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연정 스탠퍼드 경영학석사(MBA), 핌코(PIMCO) 미국 회사채 분석 담당 www.inclineim.com
양연정
스탠퍼드 경영학석사(MBA), 핌코(PIMCO) 미국 회사채 분석 담당 www.inclineim.com

10월 6일 토요일 아침,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브렛 캐버너(Brett Kavanaugh) 대법관이 취임했다. 성폭행 의혹으로 고전하던 캐버너 대법관의 인준안은 상원에서 찬성 50표, 반대 48표로 인준됐다. 표결은 호명 투표 방식으로 상원 의원들의 이름이 불리면 기립해 찬성 또는 반대를 외치는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표결이 진행되는 동안 방청석 곳곳에서 고성이 쏟아졌으며,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여러 차례 질서 유지를 당부하는 모습이 전파를 탔다.

캐버너 대법관은 1982년 한 파티에서 크리스틴 포드(Christine Ford) 현 팰로앨토 대학교수를 성폭행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캐버너 대법관은 상원 청문회와는 별도로 포드 교수와 개별 청문회에서 각각 증언했으며 미 연방수사국(FBI)의 수사 대상이 되기도 했다. 상원 청문회와 FBI 수사, 개별 의원들의 움직임이 실시간으로 보도되며, 미국 내 여론은 찬성과 반대로 뜨겁게 대립했다.

이곳 샌프란시스코의 분위기는 당연히 반(反)캐버너였다. 진보적인 색채가 워낙 강한 지역이라, 캐버너를 옹호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평소 정치에 대한 관심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사무실에서도 인사청문회를 실시간으로 시청하는 모습이 보였고, 여성 단체와 학계에서는 반대 성명을 앞다퉈 발표했다. 청문회를 시청하는 사무실에는 캐버너가 발언할 때마다 비난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가득했다. 지난 한 주, 실리콘밸리는 캐버너를 비난하고 그를 옹호하는 트럼프 대통령을 조롱하는 내용이 미디어를 장악했고, 수십 년 지난 성추행 사건을 폭로하는 또 다른 미투(Me Too)가 줄을 이었다.

1주일 전 토요일(9월 29일) NBC의 인기 코미디 쇼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NL)’에서는 배우 맷 데이먼이 캐버너 대법관을 풍자했다. 맷 데이먼은 캐버너 대법관이 화난 얼굴로 맥주를 마시며 “내가 대법원에 갈 때까지 기다리라”며 호통을 치는 연기를 선보였다. 캐버너가 청문회에서 “그날의 일이 기억나느냐”는 질문에, 맥주를 많이 마셔 기억나지 않는다며 “나는 맥주를 좋아한다(I like beer)”고 반복 발언한 순간을 풍자한 것이다. 캐버너는 청문회에서 일관되게 자신은 해당 사건은 물론 포드 교수가 누구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법관으로서 자신의 인생이 매도당하고 있다며 눈물을 보였다.

반면 포드 교수는 인사청문회에서 “가해자를 캐버너로 확신하느냐”는 질문에 “100% 확신한다”고 답했다. 그는 35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캐버너 같은 사람이 대법관이 되는 일은 막아야겠다는 신념에서 용기를 냈다고 했다. 그러나 인준안 표결로 그녀의 용기는 빛을 보지 못했다.

캐버너 대법관은 1981년 이후 최소 표차로 상원 인준을 통과한 기록을 세웠다. 공화당 51석, 민주당 49석인 미 상원에서 찬성 결정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두 명의 공화당 여성 의원이었다. 메인(Maine)주의 수잔 콜린스(Susan Collins)와 알래스카의 리사 머코스키(Lisa Murkowski) 의원이 그들이다. 만약 이들이 기존 입장대로 반대표를 던졌다면 공화당에서는 두 명의 이탈표가 생기는 셈이었다. 여기에 공화당의 스티브 데인즈(Steve Daines) 의원이 딸의 결혼식으로 표결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면서, 한때 캐버너의 인준이 불투명해 보이기도 했다. 민주당 전원이 반대표를 던진다면 찬성 48, 반대 51이 됐을 것이다.

분위기는 이번 주 들어 바뀌었다. 애초 반대 의사를 밝혔던 공화당 수잔 콜린스 의원은 “청문회를 지켜본 결과 입장을 바꾸기로 했다”며 찬성으로 선회했다. 여기에 조 맨친(Joe Manchin) 웨스트버지니아 의원이 민주당에서 유일하게 찬성표를 던지면서 사실상 인준이 예상됐다. 청문회 초기 반대 의사를 밝혔던 또 다른 여성 의원인 공화당 머코스키 의원은 결국 표결에 기권했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끝까지 반대한다면 재선은 꿈도 꾸지 마라’고 경고했다는 후문이다.

캐버너 대법관의 합류로 미 대법원은 보수 성향 5명, 진보 성향 4명으로 무게추가 보수 성향으로 기울게 됐다. 캐버너 대법관은 전임인 중도 성향의 앤서니 케네디(Anthony Kennedy) 대법관보다 보수 성향이 짙은 인물로 평가된다. 이로써 앞으로 미국 사회의 주요 쟁점인 낙태, 이민, 총기 소유, 성소수자 인권, 건강 보험 등에 있어 보수적 결정이 예상된다. 미 대법관은 종신직이며, 캐버너 대법관은 올해 53세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4월 닐 고서치(Neil Gorsuch) 대법관에 이어 50대 보수 성향의 대법관을 연달아 임명하며, 대법원의 ‘보수 우위’ 구도를 장기간 유지하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CNN은 “이번 표결로 대법원의 보수 우위가 한 세기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진보 성향으로 분류된 4명의 판사 중 2명이 80대인 점도 진보 진영에 불리한 상황이다.


9일(현지시각) 미 워싱턴 D.C.에 위치한 대법원 앞에서 시위자들이 캐버너 대법관 반대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9일(현지시각) 미 워싱턴 D.C.에 위치한 대법원 앞에서 시위자들이 캐버너 대법관 반대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캐버너 사태, 최종 승자는 트럼프

이번 표결의 최종 승자는 트럼프 대통령인 듯하다. 캐버너의 성폭행 여론이 최악인 순간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임명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민주당이 한 법관의 인생에 끔찍한 공격을 했으며, 크리스틴 포드는 엉뚱한 사람을 지목했다”며 민주당과 피해 여성을 동시에 공격했다. 트럼프는 인준안이 통과된 토요일 아침, “Big day of America”라고 트윗을 남기며 “대법관 인준안 통과는 미국의 승리”라고 자축했다.

캐버너 인준이 20일 앞(11월 6일)으로 다가온 중간선거에 미칠 파장도 주목된다. 미국의 중간선거는 대통령의 4년 임기 중간에 시행되며 연방 하원의원 전원과 상원의원 중 3분의 1을 새로 뽑는다. 이번 선거에서는 연방 하원의원 435석 전체와 상원 중 35석, 주지사를 제외한 다수의 행정직이 선출된다. 현재 선거는 하원에서는 민주당이, 상원에서는 공화당이 우세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은 공화당에 불리하지만, 50년 이내 최저치인 실업률과 순항하는 경제는 유리한 요소다.

현재 상‧하원을 장악하고 있는 공화당이 양원 중 한 곳에서라도 다수당 지위를 잃는다면 이민, 총기 문제 등 주요 정책 추진에 제동이 걸릴 것이다. 러시아 스캔들(러시아의 2016년 미 대선 개입 의혹)이나 그 밖의 트럼프 대통령 관련 의혹에 대한 공세도 강화될 것이다. 반면 공화당이 승리한다면, 트럼프 대통령은 성공적인 중간평가를 받은 셈이 돼, 재선 가능성이 한층 커지게 된다.

민주당은 피해 여성을 대놓고 조롱한 트럼프 대통령에게 여성들이 등을 돌릴 것을 기대하고 있다. 공화당은 반대로 캐버너 사태로 지지층이 결집했다고 보고 선거운동에 열을 올릴 태세다. 미치 맥코널(Mitchelle McConnell) 상원 원내 대표는 “반캐버너 운동을 통해 더 많은 공화당 지지층이 결집, 투표장으로 향할 것”이라 예상했다.

캐버너 사태는 과연 어느 쪽에 더 유리할 것인까. 물론 공화당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반대를 뚫고 두 명의 젊은 보수 성향 대법관 임명에 성공했다. 그 비결은 숨은 지지층에 있을 것이다. 2년 전 대선 때와 마찬가지다. 진보의 목소리는 컸지만 결과는 보수의 승리였다. 내 주변에도 ‘샤이 트럼프’ ‘샤이 캐버너’들이 꽤 많다. 성폭행 사건을 놓고 대놓고 캐버너를 지지하지는 못하지만, “30년도 지난 일을 인제 와서…”라는 생각인 것이다. 막판에 찬성으로 선회한 공화당 의원들도 민심의 향방을 따랐을 것이다. 선거를 20일 남겨 둔 지금, 누구보다 민심과 당의 선거 지원에 민감한 그들이다.

편 가르기와 지지층 결집. 2년 전에 성공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공식이다. 통합과 평화보다는 못하지만 검증된 선거 전략이다. 맥코널 원내 대표의 말대로 캐버너 사태는 공화당에는 ‘훌륭한 정치적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