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형 건설사를 중심으로 컨소시엄(공동 수급체) 형태의 사업 수주가 늘고 있다. 현대건설·삼성물산·대우건설·GS건설 등 대형 건설사들은 컨소시엄을 구성해 설치 공사나 아파트 정비 사업에 참여한다. 컨소시엄은 2개 이상의 회사가 공동으로 공사에 참여하는 것으로, 정부나 발주사에서도 컨소시엄 구성 시 가점을 주는 방식 등으로 ‘공동 수급’을 장려하는 편이다.
공동 수급 방식을 진행할 때는 컨소시엄 구성원들이 입찰 단계에서 대표사에 업무를 일임하고 손익을 나누는 게 업계 관행이다. 그러나 문제는 서로 다른 회사가 공동으로 사업에 참여하면서 컨소시엄 내부 분쟁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입찰 전과 공사 진행 중, 마무리 단계에서 설계 비용이 계속 달라져 다툼이 잦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서다.
하지만 앞으로는 조합원 개인(컨소시엄 구성원)이 업무를 집행한 대표사에 손해배상을 청구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현대건설이 GS건설과의 2000억원대 손해배상 소송에서 6년 만에 승소를 확정 지으면서다. 이번 재판은 세계 최초·최대 규모의 관급 공사 과정에서 일어난 분쟁이면서 컨소시엄 내부 구성원이 또 다른 조합원을 상대로 제기한 특이한 소송으로 업계의 관심을 끌었다.
GS건설 “현대건설, 저가 수주로 컨소시엄 손해” 주장
현대건설과 GS건설은 2010년 한국남부발전(이하 남부발전)이 발주한 삼척그린파워발전소 사업에 컨소시엄을 구성해 참여해 2011년 6월 남부발전과 공사대금 1조1500억원에 도급 계약을 체결했다. 현대건설이 대표사로 업무 수행을 총괄하고 일부 특정 기자재 구매나 제작 등 관련 업무를 분담해 이행키로 했다. 지분 비율은 현대건설 51%, GS건설 49%로 정했다.
그러나 선행 공정인 ‘대비 공사’가 지연되면서 공사 기간이 6개월가량 연장됐고, 당초 예산의 40% 넘는 적자가 발생했다. 이에 GS건설은 2015년 “현대건설이 남부발전이 제시한 공사 기간보다 단축한 기간을 산정하고, 공사 금액도 원가보다 낮은 금액으로 산정하는 등 ‘선관주의 의무(선량한 관리자의 주의 의무)’를 위반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현대건설은 법무법인 바른을, GS건설은 법무법인 화우를 선임해 치열한 법정 다툼을 펼쳤다.
1심은 입찰 업무의 특수성을 고려해 현대건설이 선관주의 의무를 위반한 잘못이 없다고 판단했다. ‘컨소시엄 조합원 개인의 지위로 공동 수급체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며 제기한 예비적 청구에 대해서도 손해를 본 주체가 공동 수급체 전체인 만큼 GS건설이 개인적으로 배상을 요구할 자격은 없다고 봤다. 조합 재산은 이른바 ‘합유재산’으로, 조합 채권의 추심을 구하는 소송을 제기하려면 조합원 전원이 공동으로 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에 따른 것이다.
재판부는 “입찰 금액을 산정하는 업무는 공동 수급체의 최대 이익을 위해 이윤을 얻을 수 있는 현실적인 금액임과 동시에 다른 경쟁자와 비교할 때 낙찰자로 선정될 수 있는 합리적인 금액을 제시해야 하는 상반된 측면이 존재한다”며 “이번 공사는 세계 최초로 시도되는 최대 용량 규모의 공사로 현대건설로서도 적정 예산을 산정하는 데 다소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고, 손해 발생을 감수하고서 금액을 산정한 것으로도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GS건설은 항소심에서 새로운 주장을 펼쳤다. 현대건설의 채무불이행 또는 불법 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채권의 존재를 확인해달라는 예비적 청구를 제기한 것이다. 민법에 따라 조합 사무가 종료되기 전 잔여재산에 대한 청구를 진행할 수 없다면 ‘손해배상 채권이 존재하는지 확인할 수는 있는 것 아니냐’는 취지다. 이 과정에서 GS건설 측은 독일의 민법 규정을 근거로 제시했다. 독일은 조합원 중 하나가 조합 채무 확정 전에도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는데, 이를 한국에도 도입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바른은 ‘조합사무가 종료되기 전까지 조합원 개인은 조합 채권에 대해 소송할 수 없다’는 기본 법리와 대법원 판례로 반격에 나섰다.
결국 항소심 재판부도 바른의 주장이 옳다고 봤다. 재판부는 “GS건설에 분배될 잔여재산을 확정하기 위해서는 컨소시엄의 조합재산으로 채무를 변제하고 남은 적극재산이 확정돼야 한다”며 “컨소시엄이 현대건설에 대한 손해배상 채권의 확인이 필요함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GS건설 개인의 채권 확인은 필요하다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기술자와 직접 ‘도면 공부’한 바른…시각화 자료도 활용
이번 사건에서는 입찰 단계에서 만들어진 실행예산서 두 건의 금액 변동이 쟁점이 됐다. GS건설 측은 2011년 3월쯤 작성한 실행예산서에는 예산 실행률이 93.4%로 책정됐지만, 2012년 6월 실행예산서에는 예산 실행률이 121.51%로 변경된 점 등을 근거로 현대건설이 입찰과 도급 계약 당시 선관주의 의무를 위반해 계약 금액을 지나치게 저가로 책정했다고 주장했다.
GS건설 측은 예산서상 수치를 기반으로 공사 항목별 비용 증가에 의문점을 제기하는 한편, 현대건설 측에서 제공한 자료가 부족하다며 감정 절차 도입을 요청했다. 다른 팩트에 변화가 없다면 금액이 달라질 이유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항소심 감정에 참여한 감정인도 각 예산서의 수치 변동을 두고 “급격한 물가 인상 등 다른 요소가 없는데 금액이 달라졌다”는 결과를 내놨다.
이에 바른은 현대건설 기술자들과 공사별 도면을 펼쳐두고 금액 변동 이유를 하나하나 찾아내 반격했다. 예를 들어 변호인이 예산서상 ‘강관파이프’ 1개가 100원에서 1000원으로 금액이 증가한 이유가 무엇인지 물으면, 기술자들이 도면으로 ‘직경이 넓어졌다’ ‘길이가 길어졌다’ 등 이유를 설명해 주는 방식이다. 예산서에 쓰인 숫자만 보면 수치 변동에 문제가 있어 보이지만, 도면을 보면 사양이 바뀌어 금액이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는 취지다.
기술력 차이로 인해 손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도 피력했다. 앞서 보일러 설치 공사 과정에서 현대건설과 GS건설은 규모와 물량이 비슷한 보일러 4기 중 2기씩을 개별적으로 시공했는데, 현대건설은 약 492억원을, GS건설은 약 632억원의 비용이 소요됐다. 재판부는 “완성된 상세 설계에 따라 시공된 비슷한 규모의 공사에서도 주체에 따라 약 30%에 달하는 공사비 차이가 발생한다”며 바른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김재환(사법연수원 22기) 바른 변호사는 “판사들도 기술 부분에 대해서는 문외한이고 특히 건설은 전문가가 아니면 쉽게 이해할 수가 없다”면서 ”말과 글 등 추상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그림을 통해 재판부를 설득한 방식이 유효하게 작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바른은 수차례 법정 스크린에 도면을 띄워두고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변론했다. 그는 “사양이 변경된 도면을 캡처하고,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일시까지도 담았다”면서 “외형적으로는 이상한 것 같지만 도면을 보면 금액 변동에 특별한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수와 금액 차이는 사양이나 물량 변경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라고 밝혔다.
바른은 이번 재판이 바람직한 형태의 소송은 아니라고 평가했다. 김 변호사는 “두 회사가 이익을 한 푼이라도 보기 위해 협력을 해야 하는데 1심에서 4년 이상, 2심에서도 2년 넘게 재판을 진행했다”며 “이 기간은 협력을 위한 시간이지 싸우고 분쟁을 일으켜 소송할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대형 공사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컨소시엄 간 분쟁에서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1·2심에서 주위적 및 선택적 청구, 예비적 청구가 모두 기각 또는 각하된 GS건설은 결국 상고를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