2009년 히말라야에서 사망) 대장 등 유명 산악인들이 해외 원정 등반 시 다나산업 침낭을 사용하면서 명성이 높아졌다.

그는 “젊은 시절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평생 지킨 원칙은 좋은 제품은 좋은 재료가 기본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원단을 구하기 위해 시장 구석구석 안 돌아다닌 곳이 없다”라며 “그렇게 만든 장비를 원정대 등에서 필드 테스트를 거쳐 개선점을 알려줬다”라고 했다. 이처럼 현장의 엄격한 테스트를 거쳐 개선된 제품에 대한 소비자 만족도는 갈수록 높아졌다.

특히 다나산업의 평생 애프터서비스(AS) 정책은 우 대표의 꾸준한 고객 만족 노력을 상징한다. 판매한 지 30년이 넘은 제품도 최소한의 공임만 받은 채 우모 충전, 외부 수선 등을 해준다. 우 대표는 “우리가 만든 제품이기 때문에 당연히 책임져야 한다. 장인정신이라고 하면 쑥스럽고 거창하지만, 절대로 품질과는 타협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어긴 적은 없다”라며 “안전과 직결되는 제품이기 때문에 품질에 대한 고집을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라고 강조했다. 딸 우 실장은 “최근 생산된 지 20년이 넘은 제품 AS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아버지의 손길과 정성이 고스란히 느껴졌다”라며 “대학에서 의상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과거 제품 디자인으로부터 배울 점이 많다”라고 했다. 아내 서씨는 “남편의 경영 철학을 한 마디로 압축하면 고집이다. 남이 어떻게 말하더라도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라고 강조했다.

우 대표는 초창기 돈이 부족한 학생들을 위한 침낭은 따로 만들었다. 이 제품은 오리털로 만들었는데 마진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 아직도 판매되는 ‘알피니스트-B’라는 모델 라인의 시초가 바로 그것이다. 학생과 군인, 초보 산악인이 여전히 많이 쓰고 있다.


우석훈 다나산업 대표는 고객이 손수 쓴 빛바랜 편지를 수십 년간 간직하고 있다. 사진 김문관 기자
우석훈 다나산업 대표는 고객이 손수 쓴 빛바랜 편지를 수십 년간 간직하고 있다. 사진 김문관 기자

2002년 뇌출혈로 위기…가업 이은 딸

다나산업은 전문 산악인들과 산악 마니아들로부터 ‘믿을 만한 국산 브랜드’로 통하며 승승장구했다. 몽벨과 발란드레 등 수입 침낭 업체가 국내에 본격 진출했을 때도 마니아들의 변함없는 수요로 인해 잘나갔다. 그러나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사업이 크게 휘청했다. 우 대표가 급성 뇌출혈로 쓰러진 것. 그때 그를 대신해 부인 서씨와 우 실장을 비롯한 딸들이 경영 일선에 나섰다. 꼼꼼하고 안전한 제품을 만든다는 우 대표의 원칙에 대학에서 의상 디자인을 전공한 딸의 솜씨가 더해진 것이다.

서씨는 “침낭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원재료(우모)인데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품질 좋은 헝가리산 거위의 가슴 털만 고집한다”라며 “털 한 올 한 올을 검수하고 전문가들이 꼼꼼히 재봉하고 있다”라고 했다. 다나산업은 44년간 외주를 단 한 번도 주지 않았다. 모든 제품을 자체 생산한다. 우모 제품의 제작은 재단, 칸 나누기, 봉제, 우모 주입, 포장, 배송순으로 진행된다. 이곳에서는 같은 우모와 원단이 들어와도 매번 테스트한다. 이는 대부분의 산악 브랜드가 활용하는 주문자 상표부착 생산(OEM) 등과 같은 대량 생산 체계에서는 불가능하다. 특히 우모 제품은 사각 재봉선으로 나뉜 한 칸마다의 섬세함(다운의 무게)이 중요한데 0.1g 단위로 정확히 체크하고 있다. 그리고 제품에 대한 검수는 지금도 몸이 불편한 우 대표의 손길을 모두 거치고 있다. 

굵직한 수입산 브랜드보다 가격 경쟁력도 있다. 일례로 다나산업의 70만원대 제품과 기능이 비슷한 수입산은 100만원 가까이 한다. 20% 이상 저렴하다. 대체로 국산보다는 비싸지만, 내한 온도를 조금 더 높게 한다.

21세기 들어 해외 산악 원정대의 활동은 예전 같지 않다. 브랜드 홍보를 위한 대기업의 지원도 늘었다. 우리나라의 평균기온이 조금씩 높아지는 추세로 바뀌고, 단체로 등산하는 사람들보다 개인적인 등산가들이 많아졌다. 이에 따라 다나산업은 제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우 실장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영향으로 ‘차박(자동차에서 잠을 자며 머무르는 것을 뜻하는 신조어)’이 유행인데 여기서 새로운 기회를 찾고 있다”라고 했다. 이불 모양 사각 침낭을 만들어 기존의 침낭에 편의성을 더했다. 우 실장은 “새로운 트렌드인 백패커(백팩 안에 장비나 식량을 넣고 도보 여행을 하는 사람)를 겨냥해 털의 양은 줄이지 않은 채 보온성을 유지하면서 더 작게 접히는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우 대표는 “산악인들의 가슴에 오래도록 기억되는 건 장비에 대한 믿음이다. 고집과 섬세함이 함께해야 품질을 지킬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다나산업이 전용 오프라인 영업망 없이도 여전히 잘나가는 이유다.

인터뷰를 마치며 우 실장에게 가업을 잇는 데, 아버지의 그림자를 어느 정도 벗어난 것 같냐고 물었다. “제품을 만드는 기술은 상당 부분 따라간 것 같다. 하지만 제품을 대하는 마인드는 평생을 해도 못 따라잡을 것 같다. 아버지로부터 매일 이를 배워야 한다. 정말 백 년 기업이 되려면 말이다.” 싱긋 웃으며 돌아온 그의 대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