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영 JYP엔터테인먼트 대표 프로듀서. 사진 JYP엔터테인먼트
박진영 JYP엔터테인먼트 대표 프로듀서. 사진 JYP엔터테인먼트

국내 주요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이 해외에서 아티스트 발굴·교육·데뷔·활동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 K팝 육성 시스템을 적용하고 있다. 해외 시장 공략을 위해 외국인 멤버를 국내 아이돌그룹에 영입하던 과거에서 나아가, 현지 아티스트에 K팝의 성공 노하우를 바탕으로 한 체계적인 트레이닝과 프로듀싱 등을 더한 ‘한류(韓流) 현지화’다. 국내 엔터테인먼트 업체 매출 구조 다변화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외국 자본과 손잡고 이 같은 시스템을 통해 해외에서 아이돌그룹을 키우는 전략은 ‘한류 3단계’로 통한다. 칼 군무, 완성형 아이돌로 대표되는 K팝 육성 시스템은 연습생을 발굴해 노래는 물론 콘셉트, 생활까지 철저하게 트레이닝하고 이들의 활동 전반을 기획·관리한다. 한류 1단계 국내 아티스트의 해외 진출, 2단계 외국인 멤버의 국내 그룹 영입에 이은 새로운 변화다.

올 상반기 일본 음악 시장에서 가장 큰 화제를 모았던 걸그룹 ‘니쥬(NiziU)’가 대표적인 한류 3단계 사례다. 지난해 데뷔한 니쥬는 걸그룹으로는 사상 최초로 일본 오리콘 차트에서 1억 스트리밍 기록을 두 번 달성했다. 정식 데뷔 전인 지난해 6월 발매한 프리 데뷔곡 ‘메이크 유 해피(Make You Happy)’와 지난해 12월에 나온 정식 데뷔 싱글 ‘스텝 앤드 어 스텝(Step and a Step)’이 낸 성적표다. 니쥬 멤버 9명은 전원 일본인이고, 노래도 일본어로 부른다. 그런데 이 니쥬를 키운 건 일본이 아닌 한국 기획사인 JYP엔터테인먼트(JYP엔터)다.

JYP엔터는 니쥬를 만들기 위해 일본 최대 음반사 소니뮤직과 손을 잡고 일본 현지에서 오디션을 열었다. 방송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발탁된 멤버들은 이후 한국에 있는 JYP엔터 본사에서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았다. 원더걸스·트와이스·ITZY(있지) 등 ‘걸그룹 명가’로 꼽히는 JYP엔터의 육성 시스템을 그대로 적용했다. 니쥬가 대성공하면서 두 회사는 ‘니지 프로젝트’ 시즌 2를 열고 니쥬와 같은 방식으로 일본인 보이그룹도 뽑을 계획이다.


JYP엔터테인먼트가 일본에 데뷔시킨 걸그룹 ‘니쥬’. 사진 JYP엔터테인먼트·소니뮤직
JYP엔터테인먼트가 일본에 데뷔시킨 걸그룹 ‘니쥬’. 사진 JYP엔터테인먼트·소니뮤직

특히 니지 프로젝트 심사위원과 니쥬 프로듀싱을 맡은 심사위원 박진영 JYP엔터 대표 프로듀서는 일본에서 ‘이상적인 상사’로 꼽히는 등 찬사를 받고 있다. 니쥬 멤버들이 JYP엔터 본사에서 훈련받는 과정이 일본 지상파 방송을 통해 방영됐는데, 이 방송에서 이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면서도 따끔하게 혼내는 등 박 프로듀서의 지도력이 화제가 됐다.

가수 보아의 일본 진출 등 일찌감치 해외 시장 진출에 공을 들였던 SM엔터테인먼트(SM엔터)도 최근 보이그룹 ‘웨이션브이(WayV)’를 선보였다. 웨이션브이는 SM엔터가 프로듀싱을, 현지 합작 레이블인 ‘레이블 브이’가 매니지먼트를 각각 맡아 중국과 홍콩, 대만 등 중화권 멤버를 주축으로 만든 현지화 그룹이다. JYP엔터의 니쥬처럼 K팝 육성 시스템 자체를 수출해 해외 멤버들만으로 현지에서 활동하게 하는 방식이다.

웨이션브이는 한한령(限韓令·한류 제한령)으로 한국 아이돌들의 중국 활동이 제한받는 상황에서도 현지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이들은 데뷔 앨범 ‘테이크 오프(Take Off)’로 아이튠즈 종합 앨범 차트 기준으로 세계 30개 지역에서 1위에 올랐는데, 이는 중국 남자 아이돌그룹 중 역대 최고 기록이다. SM엔터 역시 웨이션브이의 성공에 힘입어 보이그룹 NCT의 미국 유닛인 ‘NCT 할리우드’를 발굴하는 글로벌 오디션을 열기로 했다. ‘더 보이스’ ‘서바이브’ 등 유명 프로그램을 만든 미국 제작사 MGM과 손을 잡았다. NCT는 SM엔터 소속 초대형 그룹으로 멤버 영입이 자유롭고 유닛의 무한 확장이 가능한 독특한 형태로 운영된다.

방탄소년단(BTS) 소속사 하이브도 미국에서 K팝 보이그룹을 선보일 예정이다. 세계 최대 음반사인 유니버설뮤직그룹(UMG)과 손잡고 미국에서 오디션을 열고 선발된 아티스트들을 현지에서 바로 데뷔시킨다. 하이브는 BTS를 글로벌 아티스트로 만든 경험을 기반으로 미국 시장에 K팝 비즈니스 모델을 본격적으로 이식해 제작, 신인 양성, 마케팅까지 직접 진두지휘할 예정이다.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는 그동안 아이돌그룹의 해외 진출을 고려해 전략적으로 외국인 멤버를 영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우선 한국에서 성공한 이후 미국, 일본 등 해외 시장으로 진출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K팝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한국에서 인지도를 높인 외국인 멤버가 팀을 이탈하는 사례가 빈번해졌다. 아이돌그룹에서 멤버의 탈퇴는 팬심의 이탈로 이어지기에 기업 매출에 타격을 주는 요인으로 꼽힌다.

최근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이 잇달아 발표하고 있는 현지화 프로젝트는 이보다 매출 안전성이 높다는 평이다. 이들 기업은 공통적으로 미국·일본 등 현지 회사들과 합작해 오디션을 열고, 아이돌그룹을 만드는 과정 자체를 상품화해 보여준다. 팬들은 각각 ‘최애(最愛)’ 참가자를 고르고, 오디션 내내 그를 응원하며 탄탄한 팬덤을 형성하게 된다. 이 방식은 이미 국내에서 유효성을 검증한 성공 모델이기도 하다.

일각에서는 한국인과 한국어를 찾아보기 어려운 K팝을 한류로 볼 수 있냐는 논란도 있다. 하지만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은 ‘한류 시스템’을 접목했다는 점에서 분명한 한류라는 입장이다. 박진영 프로듀서는 니쥬를 데뷔시키며 “니쥬는 K팝 걸그룹”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이제 K팝은 일부 마니아들의 하위문화가 아닌 주류 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국제음반산업협회(IFPI)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한국 음악 시장은 K팝 덕에 44.8% 성장했다. 세계 평균 성장률 7.4%의 6배가 넘는 수준이다. 세계 음반 시장 매출이 2013~2019년 연평균 5.7%씩 줄 때도, K팝 음반 시장은 같은 기간 오히려 27.7% 증가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음반 시장인 미국 내 K팝의 성장도 예상된다. 미국 최고의 아티스트 매니저이자 저스틴 비버를 발굴한 스쿠터 브라운(Scooter Braun)이 자신의 기획사 이타카(Ithaca)를 하이브에 넘기고, 이사회의 일원으로서 K팝 산업에 합류한 것이 대표적이다.


Plus Point

‘한류 3단계 진화론’ 만든 이수만 SM엔터 창립자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총괄 프로듀서. 사진 SM엔터테인먼트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총괄 프로듀서. 사진 SM엔터테인먼트

SM엔터테인먼트를 창립한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는 ‘K팝의 아버지’로 통한다. 현재 한류의 선봉이 된 아이돌 형태의 전형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프로듀서는 1990년 후반 엔터테인먼트 업계 최초로 체계적인 육성 시스템 ‘CT(Culture Tech-nology·문화기술)’를 만들었다. CT는 캐스팅, 트레이닝, 프로듀싱, 매니지먼트 등 네 가지 핵심 요소를 통해 신나는 음악과 화려한 칼 군무를 자랑하는 K팝 아티스트들을 배출했다. BTS를 키운 방시혁 하이브 이사회 의장을 비롯해 박진영 JYP엔터테인먼트 대표 프로듀서, 양현석 전 YG엔터테인먼트 대표 등도 이를 벤치마킹했다.

이 프로듀서가 CT에 근거해 제시한 것이 바로 한류의 3단계 진화론이다. 이 프로듀서가 지금까지 배출한 K팝 아티스트 역시 이 진화론과 궤를 같이한다. 한류 1단계는 멤버 모두가 한국인으로 구성된 K팝 가수들이 해외에 진출하는 방식이다. SM엔터가 ‘신비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30억원을 투자해 한국과 일본을 동시 공략하는 가수로 트레이닝한 보아가 대표적이다.

한류 2단계는 해외 교포나 외국인 멤버를 넣은 다국적 팀으로 현지를 공략하는 방식이다. SM엔터 소속 그룹으로는 중국인·미국인 멤버가 포함돼 있는 슈퍼주니어, 에프엑스, 엑소 등이 있다.

K팝은 이제 한류 3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오로지 해외 멤버들로만 이루어진 K팝 그룹을 현지에서 만드는 것이다. 이 프로듀서는 올해 초 한 방송에 나와 “한국이 전 세계의 문화를 이끌어가는 프로듀서 리더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