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수상 문경 호산춘 대표 장수황씨 사정공파 23대 종손, 문경호산춘 양조장 3대 사장 문경 장수황씨 23대 종손인 그는 “조선시대 문헌에 나와있는 제조방법 그대로 호산춘을 빚는다”고 말했다. 사진 박순욱 기자
황수상 문경 호산춘 대표 장수황씨 사정공파 23대 종손, 문경호산춘 양조장 3대 사장
문경 장수황씨 23대 종손인 그는 “조선시대 문헌에 나와있는 제조방법 그대로 호산춘을 빚는다”고 말했다. 사진 박순욱 기자

경상북도 문경의 장수황씨(長水黃氏) 사정공파 종택에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문중 술’ 호산춘이 있다. 옅은 노란색을 띠는 호산춘은 부드러운 맛과 짜릿한 향이 특징이다. 1991년 경북 지정 무형문화재로도 등극한 호산춘은 약주로는 드물게 알코올 도수가 18도다. 대형마트에서 살 수 있는 대부분의 약주 도수는 13~15도 정도다. 전통주 업계에서는 문경 호산춘, 면천 두견주, 한산 소곡주를 ‘3대 18도 전통 약주’로 부른다. 

장수황씨 가양주인 호산춘이 세상에 나온 것은 고(故)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덕분이다. 당시 청와대에서 장수황씨 문중에 연락해 호산춘을 보내 달라고 하니 “(우리는 술을 파는 사람이 아니니) 필요하면 직접 가져가라”고 했다는 일화는 지금도 회자된다. 1989년 레이건 대통령 방한 때 청와대 만찬주로 선정된 것을 계기로 이듬해부터 상업 양조를 시작했으니, 올해는 호산춘 출시 32년째 되는 해다.

호산춘을 만드는 양조장을 방문하기에 앞서 800m 정도 떨어진 장수황씨 사정공파 종택을 먼저 찾았다. 장수황씨 사정공파 23대 종손인 황수상 대표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문경시 산북면 대하1리에 있는 이 종택이 지어진 연도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지만, 450여 년 전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장수황씨 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인물이 황희(1363~1452) 정승이다. 영의정 자리에서만 18년을 지낸, 조선의 최고 명재상으로 꼽히는 방촌 황희 정승이 장수황씨다. 그리고 장수황씨 사정공파의 시조는 황희 정승의 증손자인 황정으로, 임금으로부터 ‘사정공’이란 시호를 받아서 장수황씨 사정공파를 이끌게 됐다. 올해는 황정이 문경에 터를 잡은 지 506년 되는 해다. 

종택을 나와서 호산춘 양조장을 둘러봤다. 쌀을 떡이나 고두밥으로 찌는 큰 솥, 여러 개의 대형 발효조 등 여느 양조장과 풍경이 비슷했다. 발효조로는 이전에는 250L 항아리를 썼으나 7년 전부터는 1500L 스테인리스 탱크를 쓰고 있다. 이 스테인리스 탱크에는 발효 중인 술, 또 여과를 거친 후 병입 전, 안정화 단계 중인 술이 들어 있었다. 코끝으로 전해오는 향은 자극적이지 않고 은은했다. 

발효가 끝난 술은 여과와 압축을 동시에 하는 장치를 거쳤다가 한 달 남짓 안정화한 뒤 병입돼 출시된다. 호산춘에 들어있다는 솔잎 향은 발효 탱크에서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황 대표는 “덧술 단계에 솔잎을 분쇄해 넣지만 천연 방부제 역할을 할 뿐 솔잎 향이 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생산량이 많지 않은 탓인지 양조장은 먼저 둘러본 종택만큼이나 고즈넉했다. 술 사러 오는 사람이 가끔 있을 뿐 방문객도 별로 없었다. 

호산춘은 이양주(두 번 빚은 술)다. 밑술에 한 번의 덧술로 발효를 마무리하는 술이다. 제조 방법은 간단한 편이다. 우선 멥쌀을 가루로 내서 백설기를 찐다. 여기에 누룩과 물을 같이 섞는다. 이게 밑술이다. 


문경 장수황씨 종택에 있는 황희 정승 사당. 명절 두 번, 생신 등 일 년에 세 번 문을 연다. 사진 박순욱 기자
문경 장수황씨 종택에 있는 황희 정승 사당. 명절 두 번, 생신 등 일 년에 세 번 문을 연다. 사진 박순욱 기자

단맛이 강한 이유는.
“밑술에는 멥쌀을 썼지만 덧술에는 찹쌀을 쓴다. 그것도 멥쌀보다 두 배 많은 양을 넣는다. 찹쌀은 멥쌀보다는 단맛을 더 낸다. 호산춘이 다른 약주보다 알코올 도수가 높은 데는 찹쌀을 많이 쓰는 것도 한몫한다. 가루를 낸 솔잎과 찹쌀을 섞어 고두밥을 만든다. 이러면 덧술이 완성된다. 발효가 한창 진행 중인 밑술에 이 덧술을 부어준다. 그리고 다시 한 달 좀 더 기다린다. 이 과정이 2차 발효다. 밑술 발효, 덧술 발효 기간만 대략 두 달 정도 걸린다.”

술이 다 되면 압축기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데.
“발효가 끝나면 다음 순서가 찌꺼기를 거르는 여과 과정이다. 그런데 호산춘은 좀 다르다. 술이 워낙 뻑뻑해 압력을 가해 짜지 않으면 술과 고형물 찌꺼기가 분리되지 않는다. 쌀보다 물이 워낙 적기 때문이다. 대개 막걸리 발효에는 물을 쌀의 120~160% 정도 넣는데, 호산춘은 쌀 대비 93% 정도의 물을 쓴다. 쌀보다 물이 적은 만큼 고형물이 많이 남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과와 압축을 동시에 하는 필터, 프레스 장치(압축기)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프레스 장치가 없던 시절에는 맷돌로 눌러 술을 짰다.”

여과·압축 공정을 끝낸 술은 다시 스테인리스 통에 들어가서 한 달을 쉰다. 이른바 ‘안정화’ 과정을 거치면서 술의 향과 맛이 더 깊어진다. 그래서 호산춘은 ‘100일 정성’ 끝에 나온다고 한다. 발효 기간만 두 달, 안정화 기간도 한 달 이상 소요되기 때문이다. 여과·압축에는 하루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100일 정성을 들인 호산춘은 어떤 맛인가.
“호산춘은 첫맛, 중간 맛, 끝 맛 구분 없이 자연스럽게 목을 타고 넘어간다. 한마디로 단맛과 신맛의 조화가 빼어난 술이다. 여과를 끝내고 한 달 이상 안정화를 거치기 때문에 맛이 끊어지지 않는다. 쌀(특히 찹쌀)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단맛과 원료가 산화(발효)하면서 생기는 신맛, 마지막에는 누룩 특유의 쿰쿰함 등이 잘 어우러진 맛이 난다.”

문경 호산춘 양조장이 생산·판매하고 있는 술은 현재 18도 호산춘 단일 제품뿐이다. 그러나 10여 년 전부터 호산춘을 증류한 소주를 항아리와 오크통에 담아 숙성하고 있다. 오래 숙성된 것은 12년이 넘었다고 한다. 숙성 12년? 스코틀랜드 위스키도 12년 이상 숙성하면 프리미엄 위스키로 내놓지 않나. 그런데 ‘화경’이란 신제품 증류주 이름까지 지어놓고도 언제 세상에 내놓을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는 게 황 대표의 설명이다. 

증류주 출시를 미루는 까닭이 있나. 코로나19 때문인가.
“신제품 출시 시기를 못 박지 않은 건 코로나19 사태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맛과 향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방망이를 깎아 바늘을 만든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나. 양조장을 3대째 하고 있지만 아직 영업 마인드가 없다. 찾아오는 손님에게만 술을 파는 수준이다. 백화점에서도 제품을 달라고 하지만, 우리가 거절한다. 생산량이 많지도 않지만 유통 관리 인력이 없어서다. 양조장이 종택 관리에 도움이 못 되지만 수백 년 내려온 호산춘의 품질은 절대 양보할 생각이 없다. 그래서 발효가 끝난 술에는 물도 타지 않는다. 알코올 도수를 낮추면 생산성이 높아지겠지만 종택을 지키는 종손이 그런 타협을 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