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손모빌이 호주에서 운영하던 정유 시설을 연료 수입 터미널로 바꾸기로 했다. 석유 수요가 줄어들면서 수익성이 없어졌다는 판단에서다. 사진 블룸버그
엑손모빌이 호주에서 운영하던 정유 시설을 연료 수입 터미널로 바꾸기로 했다. 석유 수요가 줄어들면서 수익성이 없어졌다는 판단에서다. 사진 블룸버그

미국의 석유 대기업 엑손모빌은 5월 26일 화석연료 사용을 반대하는 행동주의 펀드 엔진넘버원과 대결에서 완패했다. 주주총회에서 엑손모빌 지분 0.02%를 보유한 엔진넘버원이 지명한 이사 후보 2명이 이사로 선출된 것. 엑손모빌 경영진은 석유와 플라스틱 수요가 강세를 보일 것이라며 기존 전략을 내세웠지만, 주주들은 엔진넘버원의 손을 들어줬다. 엑손모빌은 6월 2일 엔진넘버원 측 이사를 추가로 선임하며 이사회 4분의 1을 친환경 인사로 채웠고, 현재 2050년 ‘탄소 중립(Carbon Neutral·이산화탄소 순 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것)’ 목표를 검토하고 있다. 빅오일(석유거인)의 패배에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의 승리’라는 평이 쏟아졌다.

세계 2위 석유 기업인 로열더치셸도 탈탄소에 속도를 내라는 지적을 받았다. 네덜란드 헤이그 법원은 5월 26일 셸에 “2030년까지 순 탄소 배출량을 2019년의 45% 수준까지 줄이라”고 명령했다.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20% 줄이겠다는 셸의 기존 계획보다 더 강화된 수준이다. 셸은 조림(造林), 탄소 포집 같은 탄소 네거티브 기술을 활용하더라도 석유 생산량 감축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이는 사법부가 민간 기업에 탄소 배출량을 줄이라고 요구한 첫 번째 사례로, 다른 석유 기업들에도 위협으로 다가왔다.

탄소 시대 글로벌 에너지 시장을 석권했던 ‘석유공룡’이 탈탄소 추세에 변화하고 있다. 석유·가스 산업의 직간접적인 온실가스 배출량은 42%가량을 차지한다. 전 세계 탄소 중립 목표 달성을 위해 변화가 불가피하다. 과거에는 일부 환경 운동가들의 반대만 이겨내면 사업 운영에 문제가 없었지만, 이제는 각국 정부와 투자자들까지 석유공룡들에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미국 민주당 크리스 밴홀런 연방 상원의원은 엑손모빌·셰브론 등 미국 에너지 대기업을 대상으로 수백조원대의 ‘징벌적 탄소세’를 부과하는 법안을 만들고 있다. 2000~2019년 배출한 탄소량에 따라 탄소세를 부과하고, 최근 발생한 홍수·산불 등 이상기후와 재난에 대한 책임까지 모두 물겠다는 계획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올해 5월 “2050년까지 탄소 중립에 도달하려면 올해부터 석유·가스 탐사 및 투자 등 새로운 프로젝트를 중단해야 한다”고 분석하며 압박을 더했다.

상황이 이러하자, 주요 석유 업체들은 잇따라 친환경 경영을 위해 자산 매각을 진행 중이다. 엑손모빌은 올해 영국과 북해에 보유한 유전 14곳의 권리와 인프라 자산을 NEO에너지에 10억달러(약 1조1960억원)를 받고 매각했다. 셸도 필리핀 해상 가스전 지분을 4억6000만달러(약 5500억원)에 매각하기로 한 상황이다.

영국 에너지 시장 조사 업체 우드 맥킨지에 따르면, 주요 글로벌 석유·가스 회사들이 매물로 내놓은 자산의 총액은 1400억달러(약 167조원)에 달한다. 미국 엑손모빌과 셰브론, 유럽의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토털에너지스·셸·에니 등 6개 사는 2018년 이후 281억달러(약 34조원) 규모의 자산을 매각했으며, 300억달러(약 36조원)가 넘는 자산을 추가로 처분하려고 나섰다.


주요 석유 기업들은 자산을 매각하고 다양한 신재생 에너지 사업에 투자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주요 석유 기업들은 자산을 매각하고 다양한 신재생 에너지 사업에 투자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수소·탄소 포집 등 에너지 전환 적극

이들은 자산을 팔고 재생에너지 기술에 투자하고 있다. 에너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물만 배출해 친환경 에너지로 알려진 ‘수소’와 배출한 탄소를 다시 흡수하는 ‘탄소 포집’ 사업 등에 대한 투자가 대표적이다.

BP는 지난 3월 영국 티스사이드 공업지대에 연 26만t 규모 수소를 생산하는 플랜트를 짓기로 했다고 밝혔다. 북해에 있는 천연가스전을 통해 수소를 추출하고, 대량 생산한다는 계획이다. 2050년 탄소 중립 계획에 맞추면, 세계 에너지 중 수소 비중이 1% 미만에서 16%까지 늘어날 것이란 계산에서다. 셸은 ITM파워와 독일의 라인란트 지역에 대규모 수소 전기분해 시설을 건설하고 있고, 셰브론은 일본 자동차 업체인 도요타, 엔진 제조 업체인 커민스와 각각 협력해 수소 인프라 구축과 수소 연료전지 차량 보급에 나섰다.

지난해 사상 첫 적자를 낸 엑손모빌도 뒤늦게 친환경 전환을 선언했다. 엑손모빌은 그간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친환경 기술 도입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친환경 정책에 입장을 바꿨다. 엑손모빌은 올해 3월 열린 투자설명회에서 “저탄소 솔루션 사업부를 창설했다”면서 탄소 포집·저장(CCS) 및 수소, 바이오 연료 기술을 상업화하겠다는 계획을 내세웠다. 대런 우즈 CEO는 “CCS 기술이 진전을 이룬 데다 각국 정부, 투자자들의 관심도 모이고 있다”며 “엑손모빌의 탄소 배출량을 줄이고, 다른 이들의 효율적인 탄소 감축을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벤처캐피털(VC)을 통한 투자도 늘리고 있다. 셰브론과 에니, 노르웨이 국영 에너지 기업 에퀴노르는 지난해 8월 공동으로 핵융합 기술 스타트업인 잽 에너지에 650만달러(약 78억원)를 투자했다.

셰브론과 BP는 올해 지하에 있는 고온층으로부터 증기 또는 열수의 형태로 열을 받아들여 발전하는 캐나다 지열발전 스타트업 이버테크놀로지에 투자했다.

BP의 VC 부문 대표인 메건 샤프는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BP는 2019년 3건가량의 투자를 집행했지만, 올해는 5~7건, 내년에는 10건가량의 투자를 진행할 계획”이라며 “BP의 VC를 통한 친환경 에너지 투자 규모는 연간 2억달러(약 2392억원)로 예년의 두 배가량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셸의 VC 투자 건수도 2017년에 비해 두 배가량 증가한 연 20~25건이며, 인력도 세 배 늘어 35명에 이른다.

에너지 업계에서는 석유공룡이 재생에너지 시대도 주도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석유전문매체 오일프라이스닷컴은 “석유와 재생에너지는 서로 반대되는 분야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빅오일이 에너지 전환과 재생에너지 시장을 장악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전했다. 셸은 지난 7월 재생에너지업체인 인스파이어 에너지를 인수했고, 토털에너지스는 아마존과 함께 유럽, 미국에 재생에너지를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한 상황이다.


plus point

오스테드, 화석연료 기업에서 풍력발전 사업자로

덴마크 국영 에너지 기업인 오스테드(Orsted)는 다른 화석연료 기업보다 발 빠르게 사업 전환에 성공한 기업 중 하나다. 오스테드는 과거 유럽을 대표하는 석탄화력발전 기업이었다. 사명은 동에너지(DONG Energy)로, 석유와 천연가스를 생산했다. 하지만 오스테드는 유럽 내 규제 강화에 2008년 화석연료 기반 기업에서 재생에너지 기업으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해상풍력발전단지의 개발과 건설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하며 기술 혁신과 단가 하락을 이끌었다. 오스테드는 2017년 영국 석유화학 기업인 이네오스에 석유 및 가스 사업 부문을 매각하고 사명을 변경하면서 사업 전환을 마무리 지었다. 오스테드는 현재 세계 풍력발전 설비의 3분의 1을 운용하고 있으며, 세계 최대 해상풍력발전 기업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안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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