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 이론상 가계는 자금의 공급자 역할을, 기업은 수요자 역할을 한다. 경기가 좋을 때 소득이 증대된 가계는 저축을 늘리거나 대출을 갚아 자금 공급을 늘리고, 기업은 투자를 위해 자금 수요를 늘린다. 반대로 불경기에는 가계의 자금 공급과 기업의 자금 수요가 함께 줄어든다. 따라서 가계·기업대출에서 가계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경기가 좋을 때 줄어드는 것이 이론상으로는 맞다.

하지만 한국의 자금 흐름은 이와 달랐다. 필자가 한국은행의 재정지원을 받아 수행했던 연구에서, 미국의 가계대출 비중은 앞서 언급한 대로 교과서적인 반응을 보인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경기가 좋을 때 가계대출 비중이 오히려 늘어났다. 경기가 좋을 때, 주식이나 부동산 등 비생산적 투자를 위한 가계대출의 증가가 생산적인 투자를 위한 기업대출 증가를 압도했다는 의미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한국의 전체 기업대출에서 중소기업의 대출을 구분해 보았다. 경기 좋을 때, 가계대출 총액이 역시 압도적으로 증가하는 가운데, 전체 기업대출 총액은 약간 증가했다. 하지만 중소기업대출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중소기업으로 가야 할 자금이 가계로 흘러 들어갔다는 얘기다. 결국 이는 역동적인 가계대출이 중소기업의 성장 기회를 박탈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경기가 좋을 때 대기업들은 그럭저럭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지만, 중소기업들은 자본시장에서 외면당한 채 투자 기회를 빼앗긴 것이다. 이쯤 되면 ‘지나치게 역동적인’ 가계대출과 그것을 통한 자산투자는 한국만의 ‘망국병’이라고 불릴 만하다.


단순한 가계대출 억제책은 실효성 떨어져

이러한 망국병을 LTV(주택담보대출비율)와 DTI(총부채상환비율) 규제로 치료하겠다는 정부의 접근법은 투박한 우격다짐으로 비친다. 물론 강력한 LTV와 DTI 규제는 전반적인 가계대출 수요를 억제할 수 있다. 그러나 공급 측면인 은행의 투자의사 결정을 생각해 보자. 강력한 LTV와 DTI 규제는 가계대출의 위험도를 낮춰, 가계대출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규제가 강화될수록, 은행들은 기업대출보다는 가계대출 비중을 늘리려고 할 것이다.

특히, 강화된 규제로 일반 가계대출이 어려워지면 은행들 사이에서는 자산가 모시기 경쟁이 심화된다. 은행들은 극소수 PB센터 고객들을 위한 새로운 투자 상품을 개발하고, 그들을 찾아 대출을 권유한다. 결국 가계대출은 더욱 늘어나고, 중소기업들은 자본시장에서 더욱 소외될 수 있다.

은행 PB센터들은 아파트를 비롯한 투자처와 관련 절세 방안 등을 제시하며, 대출을 ‘권유’하지만, 정작 기업대출 부서는 대출신청서를 ‘심사’한다. 실효성 있는 규제인지 의문이다.

정책적 시야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단순 가계대출 수요 억제책보다는 가계대출을 중소기업대출로 유도하는 유연한 방향 전환책을 생각해보자. 가령, LTV와 DTI 규제를 강화하는 대신, 가계들이 대출을 받을 때, 중소기업 발전기금 채권을 일정액 구입하도록 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아파트 등을 구입할 때 국민주택채권을 사도록 하는 현행 제도와 비슷하다. 그러면 가계대출 수요도 억제할 수 있고, 동시에 은행들의 가계대출 유인도 불필요하게 자극하지 않는다. 중소기업 발전기금 채권의 일부를 은행들의 중소기업대출 충당금으로 활용해 은행들의 자본규제 부담을 줄이고 장기적으로 중소기업대출을 진작시키는 재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 왜곡된 자금흐름을 억제하기보다는 그 방향만 바로잡자는 얘기다.

가계대출이 망국병이라고 불리는 것은 너무 커져버린 대출 규모과 그로 인한 사회적 위험 때문만이 아니다. 중소기업의 성장기회가 박탈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시장과 대립하는 투박한 처방이 아닌, 시장을 이용하는 유연한 처방이 요구된다.

더 나아가 중소기업 발전기금 채권을 이용해 은행들로 하여금 중소기업대출 충당금을 쌓게 하는 등, 중소기업대출을 진작시키는 재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