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박재완 전 기획재정부 장관, 유일호 전 기획재정부 장관, 김희관 전 법무연수원장, 정승 전 농림수산식품부 차관·식약처장. 사진 조선일보 DB
왼쪽부터 박재완 전 기획재정부 장관, 유일호 전 기획재정부 장관, 김희관 전 법무연수원장, 정승 전 농림수산식품부 차관·식약처장. 사진 조선일보 DB

‘권력형 사외이사’에 대한 상장사들의 선호도가 높다. 청와대나 장차관 혹은 국회의원 출신 인사 60명이 올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사외이사 혹은 감사위원 명단에 새롭게 이름을 올렸다. 고위 법관이나 검사, 경찰 출신 인사 76명이 신임 사외이사로 영입됐다. 일부 인사는 두 개 상장사의 사외이사를 겸직하기도 해 고위직 출신의 높은 인기를 방증했다. 권력형 사외이사에 대해 재계 전문가들은 양가적 시선을 갖고 있다. 이들이 특정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휘할 적임자라는 긍정적 평가도 존재하는 반면, 소액주주보다는 대주주나 경영진의 이익을 대변하는 ‘거수기’ 역할을 하는 데 그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사외이사를 추천하는 과정에 경영진의 입장이 반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계 전문가들은 사외이사가 경영진을 견제하는 본연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소액주주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해 이사진을 선임할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청와대·국회서 상장사 30여 곳 사외이사로

3월 28일 조선비즈 증권부는 유가증권·코스닥시장 상장사 2351개 사의 주주총회 의안을 분석했다. 그 결과 총 22개 상장사가 청와대 실장이나 비서관 혹은 행정관 출신 인사를, 10개 상장사가 국회의원 출신 인사를, 38개 상장사가 장차관(급) 인사를 신임 사외이사 혹은 감사위원 후보로 추대했다(한 명이 여러 직을 거쳤을 경우 중복해서 셈).

경남스틸은 염상국 전 청와대 대통령경호실장을 감사위원으로, LX하우시스는 김영주 전 청와대 경제정책수석비서관을 신임 사외이사 겸 감사위원으로 영입했다. 와토스코리아는 신성호 전 청와대 홍보특별보좌관을 사외이사로 신규 선임했다. 그 외에 이훈 전 청와대 국정상황실장과 11명의 비서관 출신 인사가 이사진에 새롭게 이름을 올렸다. 

청와대 특별감찰반장 출신 인사 두 명도 신임 사외이사 명단에 포함됐다. 청와대 출신 인사 중에는 두 개 상장사의 사외이사를 겸직한 사람도 있었다. 황덕남 전 청와대 법무비서관은 하나은행 사외이사 겸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상태에서 올해 롯데제과 신임 사외이사로 영입됐다.

국회의원 출신 인사도 인기가 많았다. 3선 의원 출신 인사 두 명이 올해 정기주주총회를 통해 상장사 이사회에 입성했다. 제일기획은 제18~20대 국회의원을 지낸 장병완 호남대 석좌교수를 영입했으며, 인바이오젠은 제17~19대 국회의원이었던 박기춘 전 의원을 감사로 신규 선임했다.

신규 선임 사외이사가 기업 대주주와 ‘인연’이 있는 사례도 눈에 띄었다. 동일고무벨트와 DRB동일은 각각 민현주·박인숙 전 의원을 사외이사로 영입했는데, 두 사람 모두 동일고무벨트 및 DRB동일의 대주주인 김세연 전 의원과 같은 당(현 국민의힘)에서 제19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이력이 있다.

국회의원 출신 인사 중에서도 두 개 상장사의 사외이사를 동시에 맡은 사례가 나왔다. 제17대 국회의원과 기획재정부·고용노동부 장관, 청와대 정무수석 국정기획수석비서관 등을 두루 역임한 박재완 전 장관은 올해부터 삼성바이오로직스와 한국앤컴퍼니의 사외이사를 맡게 됐다. 박 전 장관은 4월까지 삼성전자 사외이사 및 이사회 의장직과 롯데쇼핑 사외이사직을 겸직하기도 했다.

장차관급 고위 공무원 출신 인사도 올해 신임 사외이사진에 대거 포진했다. 장관 및 차관 타이틀을 달았던 인사 20명이 신임 사외이사로 이름을 올렸다. 장관급(검찰총장·금융위원장 등)과 차관급(법무연수원장·경찰청장·관세청장·특허청장·육군참모총장·서울특별시부시장·부산광역시장)에 해당하는 고위직을 지낸 인사까지 포함하면 총 34명으로 늘어난다.

유일호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삼성생명의 사외이사로 신규 선임됐다. 또 장차관급 공무직 출신 인사 중 세 명은 두 개사의 사외이사를 동시에 맡게 됐다. 한 명은 박재완 전 장관이며, 다른 두 명은 신세계건설·한솔제지에 동시 영입된 김희관 전 법무연수원장, 남해화학·코스맥스엔비티의 사외이사 및 감사위원으로 선임된 정승 전 농림수산식품부 차관이다.

판검사 출신으로 상장사 사외이사가 된 대표적인 인물은 올해 한미사이언스에 영입된 김용덕 전 대법관이다. 서울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와 차관급에 해당하는 법원행정처 차장을 거쳐 2012년부터 2018년까지 대법관으로 근무했다. KT도 장관급 판사 출신 인사를 영입했다. 김용헌 전 헌법재판소 사무처장을 신임 사외이사로 앉혔다. 김 전 처장은 현재 HJ중공업에서도 사외이사직을 맡고 있다. 

검사 출신 중에서도 장관(급) 고위 인사가 신임 사외이사진에 대거 이름을 올렸다. 먼저 대신증권은 노무현 전 대통령 때 법무부장관을 지낸 김성호 재단법인 행복세상 이사장을, 호텔신라는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법무부 장관이었던 김현웅 법무법인 바른 대표번호사를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삼성카드는 김준규 전 검찰총장을 영입했다.


재계 “권력형 인사, 경영진 거수기 역할 하는 데 그쳐”

기업이 청와대 고위 공무직이나 국회의원, 장차관 출신 인사를 선호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들은 정계 인사들과 친분 관계여서 향후 있을지 모를 검찰 조사나 세무 조사 등 외풍으로부터 기업을 보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김민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사외이사는 전문성과 독립성에 있어 주요 기준을 충족하면 되는 자리”라며 “권력형 사외이사의 선임을 꼭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고위직 출신 사외이사의 선임은 현행 상법상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상법 제542조의8제2항에 따르면 회사의 최대주주나 특수관계인 혹은 경영 사항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주요 주주가 아니라면 누구나 사외이사 후보로 추천이 가능하다. 현직 사외이사가 과반을 차지하는 ‘사외이사 후보추천위원회’가 일정 요건을 갖춘 후보들을 추천하면 정기 주주총회에서 표결을 통해 선임 여부를 확정 짓는다.

그럼에도 재계 일각에서는 권력형 사외이사의 역할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사외이사의 후보 추대에 경영진의 이해관계가 반영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들이 소액주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김재훈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은 “사외이사 후보추천위원회에 회사 대표이사 등 경영진이 포함돼 있는데, 추천위원회를 경영진이나 이사회 의장이 마음대로 구성할 수 없도록 바꿔야 사외이사가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선임연구위원은 “사외이사 후보들이 과거 여러 안건에 대해 어떤 의견을 냈는지 등 정보를 충분히 제공해 소액주주들이 선호하는 인사를 직접 뽑을 수 있도록 절차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노자운·이인아·권유정 조선비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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