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회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즐겨 입는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와 똑같은 회색 티셔츠와 후디로 가득 찬 저커버그의 옷장. 사진 저커버그 페이스북
왼쪽부터 회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즐겨 입는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와 똑같은 회색 티셔츠와 후디로 가득 찬 저커버그의 옷장. 사진 저커버그 페이스북

‘정보기술(IT) 기업의 성지’ 미국 실리콘밸리가 패션의 성지로 떠오르고 있다. 패션(Fashion)의 ‘F’ 자도 모를 것 같은 이공계 리더가 모인 이곳이 패션계의 관심을 받다니, 우리로 치면 ‘판교 패션’이 뜬다니 의아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최근 급부상한 패션 기업을 보면 수긍이 된다. 올버즈·에버레인·와비파커·스티치픽스·로티스… 모두 실리콘밸리를 기반으로 성장한 패션 스타트업이다.

한때 IT 노동자들은 추레하고 볼품없게 묘사됐다. 부스스한 머리에 덥수룩한 수염, 티셔츠와 후디(또는 파타고니아 플리스 조끼)를 대충 걸친 모습. 사람들은 이들을 긱(geek·괴짜), 너드(nerd·공부 잘하는 얼간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수식어 뒤에 시크(chic·멋지고 세련된)라는 단어가 붙기 시작했다. 애쓰지 않아도 멋진 파리지엔 스타일을 ‘프렌치 시크’라고 부르듯 말이다.

변화를 이끈 이는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다. 그는 12년간 검은 터틀넥 니트(일명 목티)와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뉴발란스 운동화를 신었다. 옷을 고를 때 쓰는 시간과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서였다. 처음엔 지루한 괴짜 취급을 당했지만, 애플의 성공과 함께 그의 차림새는 ‘혁신가의 유니폼’으로 비쳤다. 남에게 잘 보이고 싶은 생각 따윈 없는 그 쿨한 모습은 놈코어(nomcore·평범함을 추구하는 패션) 트렌드의 탄생을 끌어내기도 했다.

후배들도 그의 계보를 충실히 이었다.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 마크 저커버그는 언제나 회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구글 CEO 순다르 피차이는 트랙 재킷에 운동화 차림을 즐긴다. 그렇다고 이들이 값싼 옷을 입는 것은 아니다. 잡스의 터틀넥 니트는 일본 유명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의 것이고, 저커버그의 회색 티셔츠는 이탈리아 명품 브루넬로 쿠치넬리(심지어 맞춤복), 피차이의 운동화는 프랑스 명품 랑방이다.

실리콘밸리 CEO의 스타일은 자수성가한 억만장자를 꿈꾸는 젊은이의 모방 심리를 자극한다. ‘실리콘밸리 교복’이라 불리는 파타고니아 플리스 조끼는 신제품이 출시될 때마다 품절 대란을 겪는다. 최근에는 뉴발란스가 잡스가 즐겨 신었던 992 운동화의 복각판을 출시해 조기 완판했다. 굳이 IT 업계 종사자가 아니더라도 전통보다 혁신을 추구하고, 타인의 시선보다 자신의 만족도를 중히 여기는 실리콘밸리 엘리트의 스타일은 현시대 젊은이를 매료시키고 있다. 더욱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장기화로 집콕(집에만 있는)과 재택근무가 일상화한 지금, 이들의 편하고 무던한 패션은 ‘집옷’으로도 제격이다.


왼쪽부터 ‘귀차니스트’를 위해 인공지능(AI)이 옷을 골라주는 스티치픽스, 단순한 디자인의 양모 신발로 실리콘밸리를 사로잡은 올버즈. 사진 스티치픽스·올버즈
왼쪽부터 ‘귀차니스트’를 위해 인공지능(AI)이 옷을 골라주는 스티치픽스, 단순한 디자인의 양모 신발로 실리콘밸리를 사로잡은 올버즈. 사진 스티치픽스·올버즈

실리콘밸리 시크 전파하는 스타트업

최근에는 실리콘밸리에서 탄생한 패션 기업들이 세계 무대로 보폭을 넓히고 있다. 겉옷·속옷·신발 등 분야는 다양하지만, 이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비슷하다. 실용적이고 합리적이며, 군더더기 없는 심플한 디자인. 그리고 비즈니스의 과정은 윤리적이고 친환경적일 것. 올버즈는 양모로 만든 신발로 실리콘밸리 ‘잇 슈즈(it shoes·최신 유행하는 신발)’로 등극했다. 여기에 쓰인 양모는 사람 머리카락 굵기의 20% 수준으로 얇아 가볍고 맨발로 신어도 땀이 차지 않는다. 디자인이 단순해 어디든 잘 어울리고, 세탁기에 돌려 빨 수도 있다.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 신발’이라고 극찬한 이 신발은 래리 페이지 구글 공동창업자,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배우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등이 즐겨 신으며 명성을 얻었다. 기업 가치는 14억달러(약 1조6618억원)로, 최근 국내 시장에 진출했다.

스티치픽스는 인공지능(AI)으로 소비자 취향을 분석해 좋아할 만한 옷을 보내준다. 옷 고를 시간은 없지만, 멋은 내고 싶은 바쁜 소비자를 공략했는데, 꽤 적중률이 높아 ‘패션계의 넷플릭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회원만 320만 명, 지난해 매출은 15억달러(1조7805억원)를 기록했다. 출범 6년 만인 2017년 미국 나스닥에 상장했다.

에버레인은 농산물처럼 모든 옷의 제조 원가와 원산지, 근무 환경 등을 공개해 신뢰를 얻었다. ‘패션은 환상을 주는 것’이라며 가격을 부풀려 파는 전통적인 산업 구조에 반기를 든 결과다.

지속 가능성도 필수다. 실리콘밸리 스타일의 본질은 과시가 아니라 태도이기 때문이다. 올버즈는 양모 외에도 유칼립투스 잎과 사탕수수에서 추출한 원료로 신발을 만들고, 모든 신발에 탄소 중립 라벨을 부착한다. 로티스는 폐플라스틱 병에서 추출한 원사를 3D프린터로 뜨개질하듯 짜 신발을 만든다. 영국 해리 왕자의 부인 메건 마클 왕자비가 즐겨 신는 것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