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화동 마포삼성아파트 전경. 사진 고성민 기자
서울 도화동 마포삼성아파트 전경. 사진 고성민 기자

1962년 12월 7일. 서울 도화동 ‘마포아파트’ 준공 일주일 만에 연탄가스 사고가 발생했다. 일가족 6명이 중태에 빠졌다. 피해자는 “아파트 연탄 부엌 구조가 잘못된 것 같다”고 했다. 아파트가 생소한 시기였는데, 마포아파트는 가뜩이나 일반적인 연탄아궁이 방식이 아닌 연탄보일러 방식을 채택했다. 국내 아파트 최초였다. 연탄보일러는 연탄아궁이보다 진일보한 기술로 일산화탄소 중독사고 발생률을 줄여 주는데, 당시엔 생소한 탓에 사고 원인으로 꼽혔다. 이 아파트를 지은 대한주택공사는 국내 아파트사(史) 최초로 동물실험에 나섰다. 1992년 발간된 ‘대한주택공사 30년사’는 이렇게 적는다.

“인체 기능과 가장 비슷하다는 기니피그 6마리를 여러 방에 가둬놓고 실험했는데 가스중독은 없었다. 그러나 입주자들이 인간과 기니피그는 다르다고 주장해 인체실험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현장소장 등 직원들은 밤새 돌아다니면서 입주자들의 안부를 점검했고, (중략) 건축부장은 시달리다 못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인체실험을 하겠다 해 술을 마시고 가장 가스가 많이 샌다는 방에 하룻밤 투숙했으나, 이상은 없었다.”

이후 사고 조사에서 원인은 입주자 부족으로 인한 파이프 동파로 밝혀졌다. 입주자가 적어 빈집이 많았고, 추운 날씨에 공가(空家)쪽 파이프가 동파해 가스 배출이 제대로 안 된 것이다. 추가 사고가 발생하지 않아 다행이지 꽤 위험한 실험이었다.


“혁명 한국의 상징” 대내외 과시용 아파트

마포아파트는 1962년 1차로 Y 자형 6개동, 450가구, 1964년 2차로 일(一) 자형 4개동, 192가구가 준공됐다. 1962년은 한국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채 안 됐고, 5·16쿠데타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권력을 장악한 지 1년이 막 지난 시점이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그 해 우리나라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120달러에 불과해 아프리카 가나(190달러)보다 낮았다. 당시 항공사진을 보면 마포아파트는 중세시대 성처럼 홀로 우뚝 솟은 모습이다.

마포아파트는 당시 경제 수준에 비춰 최고급이었다. ‘마실 물도 귀한데 수세식 화장실이 가당키나 하냐’는 반대에도 불구, 수세식 화장실과 입식 부엌을 도입했다. 국내엔 양변기 제조 업체가 없어 일본에서 양변기를 수입했다. 보기 드문 서구식 조경과 Y 자형의 독특한 외형은 상징성을 부여했다. 국내 최초로 아파트 단지 주변에 담장을 설치했고, 최초로 연탄보일러를 탑재했다. 시공은 현대건설과 삼부토건 등이 맡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준공 치사에서 이 아파트가 근대화의 상징이라는 점이 잘 드러난다. 그는 마포아파트를 “혁명 한국의 상징”이라고 표현했다. 박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의식주 생활은 너무나도 비경제적이고 비합리적인 면이 많았다”면서 “현대적 시설을 완전히 갖춘 마포아파트 준공은 생활 혁명을 가져오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본 아파트가 혁명 한국의 상징이 되기를 빌어 마지않는다”고 했다. 그는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에 나서며 마포아파트를 선거 포스터 배경으로 쓰기도 했다.


고가에 인기 없어⋯영화 촬영지로 주목

대한주택공사는 마포아파트를 임대아파트로 공급했다. Y 자형 450가구는 1962년 임대로 공급한 뒤 1967년 분양 전환했고, 일 자형 192가구는 1964년 준공 때부터 분양했다. 일부를 임대아파트로 공급한 이유에 대해 고(故) 장동운 초대 대한주택공사 총재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이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경험을 하도록 하기 위해”라고 했다.

그러나 준공 초기엔 입주율이 절반도 안 될 정도로 인기가 없었다. 대중은 생소한 아파트 건물에 거부감을 느꼈다. 아파트가 귀할 때라 “저렇게 높은 곳에서 어떻게 자느냐”는 걱정이 나왔다. 양변기를 보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볼기짝이 맞닿을 수 없다”는 불만이 나왔다. 또 9~16평형의 좁은 면적인데 두 달치 월세가 대학교 등록금과 맞먹을 정도로 비쌌다.

마포아파트는 연탄가스 두려움이 해소되고 영화 촬영 무대로 등장하며 부촌으로 인기를 끌었다. 영화감독 유현목, 성악가 김자경 등 중상류층이 거주했고 ‘제트부인(1967)’ ‘여자가 고백할 때(1969)’ 등 영화에 나왔다. 1967년엔 약 30만원의 웃돈도 붙었다.

 

1 1989년 11월 11일 촬영한 마포아파트. “세입자 참여없는 재건축은 결사반대”한다는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있다. 조선라이브러리100 2 1965년 3월 12일 촬영한 서울 도화동 마포아파트 전경. 국가기록원 3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에 나선 박정희 후보의 포스터. 사진 우측에 마포아파트가 등장한다. 조선라이브러리100
1 1989년 11월 11일 촬영한 마포아파트. “세입자 참여없는 재건축은 결사반대”한다는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있다. 사진 조선라이브러리100
2 1965년 3월 12일 촬영한 서울 도화동 마포아파트 전경. 사진 국가기록원
3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에 나선 박정희 후보의 포스터. 사진 우측에 마포아파트가 등장한다. 사진 조선라이브러리100

최초 재건축 이어 최초 ‘재재건축’ 유력

마포아파트 주민들은 준공 25년 차인 1987년 국내 최초로 가옥주모임(재건축추진위원회)을 설립해 재건축을 시작했다. 준공연차가 쌓이며 낡은 아파트의 대명사가 됐기 때문이다. 마포아파트는 재건축 첫발을 뗀 지 7년 만인 1994년, 삼성종합건설이 ‘마포삼성아파트’로 재건축했다. 마포삼성아파트는 가구수가 340가구 늘었고, 평수도 기존 9~16평형에서 28~50평형으로 넓어졌다. 국내 최초 재건축 사업이 성공한 순간이었다.

재건축된 마포삼성아파트는 ‘강북 대장주’자리를 꿰찼다. 준공 이듬해인 1995년 기준, 마포삼성아파트 32평형은 시세가 2억4000만원이었다. 강남권 개포경남 33평형과 값이 비슷했고 강북 최고가였다. 재건축으로 집주인과 건설사가 윈윈하며 이후 국내 재건축시장의 큰 장이 열리는 계기가 된다. 마포삼성아파트는 아파트 최초로 무인경비 시스템을 도입해 신문에도 실렸다. 비밀번호를 눌러야 출입문이 열리게 했고, 지하주차장과 놀이터에 폐쇄회로(CC) TV를 설치했다.

마포삼성아파트는 준공 25년이 지나 다시 낡은 아파트가 됐다. 재건축 연한(30년)을 거의 채웠다. 재건축이나 리모델링 조합은 공식 설립되지 않았는데, 국내 최초 ‘재재건축’ 아파트로 마포삼성아파트가 유력하다.

낡은 아파트임에도 지하철 5·6호선·경의중앙선·공항철도 환승역인 공덕역 역세권이라 입지가 좋아 전용면적 84㎡(32평형)는 최고가가 16억5000만원에 달한다. 2월 27일 단지에서 만난 마포삼성아파트 주민 강명자(80)씨는 “어릴 적 도화동 인근 용강동에서 자랐는데, 마포아파트는 당시 동네 최초로 지어진 아파트라 사람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하자’며 일부러 찾아가기도 했다”면서 “마포삼성아파트엔 최근 이사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마포아파트 원주민이 마포삼성아파트에 여전히 살고 있었다”고 했다.

고성민 조선비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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