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애플 잎으로 만든 가죽 ‘피냐텍스’로 만든 H&M의 가죽 재킷. 사진 H&M·피냐텍스
파인애플 잎으로 만든 가죽 ‘피냐텍스’로 만든 H&M의 가죽 재킷. 사진 H&M·피냐텍스

‘센 언니’ 열풍을 이끈 그룹 ‘환불원정대’의 리더 이효리. 그는 거침없고 카리스마 넘치는 부캐(부캐릭터) ‘천옥’을 연기하기 위해 다양한 가죽옷을 입고 방송에 출연했다. 잘 알려졌듯 본캐(본캐릭터) 이효리는 채식주의자이자 동물 애호가로 유명하다. 부캐에 심취한 나머지 본캐를 잊은 걸까? 아니, 천옥의 가죽옷은 모두 비건 가죽(vegan leather)으로 제작됐다.

비건 가죽이란 동물의 사체를 사용하지 않은 가죽을 일컫는다. 우리가 흔히 ‘레자’라고 부르는 인조 가죽(artificial leather)이 여기에 속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인조 가죽은 싸구려 취급을 받았지만, 최근에는 친환경적이고 위트 있는 의류 소재로 대접받는다. 그런 의미로 에코(eco), 페이크(fake)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 인조 가죽은 동물 가죽보다 관리가 편하고 가격이 저렴하다. 요즘엔 품질이 좋아져 ‘가짜 티’도 나지 않는다. 게다가 인조 가죽을 입으면 진짜 가죽을 입을 때 느끼는 죄책감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패션 업계에 따르면 매년 10억 마리가 넘는 동물이 가죽 채취를 위해 도살된다. 가죽을 피혁(皮革)으로 가공하는 무두질에 사용되는 각종 화학 물질로 인한 환경 오염도 심각하다.

영국 패션 브랜드 닥터마틴은 비건 가죽으로 만든 워커를 판매하는데, 지난해 이 상품군 매출이 2017년에 비해 279% 급증했다. 패스트 패션 브랜드 자라와 H&M, 여성복 보브 등도 ‘에코 가죽’이라는 이름으로 인조 가죽 상품 카테고리를 운영한다. 인조 가죽은 동물성 가죽보다 봉제나 재단이 수월해 재킷, 가방외에도 셔츠, 바지, 신발 등 다양한 상품군으로 출시되고 있다. 친환경 패션 상품을 만드는 스텔라 매카트니를 비롯해 프라다, 루이뷔통 등 명품도 인조 가죽으로 고급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하지만 인조 가죽은 불편한 진실을 품고 있다. 인조 가죽으로 사용되는 폴리우레탄(PU)과 폴리염화비닐(PVC)의 원료는 플라스틱이다. 완전분해까지 수백 년이 걸리는 영원불변의 소재. 이 때문에 환경론자들은 ‘에코’라는 이름으로 빠르게 번지는 인조 가죽 패션의 유행을 우려한다. 일각에선 동물성 가죽을 쓰되, 도축 및 가공 방법을 개선하는 방식으로 지속 가능한 패션 트렌드에 동참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식물성 타닌으로 가죽을 무두질한 베지터블(vegetable·채소) 가죽이 대표적이다. 영국 가죽 제품 브랜드 멀버리는 최근 출시한 알렉사 핸드백을 친환경 무두질로 만든 피혁을 사용해 탄소 중립 공장에서 제작했다.


비건 패션을 표방하는 헝가리 패션 브랜드 나누슈카. 사진 나누슈카
비건 패션을 표방하는 헝가리 패션 브랜드 나누슈카. 사진 나누슈카

파인애플·선인장으로 만든 대안 가죽

최근에는 식물성 원료로 만든 가죽이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파인애플 잎, 포도 껍질, 사과 껍질, 선인장, 망고, 버섯 등 재료도 무궁무진하다. 파인애플 부산물로 만든 피냐텍스(pinatex)는 파인애플 잎에서 섬유질을 추출해 고무 성분을 제거한 뒤 숙성시키는 방식으로 제작한다. 섬유질을 모아 펠트(felt·양모 등을 압축해 원단으로 만드는 것)처럼 찍어내고 무두질하면 동물 가죽과 비슷하게 단단해지는데, 기존 가죽보다 가볍고 부드러우며 통기성이 뛰어나다고 한다. H&M, 푸마, 휴고 보스 등 패션 브랜드를 비롯해 테슬라의 자동차 시트로도 사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앤아더스토리즈가 와인 제작 후 남은 포토 껍질과 줄기·씨로 만든 가죽 비제아(vegea)로 만든 샌들을, 타미힐피거가 사과 껍질 가죽으로 만든 ‘애플스킨 스니커즈’를 출시했다. 비건 패션 브랜드 낫아워스는 멕시코에서 개발한 선인장 가죽 데세르토(desserto)로 카드 홀더를 선보였다. 지난 8월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텀블벅에 소개된 이 제품은 목표액의 427%를 초과 달성했다. 데세르토는 루이뷔통모엣헤네시(LVMH)가 주최한 ‘2020 이노베이션 어워드’의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국내 원단 회사 한원물산이 선보인 한지 가죽 ‘하운지’도 대안 가죽으로 주목받는다. 닥나무 인피를 사용해 만든 한지와 자연 섬유인 면을 접목해 개발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의 여성복 스튜디오 톰보이와 이 회사의 온라인 편집숍 ‘셀렉트449’가 하운지로 만든 재킷과 셔츠, 바지 등을 출시했다. 한지 가죽은 이미 고려 시대에도 쓰인 바 있다. 송나라의 손목이 쓴 기행문 ‘계림유사(鷄林類事)’에는 고려인이 닥종이를 여러 겹 붙인 의혁지(擬革紙)를 가죽 대신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옻칠이나 콩땜을 해 단단해진 의혁지는 갑옷이나 화약통을 만드는 데 사용됐다고 한다.

채식 인구 증가와 친환경 소비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비건 가죽 시장의 성장도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컨설팅 업체 그랜드 뷰 리서치에 따르면 세계 비건 시장 규모는 2018년 이후 연평균 9.6%씩 성장해 2025년에는 약 29조717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업체는 인조 가죽 시장도 매년 4.4%씩 성장해 2027년에는 45조5421억원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스텔라 매카트니의 2020 가을·겨울 패션쇼에 등장한 비건 가죽 의류. 사진 스텔라 매카트니
스텔라 매카트니의 2020 가을·겨울 패션쇼에 등장한 비건 가죽 의류. 사진 스텔라 매카트니
사과 껍질 가죽으로 제작한 스니커즈. 사진 타미힐피거
사과 껍질 가죽으로 제작한 스니커즈. 사진 타미힐피거

김은영 조선비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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