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법만 있었다. 1997년 4월 11일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장애인등편의법)이 제정됐고, 이듬해 시행됐다. 편의시설 등에 경사로나 엘리베이터 등을 갖추도록 한 것이 골자로, 장애인의 접근권을 명문화한 첫 법이었다. 

하지만 현실을 바꾸지 못했다. 1층의 문턱은 여전히 높았고, 문은 무거웠다. 문을 열고 편의점에 들어가도 휠체어를 돌릴 공간마저 없었다. 장애인 등 편의법이 제정된 지 정확히 10년 만에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장애인차별금지법)도 제정·시행됐지만,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이에 휠체어 탄 장애인 2명과 노인 1명, 임산부 1명 등 4명이 2018년 4월 11일에 서울중앙지법에 소장을 냈다. 이날은 장애인등편의법이 만들어진 지 20년,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된 지 10년이 된 날이었다. 

3년 10개월여 만인 올해 2월 10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0부는 원고 4명이 GS리테일과 투썸플레이스, 호텔신라,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차별 구제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

재판부는 “현재의 시행령은 위법하기 때문에 무효”라며 사실상 관련 법에 사망 선고를 내렸다. 법무법인 디라이트의 김용혁(변호사시험 1기) 변호사가 장애인법연구회,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등과 함께 뛰며 승소를 이끌어냈다.

장애인등편의법 제3조는 시설 소유주에게 편의시설 설치를 의무화하면서도 구체적인 적용 범위와 시설물은 시행령을 통해 정하도록 위임했다. 그런데 하위법인 시행령 제3조는 적용 대상을 바닥면적의 합계가 300㎡(약 90평) 이상 1000㎡(약 302평) 미만인 시설로 규정했다. 즉 300㎡ 미만의 편의점일 경우 장애인 등을 위한 편의시설을 설치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100m마다 있는 편의점, 장애인들에겐 ‘그림의 떡’

그 결과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일정 기준 미만의 공중이용시설에 대한 장애인 접근성 실태조사’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조사를 보면 지난 2019년 기준 전국 편의점은 4만3795개였다. 그중 바닥면적이 300㎡ 이상인 편의점은 전국에 830개(1.8%)였다.

서울로 범위를 좁히면, 전체 편의점 8421개 중 300㎡ 이상인 편의점은 115개(1.4%)에 불과했다. 통계를 서울의 면적으로 다시 계산하면 ‘3.2㎢마다 편의점이 1개’라는 결과가 나왔다. 반면 바닥면적을 고려하지 않을 경우 편의점은 100㎡(약 30평)마다 1개씩 위치했다.

즉 비장애인들은 100m만 가면 편의점을 찾을 수 있는데, 장애인들이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편의점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3.2㎞를 가야만 하는 것이다. 원고들은 “시행령이 합리적 이유 없이 예외를 광범위하게 인정해 사업자들이 장애인 등을 위한 편의시설을 설치하지 않도록 하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4·20 장애인차별철폐 인천공동투쟁단’이 4월 5일 인천시 남동구 인천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장애인 권리 보장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4·20 장애인차별철폐 인천공동투쟁단’이 4월 5일 인천시 남동구 인천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장애인 권리 보장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법 위반 없었다” 논리 이긴 ‘상위법 위반’

하지만 피고로 특정된 GS리테일과 투썸플레이스, 호텔신라 모두 시행령을 잘 지켰다. 이들 모두 300㎡ 이상인 편의점이나 카페 모두 경사로 등 장애인 편의시설을 설치했다. 더군다나 바닥면적이 300㎡ 미만인 곳 중 편의시설이 설치된 사례도 있었다. 게다가 호텔신라의 경우 법 제정 전에 호텔이 건설돼 장애인등편의법 적용 대상이 아니었다.

이에 김용혁 변호사는 ‘시행령이 상위 법령에 위반돼 무효’라는 주장을 펼쳤다. 시행령은 직접적 상위 법률인 장애인등편의법과 장애인차별금지법, 국제인권조약인 장애인 권리협약, 헌법마저 위반하기 때문에 무효이고, 시행령에 따른 편의시설 미설치는 장애인차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장애인등편의법 4조는 장애인 등에게 접근권을 보장하면서도 시설주 등에겐 접근권을 위한 편의시설 설치 의무, 국가에 시책을 마련할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장애인들이 재화·용역을 이용할 기회를 박탈해서는 안 된다는 장애인차별금지법 제15조와 편의 제공을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해선 안 된다는 동법 18조도 있다. 별다른 고려 없이 만들어진 시행령이 이 법들을 위반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재판부 “국가, 장애인 접근권 확대 위한 개선 필요”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재판부는 ‘시행령에 위헌 소지가 있어 위법하다’고 했다. 동시에 GS리테일에 경사로 등 편의시설 설치를 원칙으로 하되, 어렵다면 이동식 경사로나 호출 벨 설치 등 대안을 제공하라고 했다. 또 GS리테일 본사가 가맹사업자들에게 점포환경 개선을 권고하고 비용 20%를 부담하도록 명령했다.

투썸플레이스와 호텔신라의 경우엔 조정이 성립됐다. 투썸플레이스는 △통행 가능 접근로, 출입 가능한 문, 주차구역 등 편의시설 설치 △가맹사업자 20% 지원 등을 약속했다. 호텔신라는 올해 안에 서울신라호텔 전체 객실의 3%, 2025년까지 전체 객실의 3% 이상을 장애인 등을 위한 구조로 개조하겠다고 했다.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준 결과였다. 다만 국가에 대한 배상 청구는 기각됐지만, 국가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은 강조했다. 재판부는 “국가는 법 제정 이후 23년이 넘도록 접근권을 박탈하는 내용의 시행령을 개정하지 않았던 바 국가의 의무를 소홀히 한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면서도 “손해배상 책임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 장애인 보호를 위한 국가적 책무를 다했다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사회복지단체 출신 변호사 “1층이 있는 삶”

김용혁 변호사는 서울대 로스쿨 1기 출신이다. 사회 복지단체 활동 경험을 살려 인권 등 공익 분야 소송만 11년째 진행하고 있는 베테랑으로, 여러 장애인단체 ‘1층이 있는 삶’ 프로젝트를 함께하고 있다. ‘1층이 있는 삶’은 1층에 있는 공중이용시설 접근 기회를 높이기 위한 프로젝트다. 김 변호사는 “앞으로도 ‘1층이 있는 삶’은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이번 소송은 김 변호사가 주도했지만, 오롯이 혼자 이뤄낸 것이 아니다. 디라이트의 대표인 조원희(사법연수원 30기) 변호사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 장애인 인권 등 공익 목적의 소송을 해왔던 조 대표변호사는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디라이트를 설립했고, 그 취지에 맞춰 매년 수익의 5%를 기부하고 있다.

김지환 조선비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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