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건설이 서울 서초구 반포동 신반포15차 조합에 제시한 조감도. 사진 대우건설
대우건설이 서울 서초구 반포동 신반포15차 조합에 제시한 조감도. 사진 대우건설

아파트 재건축·재개발 과정에서 발주처인 조합은 ‘갑’, 시공사는 ‘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합이 시공사를 선정한다는 점 외에도 조합이 시공사에 일방적인 ‘계약 해지’를 통보하는 경우도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조합이 시공사 지위를 일방적으로 해지하는 행위에 제동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대우건설 측이 서울 서초구 반포동 신반포15차 조합을 상대로 제기한 ‘시공사 지위 확인’ 소송에서 최근 승소하면서다.

그동안 건설업계에서 시공사 해지가 관행적으로 이뤄지는 경우 법원은 대부분 조합 손을 들어줬다. 법원이 이번에 건설사의 손을 들어준 것이 이례적이라는 점에서 업계 관심이 커졌다. 게다가 1심에서 대우건설이 제기한 소송을 각하했던 재판부가 항소심에서 판단을 뒤집으면서 업계의 파장도 컸다. 한 번 시공사를 교체한 뒤 또다시 시공사가 바뀌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할 판결을 이끈 법무법인 광장은 ‘시공사 갈아타기’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합, ‘공사비 증액’ 이유로 시공사 바꿔…삼성물산과 손잡아

신반포15차 조합과 대우건설은 2017년 손을 잡고 공사비 2098억원에 도급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2019년 말 조합과 대우건설은 결별하게 됐다. 이미 아파트를 철거하고 조합원들이 이주를 마친 상태였지만, ‘공사비 증액’ 문제로 둘 사이의 갈등은 깊어졌다.

대우건설은 설계 변경으로 지하에서부터 지상까지 3만여㎡(약 9075평)의 연면적이 늘어나 500억원대의 공사비 증액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합은 “시공사 입찰 당시 무상 특화설계 항목”이라며 200억원대 이상은 줄 수 없다고 대응했다. 조합은 임시총회를 열어 대우건설의 시공사 지위를 취소하고 이듬해 ‘래미안’ 브랜드 아파트를 짓는 삼성물산을 새 시공사로 선정했다.

대우건설은 2019년 12월, 조합의 결정에 반발해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시공사 지위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1심 재판부는 각하 결정을 했지만, 2심 서울고등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항소심 재판부는 “(시공사 지위) 해제 사유의 존재가 인정되지 않아 이 사건 계약해제 통보는 효력이 없다”면서 “대우건설이 시공사 지위에 있다는 확인 판결을 받는 것이 가장 유효하고 적절한 수단”이라고 판단했다.

또 조합이 문제를 제기했던 대우건설의 ‘공사비 증액’도 시공사 해제 사유로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조합원들이 혁신안을 채택할 경우 스카이브릿지, 지하 4층 주차장 등으로 공사 연면적이 증가하고, 공사비가 증액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한 상태에서 대우건설을 시공사로 선정했다”면서 “대우건설의 지하 4층 공사비에 대한 증액 요구가 부당하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외에도 광장은 조합이 주장한 총 12개의 방대한 해제 사유를 모두 방어해 대우건설에 어떤 귀책 사유도 없다는 판단을 이끌어 냈다. 이 판결로 대우건설은 신반포15차에 대한 시공권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기존에 없던 판례…관건은 ‘임의해제 효력 없음’ 입증

광장은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도시정비법)부터 파고들었다. 광장은 시공사 선정 절차의 공정성 확보를 위해 도시정비법을 수차례 개정했지만, 정작 시공사와 계약 관계를 해제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별다른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는 부분을 포착했다. 과거에는 조합의 시공사 교체가 이례적이었지만, 최근 부동산 시장 열기로 인해 아파트 브랜드 교체로 시세 차익을 거두려는 조합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건설업계에서는 시공권을 방어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조합은 민법 제673조(수급인이 일을 완성하기 전에는 도급인은 손해를 배상하고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를 근거로 도급인의 ‘임의해제권’이 인정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번 소송은 건설사가 조합의 해제 통보를 무력화해 시공권 자체를 계속 유지하고자 했기에 광장은 소송의 유형부터 새롭게 검토했다.

광장은 우선 조합이 주장하는 민법 제673조를 역이용했다. 조항에 따른 임의해제권은 손익상계나 과실상계가 허용되지 않는 ‘완전한 배상’을 전제로 하는데, 이 부분이 조합원 총회에서 실질적인 논의가 이뤄지지 않은 점을 집중적으로 파헤쳤다. 또 항소심 재판 과정에서 조합장의 발언이 녹음된 회의 자료 등을 추가로 제출하면서 조합장이 대우건설의 시공사 지위 해제 이후 손해배상 규모와 여파 등을 조합원들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을 밝혀냈다.

결국 재판부는 “이 사건 계약 해제 통보에 민법 제673조에 기한 임의해제 의사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더라도 이 사건 해제 총회에서 그러한 해제 및 그와 일체를 이루는 손해배상에 관해 총회 의결이 없었으므로 유효하다고 할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대우건설의 손을 들어줬다.

광장 건설부동산 그룹의 총괄 그룹장 장찬익(사법연수원 23기) 변호사는 “조합이 결의하지 않은 이 사건 해제 통보는 ‘임의해제’로서의 효력도 인정될 수 없다고 판단돼 역전승을 이뤄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즉 조합이 조합원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고 제대로 된 법리로 사업을 수행해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을 법원이 제시했다고 봐야 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건설사들 “정비사업 건전한 法문화 정립되길”

이번 소송 결과를 두고 정비업계의 관심도 집중됐다. 최근 시공사를 갈아치우는 조합이 잇따르면서 건설사들의 ‘속앓이’가 계속됐다는 점에서다.

일례로 서초구 방배6구역 재건축 조합은 ‘무상 특화 설계와 공사비 증액’ 갈등으로 지난 10월 시공사인 DL이앤씨와 계약을 해지했다. 흑석뉴타운의 핵심인 동작구 흑석9구역도 설계안 등을 두고 롯데건설과 대립하다 지난 4월 시공사 계약을 해지했다. 정비업계는 조합장 교체나 조합원들의 변심으로 시공권 해지가 이뤄진 계약만 수십 건에 달한다고 보고 있다.

광장은 이번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을 통해 건설업계의 부당한 관행에 제동이 걸리고, 향후 정비사업 현장에서 건전한 법문화가 정립될 것으로 기대했다. 현재 관행대로라면 사업비 증가, 사업 지연, 공사비의 연쇄적인 상승과 공사 품질의 저하로 이어지는 문제가 되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변호사협회 등록 재개발 재건축 전문변호사인 정채향(38기) 변호사는 “최근 정비사업 현장에서 유행처럼 벌어지는 ‘시공사 계약 해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조합 집행부가 시공사 교체를 위해 조합원에게 해제 사유를 허위로 설명하거나 계약 해제 후 조합에 별다른 손해가 발생하지 않을 것처럼 홍보하는 것”이라며 “이번 판결로 조합원들이 정확한 정보를 받은 상태에서 올바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신반포15차 조합은 11월 6일 대법원에 상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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