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상 미래에셋자산운용 홍콩법인 아시아태평양 리서치본부장 ‘아시아 투자의 미래’ 저자
이필상
미래에셋자산운용 홍콩법인 아시아태평양 리서치본부장 ‘아시아 투자의 미래’ 저자

반도체 산업이 호황기에 접어들며 요즘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글로벌 기업이 하나 있다. 바로 전 세계 파운드리(반도체칩 위탁 제조) 부문에서 시장 점유율 60%에 육박하는 대만 TSMC다. 일등 기업이라고 하더라도, 글로벌 점유율이 이 정도인 사례를 찾긴 어렵다. 애플의 글로벌 스마트폰 부문 점유율은 20%를 밑돌고, 글로벌 1위 회사인 폴크스바겐 점유율도 10% 수준에 불과하다.

TSMC의 실제 위상은 어느 정도일까? 이 회사는 클라우드와 인공지능(AI) 자율주행, 5G(5세대 이동통신) 등 고성장하는 시장에서 기업들이 요구하는 고성능 반도체칩을 위탁 생산해줄 수 있는 극소수 기업 중 하나다. 어떤 면에선 TSMC가 3㎚(나노미터), 2㎚ 미세공정을 얼마나 빨리 숙달하느냐에 따라 4차 산업혁명의 속도가 결정된다고 할 정도다. 회사를 둘러싼 사업 환경이 어땠기에 이 회사는 이렇게 높은 점유율로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을 장악하게 된 걸까. TSMC의 부각을 계기로 대만의 사업 환경과 배경을 살펴보자.

대만 산업계의 특징을 하나로 정의하자면, 정보기술(IT) 위탁 제조 부문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췄다는 점이다. 그런데 위탁 제조에 강하다는 건 바꿔 말하면 브랜드에 약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누군들 브랜드를 갖고 싶지 않겠는가. 실제로 그동안 대만 산업계도 글로벌 브랜드를 키우려고 많이 노력했다. 한때 노트북 시장에서는 아수스라는 브랜드가 인기였고, 스마트폰 시장 초기에는 HTC라는 브랜드가 주목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글로벌 브랜드로 정착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들은 자신보다 한참 후발 주자인 중국의 레노버, 화웨이, 샤오미 등이 IT 하드웨어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는 것을 씁쓸하게 바라봐야 했다.

이는 내수 시장이 작은 대만의 한계에서 비롯됐다. 대만 인구는 2400만 명에 불과하다. 통상 어떤 기업이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는 과정은 내수 시장에서 충분한 안전 마진을 확보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기업은 해외로 진출한다. 대만은 내수 기반이 협소하니 브랜드 기업들이 비빌 언덕이 없다.

그런데 내수 시장이 작은 것은 노동력도 부족하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위탁 제조업 역시 잘될 리 없지 않은가?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만 기업들은 이 부분을 중국 진출을 통해 해결했다. 돌이켜보면 대만 산업계는 개혁 개방 이후 무한대에 가까울 정도로 공급된 중국의 저임 노동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한 집단이었다. 언어와 문화가 동일하기 때문에 중국 노동자에 대한 노무 관리가 수월하다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반면, 미국이나 유럽 기업, 일본 기업은 중국의 노동력을 십분 활용하고 싶어도 노동자와 공장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이 공백을 일부 야망 있는 대만 기업가들이 꿰찬 것이다. 대표적인 기업이 홍하이정밀이다. 애플의 아이폰을 위탁 제조해주는 것으로 유명한 이 회사는 한때 중국 대륙 곳곳에서 100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했을 정도로 초대형 제조 기업이 됐다.


대만 파운드리 업체 TSMC 본사. 전 세계 반도체 파운드리 시장에서 TSMC의 점유율은 60%에 달한다. 사진 블룸버그
대만 파운드리 업체 TSMC 본사. 전 세계 반도체 파운드리 시장에서 TSMC의 점유율은 60%에 달한다. 사진 블룸버그

대만 위협하는 中 기업 부상

하지만 대만 기업들의 독주는 오래가지 않았다. 2010년대 들어 중국 토종 기업들이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노무 관리나 제품 불량률 측면에서 대만 기업들 못지않은 능력을 보여줬고 지금은 글로벌 브랜드 회사와 직접 거래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회사가 애플의 블루투스 이어폰 ‘에어팟’을 위탁 생산하는 럭스셰어(Luxshare·立訊精密)다. 이 회사는 머지않은 시일에 애플로부터 아이폰 물량도 수주받을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대만 기업들이 주도했던 액정표시장치(LCD) 디스플레이나 유기발광다이오드(LED) 칩 제조 영역도 어느새 중국 기업들로 주도권이 넘어갔다. 한때 대만은 태양광 패널 제조에도 야심을 품어봤으나 산업 초기 형성 과정에서 중국 기업에 속절없이 밀렸다.

돌이켜보면 대만 산업계가 중국을 활용했던 건 ‘양날의 칼’이었다. 당시 대만은 개방 이후 중국의 강점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중국이라는 블랙홀에 너무 가까이 있었다. 많은 우수 인력은 대만을 떠나 중국에서 직접 사업을 하거나, 표준 중국어를 구사하는 전문 인력을 구하고자 하는 중국 기업들에 스카우트됐다.

중국은 지금 반도체 전 영역에서 자국 기업을 육성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피력하고 있다. 이는 자체 인력 육성뿐만 아니라 숙련된 엔지니어들을 대만 혹은 주변 아시아 국가로부터 쉽게 구할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대만의 IT 제조 산업 전반에 상시적인 위기감이 감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中 공급망과 적당 거리 유지한 TSMC

그럼에도 대만의 칩 파운드리 산업은 TSMC를 중심으로 버티고 있다. 어떤 배경이 있는 것일까. 필자가 볼 때 TSMC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IT 제조 서플라이 체인(공급망)과 함께 성장했지만, 중국이라는 블랙홀로부터 적당히 먼 거리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파운드리가 다른 IT 위탁 제조 부문과 다른 점은 중국의 저렴한 노동력을 활용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칩 파운드리는 고가 장비와 숙련된 엔지니어의 노하우를 조합하는 것이 핵심이다. 여기는 불량률을 조금이라도 낮추기 위해 24시간 내내 싸우는 전쟁터와 같다. 특히 미세 공정이 심화하면서 공정 수는 더욱 늘어났다. 로직 칩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80번 이상의 개별 공정(포토마스크 공정)을 거쳐야 하며 공정마다 보통 하루가 걸린다. 3개월 정도 걸리는 공정 중에서 만약 한 번이라도 실수가 있으면 그 반도체 칩은 못 쓰게 된다. 공정 하나하나에서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는 숙련된 엔지니어 집단과 ‘손기술’이 필요하다. 이런 면에서 손기술과는 거리가 먼 미국 기업들이 파운드리 산업을 부흥시킬 수 있을지, 의문을 표하는 전문가가 많다.

한편 인력 수는 어떨까? 대만 전체 인구가 적긴 하지만, 반도체 공정 엔지니어는 풍부하다. 이 분야는 그동안 대만의 최고 인재들을 흡수해왔기 때문이다. 대만 엔지니어들에게 대만 기업들이 어떻게 해서 파운드리를 잘하게 됐냐고 물어보면, 농담처럼 “반도체 엔지니어 말고는 연봉을 많이 주는 데가 없어서”라는 답을 준다. 대만은 글로벌 브랜드가 없고 아마존 같은 인터넷 기업도 없으니 고액 연봉 일자리가 그쪽에서 배출되지 않는다. 대신 TSMC 혹은 미디어텍(MediaTek) 같은 반도체 회사가 최고의 일자리다. 대만 대학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학과도 반도체 관련 학과다.


화웨이 사태 이후 달라진 미디어텍 위상

대만의 풍부한 반도체 엔지니어를 활용하는 대만 기업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다. 칩 설계(팹리스) 부문의 경우 미디어텍, 노바텍, 리얼텍 등이 있다. 이 중에서 대표 기업은 미디어텍이다. 이 회사는 2000년대 초만 하더라도 TV에 들어가는 드라이버(driver) IC 같은 비교적 간단한 칩을 설계하는 기업에 불과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에는 피처폰용 칩셋, 2010년대에는 스마트폰 신흥 브랜드인 오포, 비보, 샤오미 등에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칩을 납품하면서 큰 폭으로 성장하는 기회를 잡았다. 2021년에는 순이익이 2조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될 정도로까지 성장했다.

미디어텍은 한때 화웨이의 칩 설계 부문인 하이실리콘에 밀리는 듯했다. 사실 칩 설계 부문은 이미 중국이 대만을 능가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에는 칭화대나 베이징대 출신의 천재 엔지니어들이 주축이 돼 창업한 반도체 스타트업이 넘쳐난다.

그런데 트럼프 정부의 화웨이 고사 작전 이후 스마트폰 칩 부문에서 경쟁 환경이 달라졌다. 화웨이는 최고 수준의 칩 설계를 해도 이를 생산해줄 기업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앞으로 화웨이그룹은 스마트폰보다는 클라우드, 자율주행 시스템 등 중국이 필요로 하되 중국 내수 수요가 충분한 산업 분야에 집중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스마트폰용 칩 시장에 큰 공백이 발생했다. 중국 스마트폰 브랜드 입장에서는 미국 기업 퀄컴의 칩을 과도하게 쓸 수 없는 상황이다. 현재로서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 미디어텍이 제공하는 칩셋이다.

참고로 미디어텍이 여기까지 성장한 배경 중 하나는, ‘같은 동네(신죽과학단지)’에 있는 TSMC와 오랜 협업 덕분이다. 칩 제조 공정이 매우 까다로워지고 각종 IP(지식재산권)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보니 칩 설계 회로도가 생산 현장에서 원활히 구현되기 위해서는 설계 초기부터 칩 설계사와 파운드리사 간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미디어텍은 최고의 입지 조건을 가진 셈이다. 대만의 다른 팹리스 회사들, 노바텍, 리얼텍 역시 신죽과학단지에 본사를 두고 있다.


엔지니어 노하우로 서버 제조업도 강점

대만의 풍부한 IT 엔지니어층을 잘 활용하는 위탁 제조 분야가 또 있다. 바로 서버 제조업(ODM)이다. 퀀타컴퓨터가 이 분야 대표적인 기업이다. 서버 ODM은 홍하이정밀과 같은 기업이 주력하는 위탁 제조(EMS)와 비슷하면서 또 많이 다르다. 비슷한 점은 양쪽 모두 조립 과정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이지만, 서버 위탁 제조업이 남다른 것은 마더보드를 직접 설계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서버 제조는 중앙처리장치(CPU), 그래픽처리장치(GPU), 프로그래머블반도체(FPGA), 디램(DRAM), 낸드(NAND) 등의 이종 반도체를 어떻게 설계 배치하느냐에 따라 성능에 큰 차이가 난다. 이 부문 역시 오랜 노하우를 가진 엔지니어층이 중요하다. 최근 빅데이터, 클라우드, AI 시대를 맞아 맞춤형 혹은 하이퍼스케일 서버에 대한 수요가 매우 증가하고 있으니 사이클상으로도 좋은 시기를 맞고 있다.

우리는 TSMC 이야기로 시작했다. 하지만 대만에는 TSMC 말고도 다양한 IT 제조 기업이 있다. 파운드리 1위 기업 TSMC, 아시아 팹리스(칩 설계) 1위 기업 미디어텍, IT 하드웨어 위탁 제조 1위 기업 홍하이정밀, 서버 위탁 제조 기업 1위 퀀타컴퓨터 등. 대만은 하드웨어 브랜드를 육성하는 데에는 실패했으며 많은 제조 영역에서는 중국에 이미 주도권을 넘겨줬다. 하지만 IT 엔지니어 인력이 여전히 풍부하고 다양한 제조 기반을 갖춘 생태계를 유지한 덕분에 글로벌 일등 기업들을 꾸준히 배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