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4일 찾은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전경. 사진 고성민 조선비즈 기자
5월 24일 찾은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전경. 사진 고성민 조선비즈 기자

“김현옥 서울시장의 제안에 겁도 없이 뛰어든 ‘김수근 일생일대의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70년대 후반기부터 맹렬히 퍼부어진 이 비난의 소리가 김수근에게 전달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김수근도 그 생전에 이 프로젝트를 한 것을 대단히 후회했을 것이다. 그의 작품 연보에는 세운상가 설계에 관한 것이 깨끗이 지워져 있다.”

1970년대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역임한 고(故)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월간 ‘국토’ 1997년 6월호에 이같이 적었다. ‘세계 제일’로 불릴 정도의 초대형 건축 프로젝트이자, 현대 건축의 거장 김수근(1931∼86)이 설계한 세운상가(1967년 준공)를 향한 날 선 비판이었다. 그의 말대로 세운상가엔 김수근의 꿈과 현실에서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아쉬움이 배어 있다.


슬럼화된 전쟁의 상흔…박정희-김현옥-김수근의 개발 무대로

세운상가의 역사를 보려면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부지는 당시 너비 50m, 길이 1㎞의 소개공지대였다. 소개공지대는 전쟁 중 발생한 화재가 주변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비워 놓는 공간을 말한다. 광복 이후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이 공터는 점차 판자촌으로 슬럼화됐다. 종로3가와 가까운 이곳은 ‘종삼(鐘三)’으로 불리며 사창가의 대명사가 될 정도였다.

도시의 치부를 정리하겠다는 계획은 서울중구청 이을삼 계장의 행정연구서에서 시작했다. 세운상가 프로젝트와 비교하면 규모가 절반 정도였다. 이 보고서를 받은 ‘불도저’ 김현옥 서울시장은 즉시 현장을 답사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이때 박 전 대통령이 큰 관심을 가지며 사업이 확 커졌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이 남긴 상흔과 같은 땅에 국내 최대 건축 프로젝트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손 명예교수는 월간 ‘국토’ 1997년 5월호에 이렇게 적었다.

“(1966년 7월 26일)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김 시장이 기대했던 것 이상의 강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좀 더 깊이 연구해서 소신껏 잘 처리하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스스로 헬리콥터를 타고 서울 상공을 자주 시찰하고 다녔으니 이 지대의 실정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에 보였던 대통령의 깊은 관심이 김현옥 시장을 미치게 한다. 그때부터 이 사업은 구청 소관에서 시 본청 소관 업무로 바뀌게 되었고 (중략) 이 지구에 상가 건물을 짓는 일을 전담하는 기구가 (서울시에) 생겼다.”


1968년 촬영한 세운상가 일대.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1968년 촬영한 세운상가 일대.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획기적인 공중보행 설계…현실의 벽에 부딪히다

김현옥 시장이 찾은 사람은 당시(1966년) 만 35세인 김수근 건축가였다. 김수근은 도쿄대학교 대학원 재학 중인 28세 때 남산 국회의사당 건축 설계 공모에 1등으로 당선되며 단숨에 스타로 떠올랐고, 30세 때 김수근 건축연구소를 세우고 홍익대학교 건축미술과에 전임강사로 취임하는 등 이미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김수근은 이 건물에 건축 이상을 적극 반영했다. 핵심은 차도와 보행로를 완전히 분리하는 것이었다. 지상은 차도와 주차장으로만 구성하고, 2~4층을 상가로 구성한 뒤 건물 8개 동의 3층 레벨이 모두 보행로로 연결되게끔 설계했다. 종로3가에서 남산 입구까지 이어지는 총 1㎞ 길이의 초대형 보행 쇼핑몰을 계획한 것이다. 또 상가의 옥상이자 주거 부분이 시작하는 지상 5층에는 인공대지를 만들고자 했다. 모더니즘 건축의 아버지인 프랑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영향을 받은 입체도시 설계였다.

그러나 이런 이상은 현실에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다. 핵심인 지상 3층 공중보행로는 8개 동이 모두 이어지지 못하고 중간에 단절됐다. 현대·대림·풍전·신풍·삼원·삼풍 등 6개 기업과 아세아상가번영회, 청계상가주식회사까지 총 8개 사업체가 8개 건물을 각각 시공, 분양하며 8개 건물 3층을 모두 잇는다는 계획이 실패로 끝났다. 1층도 자동차 전용 공간으로 조성되지 않고 상가가 들어섰으며, 인공대지와 아트리움 계획도 변경됐다.

손 명예교수는 월간 ‘국토’ 1997년 6월호에서 △서울의 시가지는 동서 방향으로 흐르는데 세운상가는 남북 방향으로 길쭉하게 지어져 도시의 선(線)을 차단하며 △남북방향의 보행자와 차량이 많지 않아 보·차도분리 발상이 처음부터 잘못됐고 △3층에 보행로가 만들어져, 보행자가 계단을 오르내려야만 한다고 지적했다.


세운상가 6층. 주택 부분이 시작하는 5층(사진 아래층)에 중정이 마련됐다. 사진 고성민 조선비즈 기자
세운상가 6층. 주택 부분이 시작하는 5층(사진 아래층)에 중정이 마련됐다. 사진 고성민 조선비즈 기자

선망의 대상에서 점차 애물단지로… ‘힙지로’ 유행으로 부활

김수근의 건축 이상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미완의 공간이었지만, 세운상가는 압도적인 크기로 준공 직후 서울의 명물이 됐다. 1967~72년 순차로 8~17층 7개 동이 준공됐고, 1981년 마지막 1개 동(풍전호텔)이 지어졌다. 총 2000여 개 점포와 851가구, 177개의 호텔 객실이 세워졌다. 1967년 준공식에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직접 참석해 준공 테이프를 끊었으며,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는 뜻을 담아 세운(世運)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최대 규모, 최고급, 최신식 아파트로 선망의 대상이자 유행의 중심이었다.

1967년 4월 17일 자 조선일보는 “방 안에 앉아 구내전화를 들면 상가 내 어느 곳에서나 필요한 물품을 구입할 수 있다”며 전세 세입자를 모집하는 세운상가 라동 삼원아파트는 50평이 전세금 650만원이라고 적었다. “서민들은 엄두도 못 낼 형편”이라고 했다. 이듬해 분양한 고급 아파트 대명사 이촌 한강맨션 51평의 분양가가 646만원이었고, 저소득 영세민을 대상으로 공급한 시민아파트의 분양가는 30만원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신축 효과가 꺼지며 세운상가는 점차 도시의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명동에 제일백화점, 코스모스백화점 등이 잇달아 개관하며 상권의 중심은 명동으로 옮겨갔고, 강남 개발이 이뤄지며 부동산의 중심도 강남으로 축을 옮겼다.

애물단지였던 세운상가는 2014년 진행된 ‘다시 세운’ 도시 재생과 힙지로(힙+을지로) 유행을 타고 최근엔 젊은층이 찾는 명소로 부활했다. 5월 24일 찾은 세운상가에는 오후 3시에도 야외 테이블에서 삼겹살과 소주, 커피 등을 먹고 마시는 2030 젊은층이 많이 보였다. 다만 주택 부분은 신축 아파트 대비 건물 노후화와 열악한 학군, 커뮤니티 시설 부재 등으로 열세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에 따르면 진양상가아파트 전용 71㎡는 지난 5월 4억8000만원, 대림상가아파트 전용 83㎡는 지난해 6월 4억6600만원에 거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