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가 텔레비전에서 매우 흥미로운 경영사례를 본 적이 있다. 미국의 한 IT 회사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 회사는 오너가 전 사원을 거의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원들 역시 기꺼이 그 통제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회사가 사원들의 모든 필요를 다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거기엔 사적인 부분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회사가 거대한 가족공동체처럼 운영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속에서 사원들은 엄청나게 부자인 아버지를 두어서 부족한 거라곤 하나도 없는 자식들처럼 호사스러워 보였다. 한 가지 문제라면, 반드시 그 부자인 아버지가 요구하는 수준의 헌신을 보여야 한다는 것 정도랄까.

 회사에서 그렇듯 엄청난 투자를 통해 사원들을 가족처럼 결속시키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생산성 향상을 통한 이익의 창출. 바로 그 점이 진짜 가족과 달랐다.

 가족이라면 내가 너에게 얼마를 투자했으니 넌 얼마만큼의 이익을 내놓아야 한다. 아니면 가족이 아니니까 집에서 나가라고 하진 않는다. 그러나 회사라면 얘기가 다르다. 투자한 것 이상의 결실을 거두지 못하는 구성원은 그 조직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시인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집이란 네가 그곳에 가야만 할 때 너를 맞아주는 곳”이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탕자의 귀환이 가능한 곳이 집이다.

 성경에 나오는 탕자는 집과 아버지를 떠나 - 그것도 아직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도 미리 유산을 달라고 졸라서 그걸 챙겨 넣고 - 그 돈을 흥청망청 다 써버린 아들이다. 하지만 그에겐 마지막 순간에 돌아갈 집이 있었다. 그것도 아버지가 신발도 신지 않고 뛰어나와 맞아주는.

 하지만 조직은 그렇지 않다. 탕자의 귀환 같은 것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내가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 할 때조차도 나를 밀어내는 곳’이 조직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 둘을 혼동한다. 그러면서 별생각 없이 ‘가족 같은 조직’ - 가족 같은 조직이 되려면 앞에서 얘기한 IT 회사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올인을 요구해도 조직원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 - 을 강조하곤 한다.

 리더들 중에도 가족 같은 조직에 대해서 착각 내지는 함정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다.

 다음 이야기는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어느 경영자의 사례다. 그 역시 사원들 이 가족 같은 친밀함과 헌신으로 서로 결속하기를 바랐다. 대기업도 아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생산성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자신이 아버지와 같은 버팀목 역할을 하며 중심을 잡아간다면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실제로 아들처럼 자신에게 순종적인 사원들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정신과 용어로 얘기하면, 일종의 역할전이 상태에 놓인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함정이 있었다. 가족과 기업은 처음부터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부모의 일차적인 목표는 자식을 잘 돌보고 양육하는 데 있다. 그러나 기업의 일차적인 목표는 생산성을 높여 더욱 많은 이익을 내는 데 있다. 경영자와 사원들이 아무리 부모 자식처럼 서로를 돌보고 의지한다 해도 이윤을 창출하지 못하면 다 소용없다.

 그런데 그는 전반적인 경기악화로 회사가 침체에 빠졌을 때도 아버지 역할을 포기하지 못했다. 회사의 경영 상태를 개선해야 한다며 그에게 반기를 든 몇몇 사원에게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다. 아버지에게 거역하는 자식은 필요 없었던 것이다.

 딜레마에 빠져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을 때에야 그는 상담 받을 결심을 했다.

 상담 결과, 그는 하루빨리 전이 상태에서 빠져나올 필요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정신과에서는 모든 전이를 일종의 역할혼동으로 보기도 하는데, 그 역시 자신의 역할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상담이 진행되면서 다행히 그는 아버지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사원들 사이에서 좀 더 균형을 잡을 수 있었고 회사도 조금씩 침체 상태에서 벗어났다.

 그 비슷한 함정에 빠진 또 다른 경영자는 사원들이 노조를 만들자 격분했다. 자기가 얼마나 아버지처럼 잘 대해 줬는데 그걸 배신하고 노조를 만들다니, 생각할수록 억장이 무너졌다. 그 결과 그는 노조와의 협상에서 자꾸만 불리한 쪽으로 스스로를 몰아갔다. 냉정하게 현실을 보지 못하고 ‘아버지처럼 대해 줬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하는 한탄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그 역시 한바탕 지독한 홍역을 치르고 나서야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조금씩 알아 갈 수 있었다.



 리더의 역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가족과 조직을 혼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먼저 가족은 조직 중에서도 가장 비합리적인 조직이다. 가족구성원들이 서로에게 거는 기대치가 비현실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우린 가족이 아닌 남에게는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기대치는 갖는다. 그런데 가족에게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때문에 기대치가 큰 만큼 실망도 클 수밖에 없다. 그 실망이 분노와 피해의식으로 변해 아무 여과 장치 없이 터져 나오는 것도 가족의 특징이다. 또 하나, 가족의 목표는 구성원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면서 그들의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반면에 조직은 그 조직이 잘 되기 위해서는 서로의 역할과 기능과 파워가 명확해야 한다. 에리히 프롬의 책 제목처럼, 조직은 ‘소유의 관계(to have)’이고, 가족은 ‘존재의 관계(to be)’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혼동하면 어찌 되겠는가? 가족은 가족대로, 조직은 조직대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물론 조직과 가족이 같은 목표를 지향하는 것도 있다. 다름 아닌 구성원들의 잠재력 개발이다. 그러나 조직은 잠재력을 개발해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만약 그와 같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구성원이 있을 때 조직은 그를 해고할 수 있다.

 가족 역시 구성원들의 잠재력을 개발해 그들이 좀 더 나은 인생을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만약 그 목표에 실패했더라도 가족은 그를 사랑과 이해로 감싸주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못할 때 서로가 입는 상처는 회사에서 해고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회에 나와 가족에게 입은 상처를 조직에 투사하고 전이하는 일이 생겨나기도 한다.

 이쯤에서 리더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해진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조직원들이 조직과 가족의 개념을 혼동하는 일이 없도록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첫 번째, 주고받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즉, 조직이 구성원들에게 바라는 바를 분명하게 이해시키는 것이다. 당연히 그것은 생산성 향상과 이익 창출이다.

 두 번째 방법은, 기대치보다 나은 업적을 이루었을 경우, 그에 대해 어떤 보상을 할 것인지를 명확히 해두는 것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에도 분명한 선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서로 오해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가족 같은 조직 운운하며 역할도 경계도 보상도 두루뭉수리한 조직치고 제대로 굴러가는 곳은 없다. 리더는 바로 그 점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가족은 가족답고 조직은 조직다워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