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사법시험 34회, 사법연수원 24기, 변호사, 전 경희대 법대 학장, 전 경희대 로스쿨 원장
정형근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사법시험 34회, 사법연수원 24기, 변호사, 전 경희대 법대 학장, 전 경희대 로스쿨 원장

유길준이 1895년 저술한 ‘서유견문’에 표현된 변호사는 인정과 세상 물정에 익숙하고 사리 분간이 분명한 직업으로, 타인의 소송을 대변하는 것으로 생계를 꾸려간다.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사태가 발생하기 전 변호사들은 먹고살아갈 걱정이 없으니 건강만 챙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전국을 통틀어 변호사가 수천 명에 불과했기에 희소성의 가치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사법시험 합격자가 계속 증원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1981년 300명이던 사시 합격자는 1996년 500명, IMF 위기가 발생한 1997년 600명, 그다음 해에는 700명으로 늘었다. 변호사 자격증이 안정된 삶을 보장하던 시절은 점점 추억으로 변해갔다.

그런 와중에 대형 사건이 발생했다. 1998년 서울지방법원 의정부지원 법관들이 관할지역에 개업 중인 변호사들로부터 돈을 받아온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사법 사상 최초로 법관이 징계에 회부되고, 의정부지원 판사 전원이 교체됐다. 대전에서도 전관예우와 사건 브로커를 통해 사건을 싹쓸이한 일이 터졌다.

이런 상황에서 2000년 법조 비리를 예방하고자 변호사 광고를 허용했다. 국민에게 변호사 정보를 제공해 사건 브로커가 활동할 수 없도록 할 목적이었다. 1905년 변호사 제도가 도입된 대한제국 당시부터 변호사 광고가 있었다는 자료도 있다. 광고는 변호사의 학력, 경력, 주요 취급 업무, 업무 실적 등을 알리는 것이다. 변호사 배지를 착용하고, 명함을 건네는 것도 광고다.

변호사는 신문, 잡지, 방송, 컴퓨터 통신 등에 광고할 수 있다. 변호사 개업 인사, 구성원 영입 광고는 여전히 종이(신문·잡지)를 이용한다. 오늘날 광고는 인터넷으로 옮겨 갔다. 법률(legal)과 기술(technology)이 결합한 ‘리걸 테크(Legal Tech)’를 활용한 형태도 등장했다. 변호사법은 ‘… 등의 매체를 이용해 광고할 수 있다’라고 규정함으로써 기술 발달에 따른 전자 매체 등의 광고를 포함시켰다. 장차 기술 문명의 변화로 광고 수단과 방법이 다양해질 것을 꿰뚫어 본 입법이다.


리걸 테크가 시대적 흐름이라는 주장과 변호사 생계를 위협한다는 주장이 첨예하게 맞선다.
리걸 테크가 시대적 흐름이라는 주장과 변호사 생계를 위협한다는 주장이 첨예하게 맞선다.

최근 대한변호사협회는 변호사의 광고를 제한하는 강력한 조처를 했다. 변호사가 광고하는 이유는 축재가 아닌 생존 본능 때문이다. 대한변호사협회가 광고의 자유를 규제한다고 해서 그게 현실에서 강제적 규범력을 가질지는 의문이다. 과거 미국의 금주법 시대의 위반 사례를 보거나 한국의 주민등록법상 금지된 위장 전입의 일상화 사례를 보라. 법이 현실에 부합하지 않으면 규범력을 상실하고, 끝내 사문화된다는 걸 말해준다. 법은 제정됐다고 해서 무조건 강제력을 갖는 건 아니다.

법에서 변호사 광고를 허용하지 않던 1980년에도 변호사가 광고하다가 적발된 사례가 있다. 안양 시내 곳곳의 가로수, 버스 정류장, 병원 대기실 등에 ‘알림. 변호사 ○○○ 법률사무소 안양중앙의원 옆. 전화 2-xxxx’라고 적힌 간판 60여 개를 부착한 행위였는데, 당시 대법원은 이에 대한 징계 처분이 적법하다고 했다(대법원 1980. 9. 15 자 80두4 결정).

이 판결이 나온 1980년 변호사 수는 2230명에 불과했다. 이후 10년 동안 증가한 변호사 수도 475명에 불과했다. 이런 호시절에도 변호사가 광고를 했다. 2021년 현재 전국에는 약 3만 명의 변호사가 있다. 해마다 1700여 명의 변호사가 쏟아져 나온다. 갈수록 생존 경쟁이 치열해진다는 의미다. 변호사 광고의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