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용진 카네기멜런대 컴퓨터공학·응용수학, 뱅크오브아메리카 메릴린치 파생상품팀 초단타 퀀트 트레이더, ‘인공지능 투자가 퀀트’ 저자
권용진
카네기멜런대 컴퓨터공학·응용수학, 뱅크오브아메리카 메릴린치 파생상품팀 초단타 퀀트 트레이더, ‘인공지능 투자가 퀀트’ 저자

최근 산업계에서 많이 들리는 용어 중 하나가 ‘밀레니얼 세대’와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다. 밀레니얼 세대는 1981년부터 200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모바일이나 인터넷 환경에 친숙한 사람을 일컫는 용어다. 최근 밀레니얼의 특징을 전문적으로 다룬 ‘90년생이 온다’라는 책까지 출판될 정도로 밀레니얼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많다. 밀레니얼은 다양한 특징이 있지만, 직장생활보다는 취미활동 등 사생활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개인주의적인 성향도 강하게 드러난다.

밀레니얼의 이런 변화를 보면서 기성세대에서도 비슷한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직장과 조직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며 성공을 위해 달려왔던 기성세대들이 가정생활과 개인의 사적 영역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런 변화 때문에 워크 라이프 밸런스, 즉 워라밸 문화가 우리 생활 속으로 들어왔다. 워라밸 문화가 확산하면서 우리 사회에 주 52시간 근무제도가 도입됐고 다양한 휴가제도, 야근 축소 등 여러 가지 사회적, 제도적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 이런 변화에 따라 기업과 노동자 모두 과도기를 겪고 있는 셈이다.

특히 워라밸을 논의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선진국의 근무 환경이나 제도를 벤치마크하거나 비교 분석하는 것이다. 미국 IT 벤처기업들이 몰려있는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사무실에 나오지 않고 재택 등 원격 상태에서 근무하거나 자유롭게 휴가 일정과 출퇴근 시간을 짜는 것을 부러워하며 ‘꿈의 직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런 제도 때문에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많은 부작용을 겪고 있다. 재택근무가 명목뿐인 제도가 되는가 하면 기업의 실상과 맞지 않는 부분 때문에 오히려 더 업무가 많아지고 이전보다 근무 환경이 나빠진 경우도 있다. 근무 환경은 좋아졌지만 기업 생산성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기업이 존폐 위기에 있는 경우도 있다. 국내 기업도 해외 기업의 제도를 무조건 벤치마크했다가 심각한 부작용을 겪기도 한다.

이번 칼럼에서는 필자가 겪은 미국 근무 환경의 특징을 소개하고 이를 국내 기업들이 그대로 벤치마크했을 경우 왜 문제가 발생하는지를 짚어보겠다.

먼저 기업들이 하는 가장 큰 실수가 서양권, 특히 미국과 국내의 고용 환경 차이를 인지하지 않는 것이다. 지난 칼럼에서도 몇 번 언급했지만, 미국은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직장인이 ‘앳 윌(At will)’ 기반의 계약직이다. 앳 윌은 기업과 노동자 모두 언제든지 서로 계약 관계를 끊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당연히 노동자에게 더 불리할 수 있는 제도이기 때문에 차별이나 불합리한 이유에 대한 해고는 제도적으로 엄격하게 막고 있고, 이에 대한 법적 분쟁도 많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은 본인의 성과에 대해 많이 분석하고 이를 주장하는 데 익숙하다. 마찬가지로 기업에서도 개별 직원에 대한 평가나 성과를 철저하게 체크해야 한다. 성과가 미흡하면 계약 관계를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단순히 체크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정량화하는 데 굉장히 익숙하다. 글로벌 기업인 구글, 아마존, 골드만삭스, 포드, 스타벅스 등은 이런 성과 평가 시스템을 자체적으로 개발하거나 정교화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렇게 정량화한 성과 평가와 목표 배당은 개인별로 세세하게 할당된다. 이 때문에 기업 문화 자체가 기업 전체의 목표를 공유하기보다 개개인에게 할당된 작은 목표들에 더 익숙하고, 이를 해결하면 개인의 역할을 마친 것으로 생각한다. 개인이 역할을 충분히 해내면 성공적으로 월급을 받는 것이고, 이를 초과 달성하면 상여금을, 미달하면 해고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밀레니얼 세대에게 굉장히 익숙하다. 게임이나 모바일 문화에서 ‘퀘스트(해결해야 할 과제)’를 배당받고 이를 해결하면 보상받는 방식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개인별로 부여받는 과제에 따라서 직무나 일하는 방식, 보상 모두 천차만별이다. 어떤 사람은 주기적인 일을 처리하면서 꾸준한 보상을 추구하고, 어떤 사람은 도전적인 일을 하면서 더 큰 보상을 추구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같은 근무 조건을 강요하기보다 유연한 근무 조건을 추구하는 쪽으로 사회가 발전했고, 워라밸이 통용되기 어렵지 않으며, 밀레니얼이 상대적으로 잘 적응하는 문화 환경이 나타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문화가 무조건 좋다는 것은 아니다. 개인별 일하는 방식이 다르고, 기업이 추구하는 목표가 충분히 공유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빠르게 성장해야 하는 기업은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이런 부분 때문에 미국 기업들이 중국과 같은 아시아권 기업에 성장성에서 밀린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사무실의 야근 장면.
사무실의 야근 장면.

공동체 중심 문화 고려해 워라밸 도입해야

이와 같은 배경을 이해한다면 국내에서 서양권 문화를 직접 도입했을 때의 문제점을 알 수 있다. 미국의 개인주의적인 방식과 달리 한국은 공동체 중심의 문화다. 아무리 시대가 변화하더라도 문화권이 주는 근본적인 영향이 있다. 공동체 중심의 문화 때문에 기업 자체를 성장시키는 데 구성원들이 목표를 공유하는 경우가 많고, 성과 또한 개인별로 주어지기보다는 기업 전체의 성과에 얼마나 기여했는가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개개인의 평가, 과제 등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환경이고 미달한 사람에게 나쁜 평가를 하거나 해고하기도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유연한 근무라든가 워라밸 등을 중요시하는 문화가 도입됐을 때, 기업의 일하는 분위기 자체는 좋아질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생산성이 떨어져 억지로 추가 근무를 해야 하는 악순환이 발생하는 것이다. 또 기업의 공동 목표 달성이 모든 개인 직원들의 보상과 연결돼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개인별로 차등해서 업무 성과를 철저하게 평가하기 어렵다.

결국 이런 배경을 먼저 이해하고 워라밸 문화를 도입하고 밀레니얼의 진입에 대비하는 것이 기업의 숙제일 것이다. 단순히 미국이나 유럽식 기업 문화를 가져오고 비교하기보다는 국내 사정에 맞춰서 정량화한 성과 평가 기준을 만들거나, 수정된 워라밸 기업 문화와 제도를 도입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