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김수근이 입안한 초기 여의도 도시계획도.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1968년 김수근이 입안한 초기 여의도 도시계획도.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10~15층 중층에 성냥갑 모양의 판상형, 대단지 아파트. ‘아파트’라는 단어를 머릿속으로 떠올릴 때 가장 흔하게 생각나는 장면이다. 시초는 1971년 준공된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시범아파트(여의시범)다. 아파트 명칭도 모범을 보인다는 뜻의 시범(示範). 여의시범은 당시 최고층인 13층으로 지어져 국내 아파트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됐다. 여의시범이 채택한 판상형·복도식·중앙난방·조경, 지하 공동구 등은 ‘한국산 아파트’의 공식으로 이후 수십 년간 이어진다.


1968년 5월 31일 촬영된 여의도 윤중제 공사 현장. ‘한강건설 제1단계 작업 준공식’ 입간판과 ‘노력의 거듭 속에 기적은 있다’ ‘서울은 싸우면서 건설한다’는 표어가 눈에 띈다.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1968년 5월 31일 촬영된 여의도 윤중제 공사 현장. ‘한강건설 제1단계 작업 준공식’ 입간판과 ‘노력의 거듭 속에 기적은 있다’ ‘서울은 싸우면서 건설한다’는 표어가 눈에 띈다.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여의시범 부지, 대법원·서울시청 들어설 땅이었다

여의시범은 여의도 아파트 중 가장 먼저 지어졌다. 초고층 건물로 빼곡한 현재 여의도의 모습을 보면 옛 모습을 짐작하기 어려운데, 여의도는 과거 모래땅이었다. 조선 시대 목축장, 일제강점기 이후 비행장으로 쓰였다. 이 모래땅을 택지지구로 개발하려는 계획이 1967년 시작됐다. 서울의 주택난을 해결하는 동시에 ‘후세에 길이 남을 예술적 도시’를 설계한다는 목표였다.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세운상가에서 협업한 고(故) 김수근 건축가에게 여의도 설계를 맡겼다. 종로 도심의 기능을 여의도로 완전히 옮겨 ‘제2 서울’을 건설한다는 구상이 이때 세워졌다. 여의도의 서쪽 끝에 국회의사당과 외국 공관 지구, 동쪽 끝에 대법원, 서울시청, 종합병원 용지를 계획했다.

그러나 대법원, 서울시청 부지에는 결과적으로 여의도 시범아파트가 지어지게 된다. 대법원과 서울시청을 유치한다는 김현옥·김수근의 설계는 왜 무산되고 아파트가 들어섰을까. 1970년대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역임한 고(故)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월간 ‘국토’에서 ‘여의도 입주 신청 1호’로 국회사무처가 10만 평을 신청하자 김현옥 서울시장이 안이하게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애초 법원행정처와 협의나 국무회의 의결, 외국 대사관과 협의를 거치지 않은 자신만의 이상이었다는 것이다. 또 여의도 둘레를 따라 윤중제(제방)를 설치하는 공사로 30억원을 쓰며 서울시 재정난이 극심해져 여의도 택지의 민간 매각이 다급해진 사정도 있었다. 서울시가 시범 삼아 여의도에서 아파트 사업을 성공시킨 뒤, 나머지 택지 매각을 촉진해야 할 필요성이 커진 것이었다. 김현옥 서울시장이 ‘와우아파트 붕괴’로 물러나고 양택식 시장으로 수장이 교체된 영향도 컸다고 한다.

여의시범은 지상 최고 13층, 총 24개 동, 1584가구로 지어졌다. 판상형, 복도식 구조다. 우리나라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아파트다. 중앙난방을 도입했고 최초로 지하 공동구를 만들었다. 냉온수, 난방, 전기, 전화선 등 도시기반시설을 지하에 공동으로 마련한 것이다. 준공식에 박정희 대통령과 양택식 서울시장이 참석할 정도로 정권의 관심도 컸다.

1970년 분양 광고에서 서울시는 이 아파트를 ‘갖는 자랑, 사는 즐거움, 꿈이 있는 마이홈’이라는 문구로 홍보했다. 전용면적 60㎡는 212만원, 79㎡는 278만원, 118㎡는 422만원, 156㎡는 571만원에 분양했다. 현재의 9급 공무원에 해당하는 당시 5급 공무원의 1972년 기준 1호봉 월급은 1만7300원이었다. 호봉 상승 없이 단순 계산해보면 전용 60㎡를 분양받으려면 약 10년, 전용 156㎡는 약 28년이 필요했다.

선착순 모집으로 시작한 분양에서 첫날 오후 4시까지 약 60% 물량이 소진됐다고 1970년 9월 2일 조선일보는 보도했다. 아파트가 대중적이지 않았던 당시 기준으로는 준수한 성적표였다. 입주(1971년 10월) 직후인 1971년 12월엔 156㎡ 기준 40만~50만원의 프리미엄이 붙었다. 분양 4년여 뒤인 1974년 말에는 시세가 1000만~1250만원에 달해 분양가의 두 배까지 집값이 올랐다. 분양 광고대로 금세 ‘갖는 자랑’이 된 것이다. 이후 1977년 여의도에 분양한 목화아파트(44 대 1), 진주아파트(30 대 1) 등의 분양 경쟁률이 치솟는 계기가 됐다.

당시 서울 시민은 고층 아파트가 너무나 익숙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생소한 입주자를 위해 이른바 ‘엘리베이터 걸’ 98명이 여의시범에 고용됐다.

로열층의 기준도 지금과는 달랐다. 1971년 9월 30일 조선일보는 “시 당국의 앙케이트(앙케트) 조사 결과 입주자들은 4, 5층을 제일 좋아하고 다음이 3, 6, 7층이며, 10층 이상은 별로 원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고층 생활에 익숙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1977년 9월 6일 촬영된 여의도 시범아파트.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1977년 9월 6일 촬영된 여의도 시범아파트.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지난 7월 찾은 여의도 시범아파트. 사진 고성민 기자
지난 7월 찾은 여의도 시범아파트. 사진 고성민 기자

노후화 리스크 부각 안전백서 만든 주민들

여의시범 주민들은 2008년부터 재건축을 추진했다. 2017년 안전진단 D등급 판정을 받고 한국자산신탁을 사업 시행자로 지정했다. 그러나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부동산 시장 불안정’을 이유로 2018년 지구단위계획 수립 절차를 보류해 몇 년간 여의시범 재건축 사업이 완전히 멈췄다. 박 전 시장은 지구단위계획을 통한 ‘여의도 통개발’이 필요한데, 여의도 지구단위계획이 집값 상승을 부추기기 때문에 지구단위계획 수립을 보류한다는 주장을 폈다.

여의시범 주민들은 2020년 3월 서울시의회에 ‘여의도 아파트 지구 지구단위계획 조속한 수립’ 청원을 제기했다. 재건축이 기약 없이 지연되며 안전상 문제가 심화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2021년 1월에는 ‘붕괴 위험에서 고통받는 여의도 시범아파트 6000여 명 시민 일동’의 이름으로 자발적으로 ‘안전사고백서’를 펴냈다. 2017~2020년 4년간의 각종 안전사고 발생 현황과 주민 요청 상황을 적어 언론과 정치인 등에게 배포했다. 안전사고백서에 따르면, 여의시범은 노후화에 따라 2020년 1~11월 총 9000여 건의 유지 보수 신청이 관리사무소에 접수됐다.

이제형 여의시범 재건축정비위원장은 “아파트 지하에 6600V(볼트) 전기가 흐르는 낡은 지구변전실이 위치해 안전사고 위험성이 크고, 철근이 부식되며 시멘트를 바깥으로 밀어내는 탈루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면서 “언제 사고가 날지 우려하며 고통 속에 재건축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는 “집값 안정 필요성에 대해선 공감하지만, 여의시범 재건축을 막은 기간에 과연 집값이 안정됐느냐”면서 “아직까지 집값 안정 타령만 하는 것은 시민의 생명과 안전사고 위험을 외면하는 몹쓸 정책”이라고 했다.

고성민 조선비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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