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연정 스탠퍼드 경영학석사(MBA), 핌코(PIMCO) 미국 회사채 분석 담당 www.inclineim.com
양연정 스탠퍼드 경영학석사(MBA), 핌코(PIMCO) 미국 회사채 분석 담당 www.inclineim.com

 월드컵 열기가 한창이던 6월에도 미국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축구에 관심이 없었다. 미국에서 축구는 미식축구(풋볼)·농구·야구·아이스하키에 이어 간신히 인기 스포츠 톱 5에 이름을 올리는 정도다.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단연 미식축구로, 선수들의 상금 랭킹이나 TV 중계료로 가늠한 시장 규모는 프로풋볼리그(NFL)뿐 아니라 대학 간 풋볼리그조차 축구 시장 규모를 한참 넘어선다. 이번 월드컵에서 미국은 북중미 예선에서 탈락,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월드컵에 대한 관심이 더 적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생중계하는 월드컵 경기들이 있었는데, 멕시코나 브라질 같은 라틴아메리카 지역 국가들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 크게 캘리포니아는 축구에 관해서 만큼은 멕시코의 홈이라는 농담을 할 정도다. 멕시코를 비롯한 히스패닉계 인구 비율이 높은 데다 이들의 축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기 때문인데, 월드컵 중계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 미국 케이블 채널들도 멕시코·아르헨티나·브라질 등 남미 경기만큼은 생중계했다. 멕시코가 독일을 이겼던 일요일 아침에는 아파트를 가득 채운 멕시코 출신 사람들의 함성에 잠이 깨기도 했다. 한국과 멕시코의 경기 역시 폭스TV에서 생중계했는데, 적어도 내 귀에는 해설자가 100% 중립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전반전 멕시코의 페널티킥 성공 순간, 멕시코 출신 해설자의 함성이 유달리 길고 컸기 때문 아닐까.

멕시코 사람은 멕시코 팀을, 한국 사람은 한국 팀을 응원하는 월드컵 풍경은 미국이라는 한 울타리에 모여 살면서 출신 국가의 정서와 문화를 유지하는 ‘다양성(diversity)’의 상징적 모습이다. 다양성은 출신 국가뿐 아니라 성적 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권리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지난 주말 샌프란시스코의 최대 행사는 월드컵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적 소수자들의 퍼레이드인 ‘더 프라이드 퍼레이드(The pride parade)’였다.

올해 더 프라이드 퍼레이드는 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양성애자(Bisexual), 트랜스젠더(Transgender)의 약자인 LGBT를 넘어서 무성애자(Asexual), 남녀한몸(Intersex), 아직 자신의 성 정체성, 성적 지향에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Questioner)을 포함한 ‘LGBTAIQ’의 권리를 옹호하는 행사로 진행됐고, 대략 10만 명이 모인 것으로 추정된다. 샌프란시스코 시빅센터(Civic Center) 앞 도로는 토요일과 일요일 양일간 통제됐고, 거리의 상점들은 성적 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갯빛 현수막과 로고로 장식됐다.

개인의 출신과 언어, 배경을 넘어서 취향에 대한 존중 역시 이곳의 중요한 문화다. 직장 동료들끼리 식사라도 한 번 하려고 하면 음식 주문이 쉽지 않은 이유다. 채식의 경우도 고기·생선·계란·우유 등 유제품까지, 어떤 수준까지 먹느냐로 다양하게 나뉜다.

밀가루의 주성분인 글루텐(gluten)을 먹지 않는 사람, 우유와 치즈 등 유제품만 먹지 않는 사람, 종교적 이유로 특정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도 있다. 기업 행사에 식사가 포함된 경우 식사 제한에 대한 사전 설문은 필수다.

나이나 외모로 사람을 평가해서도 안 된다. 이력서에 생년월일이나 성별, 사진이 포함되지 않으며 인터뷰에서 나이, 출신 국적을 물어볼 수 없다. 현실적으로 대학 졸업 연도 등으로 나이를 간접적으로 판단할 수 있지만 이를 채용 기준에 공식적으로 포함시키거나 내부 논의 때 발언해서는 안 된다. 낮은 직급의 채용에 나이 많은 사람이 응시했다고 불이익을 줄 수 없다. 출신 국가의 경우 제2 언어 사용 여부로 유추할 수 있지만 국적이나 출신 지역을 특정해 물어보는 것은 금지다.


테슬라·구글·아마존 창업자는 이민자 출신

다양성에 대한 존중은 실리콘밸리의 성장에 필수적인 요소다. 세계 각국의 고급 두뇌들을 끌어들여 혁신의 원동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자신의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국적·성별·취향 등 성과를 내는 데 중요하지 않은 요소를 최대한 제거해 공평한 기회를 주고 그 결과로 판단하는 것, 그것이 능력주의(meritocracy)의 기본이다.

물론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 커리어의 후반으로 갈수록 학연과 지연으로 사업을 끌어오는 능력은 중요해진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라도 진입 기회에 공평하려는 노력이 시스템적으로 가장 잘 갖춰진 곳이 아닐까 한다.

구글·애플·페이스북 등 성공한 기업들이 다양성을 옹호하는 문화의 선봉에 선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마운틴 뷰의 구글 본사 식당에서는 영어보다 다른 언어가 더 많이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중국어·스페인어·힌디어·한국어가 많이 들린다. 통계적으로도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 중 70% 이상이 미국 밖에서 태어났다. 캘리포니아 전체 인구의 27%가 외국 출생자(foreign-born)인데, 이는 미국 전체(14%)의 두 배에 가깝다.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의 주요 설립자 중에도 이민자 출신이 많다. ‘테슬라’ ‘스페이스X’의 창업자 일론 머스크(Elon Musk)는 스무 살까지 남아공에 살았고, 구글의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은 러시아 출신이다.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Jeff Bezos)의 성은 베이조스가 네 살 되던 해 그의 어머니가 쿠바 출신 이민자인 마이크 베이조스와 재혼하면서 붙은 것이다. 야후의 제리 양(Jerry Yang)은 중국, 이베이의 피에르 오미다르(Pierre Omidyar)는 프랑스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은 이란 출신이다. 이들이 실리콘밸리의 성공을 바탕으로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해내고 있는 것이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직원들의 다양성을 보장한다. 애플은 팀 쿡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해 많은 직원이 매년 더 프라이드 퍼레이드에 참여하고 있다. 사진 유튜브 캡처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직원들의 다양성을 보장한다. 애플은 팀 쿡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해 많은 직원이 매년 더 프라이드 퍼레이드에 참여하고 있다. 사진 유튜브 캡처

다양성의 가치는 엔지니어뿐 아니라 그동안 백인들의 영역으로 여겨왔던 투자·법률 분야까지 확대되고 있다. 주요 투자 회사와 로펌들은 적극적으로 여성과 소수 인종을 고용하려 하는데, 이런 노력이 그들의 주요 고객인 대형 테크 회사들과 비즈니스 관계를 맺는 데 실질적으로 도움되기 때문이다. 제2 외국어를 할 줄 알고 국제적인 배경과 지식을 가진 외국 출신의 인재들이 같은 이유로 대접받는다.

얼마 전 한 모임에서 구글의 법률 분야 총괄 임원(Chief Legal Officer)인 데이비드 드러몬드(David Drummond)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며, 구글의 첫 번째 변호사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다양성의 가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다양성과 포용(diversity and inclusion)은 내가 17년 동안 구글 내부에 심으려고 노력한 핵심 가치다. 기술은 혁신이고, 혁신은 다양성과 포용에서 나온다. 표면적인 구호만으로는 부족하다. 객관적 지표, 지속적인 성과가 중요하다.”

구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구글러(googlers)’라 부른다. 구글러들은 다양한 스몰 그룹에 속해 있다. 스몰 그룹은 아시아·라티노(Latino) 등 출신 국적으로 나뉘기도 하는데, 이들 중에는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그룹인 ‘그레이글러(greyglers)’, 강아지를 키우는 ‘두글러(doogler)’도 있다. 각자의 다양성을 펀(fun)한 방식으로 드러내고 즐기는 것, 그것이 다양성의 핵심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