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설명 영국 의회는 3월 27일(이하 현지시각) 의회 주도로 마련한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 8가지 대안을 모두 부결시켰다. 이틀 후인 29일 테리사 메이 총리가 유럽연합(EU) 측과 협상해 마련한 합의안을 투표에 부쳤으나 의회는 또 부결시켰다. 이어 4월 1일에도 네 가지 브렉시트 방안을 놓고 투표를 실시했지만 부결됐다. 투표가 가결됐다면 차기 유럽의회 선거가 실시되기 전날인 5월 22일 브렉시트가 이뤄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투표가 부결되면서 영국은 두 가지 방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4월 12일 아무런 합의 없이 EU에서 탈퇴하는 ‘노딜(no deal) 브렉시트’ 또는 5월 23일 유럽의회 선거에 참여하는 것을 전제로 ‘무한정 연기’하는 방안이다. 후자가 현실화하면 브렉시트가 결국 흐지부지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메이 총리는 2일 노딜 브렉시트를 막기 위해 브렉시트 결정 시한 연기를 EU에 요청한 데 이어 3일 제1 야당인 노동당의 제러미 코빈 대표와 대화를 이어 가고 있다.
아나톨 칼레츠키(Anatole Kaletsky) 하버드 케네디스쿨 경제학 석사, 타임·파이낸셜타임스 경제 칼럼니스트, ‘자본주의 4.0’ 저자
아나톨 칼레츠키(Anatole Kaletsky)
하버드 케네디스쿨 경제학 석사, 타임·파이낸셜타임스 경제 칼럼니스트, ‘자본주의 4.0’ 저자

영국과 EU의 브렉시트 최종 협상 시한이 미뤄질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EU는 미국에 이은 제2의 교역 상대국인 영국과 ① 2008년식 재앙을 피할 수 있게 됐다. 현 상황은 일단 영국과 전체 유럽에 대한 경제·정치적 전망을 개선하고 있다. 영국 내각이 테리사 메이 총리를 퇴진시킬 가능성 등은 얼핏 위기처럼 보이지만, 영국과 EU의 관계를 재협상할 수 있는 기간이 4월 12일에서 그 이후로 연장되면 정치적 상황은 안정될 것이 확실하다. 브렉시트 결정 시한 연장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뤄질지는 아직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방식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점은 노딜 브렉시트 위협이 제거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세계 경제의 통합에 거스르는 자유로운 국민 주권 약속이 망상으로 드러날 경우,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는 ‘임시적 전환(영국의 EU 관세동맹 잔류)’일 것이다. 브렉시트의 한 가지 형태로 논의된 ② EU와 노르웨이의 협정은 사실 1990년대 초반 EU 단일 시장이 만들어졌을 때 1~2년간만 지속되도록 고안된 것이지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영국 유권자는 노르웨이식 합의가 많은 경제적 비용과 국가 주권의 감소를 수반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받아들여진다면 브렉시트에 대한 열정은 사라질 것이다. 재선을 노리는 정치인도 대부분 2016년 6월 브렉시트 국민투표의 동기가 됐던 경제·사회·지역 정책 등 국내 문제에 다시 관심을 집중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어떤 식으로든 향후 영국이 EU에 잔류한다는 결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영국에서 일어나는 일보다 세계에 더 중요한 것은 브렉시트 연기 혹은 취소가 나머지 EU 국가의 정치·경제 상황에 과연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독일에 이어 유럽 2위 경제 규모인 영국과 무역 붕괴 위험을 제거하면 모든 EU 국가 기업의 신뢰도가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EU는 4월 12일 마감 시한을 두는 ‘벼랑 끝 전술’을 활용했다. 영국이 새로운 협상 전략을 결정하고 추가 연장을 신청할 때 충돌을 피하려면 유럽의회 선거에 참여해야 하므로 그 혜택(기업 신뢰도 상승)이 바로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 벼랑 끝 전술이 반복될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기업은 이러한 외교적 장애물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그리고 브렉시트 결정 시한 연장에 따른 새로운 협상이 무역협정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을 때까지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3월 29일(현지시각) 영국에서 ‘노딜 브렉시트’ 지지 시위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 사진 블룸버그
3월 29일(현지시각) 영국에서 ‘노딜 브렉시트’ 지지 시위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 사진 블룸버그

독일·프랑스·이탈리아 불확실성 직격탄

이 같은 불확실성은 독일·프랑스·이탈리아에 특히 피해를 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국가의 국내 상황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심각한 이유는 각각 다르다. 우선 독일은 유럽과 영국뿐 아니라 중국과 미국 등지의 자동차 수요 감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것이 ③ 새로운 배출 규제로 인한 일시적 상황인지 아니면 화석연료와 자동차 소유에 대한 태도 변화에 따른 구조적 변화인지는 아무도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독일의 가장 중요한 산업이 앞으로 1~2년, 어쩌면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불확실성으로 인해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점이다. 또 프랑스 기업은 영국보다 더 심각한 ④ 정치적 위기 때문에 타격을 받고 있다. 이탈리아는 이미 신용 경색과 유로존 규정에 따른 재정 긴축 등으로 경기침체에 빠져 있다.

영국이 브렉시트를 철회한다면, 이는 유럽 전역의 포퓰리즘(대중 영합주의) 정당에 ‘골칫거리’를 안겨줄 것이다. 2016년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프랑스·이탈리아·독일 등에서 유로화 해체나 EU 권력 약화를 주장하는 포퓰리즘적 언사에 기름을 부었던 것처럼, 브렉시트의 후퇴는 정반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이에 따라 5월 유럽의회 선거가 반(反)EU 극우정당들의 기대(EU 해체)보다는 작은 변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

지난해 이탈리아·오스트리아·네덜란드·스웨덴·슬로베니아 총선에서 약진했던 반EU 극우정당은 EU의 방향성에 대해 강한 경계심을 품고 있다. EU가 공동 시장, 국제 교역, 경쟁과 같은 경제적 통합보다 정치적 통합으로 향하고 있다고 우려하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마테오 살비니 부총리와 같은 포퓰리즘적 성향의 지도자들은 EU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중단하는 대신 EU의 구체적인 정책(규정)에 공격의 초점을 맞춰 작은 변화를 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살비니는 EU에 재정 및 이민 규정을 개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처럼 브렉시트 협상의 마지막 단계에서 유럽 각국 정부는 EU 규정에 반발할 수도 있다.

사실 영국이 브렉시트에 대한 EU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는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애초 메이 총리는 브렉시트 데드라인인 3월 29일이 불과 1주일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벨기에 브뤼셀로 건너가 EU 정상들에게 6월 말까지 탈퇴 시한을 연장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앞서 1월 15일 영국 의회는 메이 총리가 EU 집행부와 논의한 브렉시트 안건 승인 투표를 했는데 재적 의원 634명 중 432명이 반대 의사를 표했다. 이는 영국 의회 역사상 집권당이 200표 차 넘는 패배를 기록한 첫 번째 사례였다. 만약 EU 정상들이 3월 21일 정상회담에서 데드라인 기한 일부 연장을 결정하지 않았다면, 영국은 노딜 브렉시트로 내몰렸을 것이다. 노딜 브렉시트는 현 데드라인인 4월 12일까지는 현실화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끝없는 협상’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Tip

2008년 10월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EU와 유럽중앙은행(ECB)은 구제금융 패키지를 발표했다. 그리스·아일랜드·스페인이 국가 부도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EU는 각국으로부터 재정 분담금을 걷었는데 영국이 독일 다음으로 많았다. 그러자 영국에서는 분담금 규모에 비해 돌려받는 혜택이 적다는 불만이 나왔다. 이어 일자리가 많은 영국으로의 취업자와 난민 유입도 증가했다. 이에 따라 영국에서는 EU를 탈퇴하자는 목소리가 거세졌다. 2015년 5월 데이비드 캐머런 전 영국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공약으로 내걸었던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2016년 6월 실시됐다.

노르웨이는 국민투표를 거쳐 EU에 가입하지 않았다. 대신 스위스·아이슬란드·리히텐슈타인 등 비(非)EU 4개국으로 구성된 유럽자유무역(EFTA)에 가입했다. 스위스를 제외한 EFTA 3개국은 EU와 유럽경제지역(EEA)을 맺고 EU 단일 시장에 대한 완전한 접근권(무관세)을 확보했다. EFTA 3개국은 EU 규제를 대부분 따르고, 재정 분담금도 낸다. 자유로운 이민도 보장된다. 일각에서는 영국이 브렉시트 실시 후 EFTA에 가입하는 시나리오가 거론되지만, 이는 이민 제한과 재정 분담금 감축 등 영국이 바라는 브렉시트의 주된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EU는 2015년 독일 자동차 제조사 폴크스바겐의 배출가스 조작 사건 이후 새로운 배출가스 검사 방식을 도입해 지난해 9월부터 시행했다. 새로운 검사 방식은 ‘세계표준자동차시험방식(WLTP)’이다. 이 방식은 차량이 실제로 운행하는 중에 배출하는 오염물질을 측정한다. 종전에는 이론적인 운행 데이터값을 활용해 실험실에서 측정했는데, 이 방식은 실제 배출량보다 적게 측정되거나 제조사가 배출량을 속이기 쉽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WLTP는 종전보다 기준이 엄격해진 것이다. 이 기준에 맞추려면 더 많은 친환경 기술 비용을 써야 하기 때문에 제조사에 많은 부담이 된다.

프랑스는 이른바 ‘노란조끼’ 시위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 시위는 2018년 11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유류세 인상안 발표에 반대하면서 시작된 후 점차 반정부 시위로 확산됐다. 20주째 이어지고 있는 시위에서 참가자들은 서민경제 개선과 직접 민주주의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