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당시 삼성물산 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찬성표를 던진 것과 관련해 많은 논란이 제기됐다. 국민연금이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고 이재용 부회장의 삼성전자 승계 작업을 도왔다는 이유로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을 비롯한 많은 관련자가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다. 그 쓰라린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국민연금은 고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재신임 동의안을 부결시킴으로써 개별 기업의 사안에 직접 관여했다.

전혀 다른 두 사건의 공통점은 정치 권력의 의중이 국민연금을 통해 개별 기업에 관철됐다는 것이다. 이는 국민연금 개입의 정당성 논란을 차치하더라도, 국민연금의 공적인 특성을 감안하면 굉장히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주식회사의 주인은 주주다. 주주들은 인수·합병이나 유·무상 증자, 배당 등 자신의 지분가치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안건들 이외에 생산관리·인사관리·투자관리 등 세부적인 경영 의사 결정권은 전문 경영인에게 위임한다.

대신 주주들은 ‘주인-대리인의 문제’를 최소화하고자, 고위 경영진의 신임과 재신임을 비롯한 경영진 구성 권한을 갖는다. 결국 주주들은 세부 경영 의사 결정권을 위임하는 반면, 지분가치 변동을 초래하는 안건에 대한 의사 결정 권한과 경영진 구성에 관한 권한은 직접 행사한다.

특히 과거 투자 목적으로 주식을 취득한 기관투자가들은 주주권 행사 자체에 소극적이었으나, 최근에는 ‘스튜어드십 코드(수탁자 책임 원칙)’라는 명분 아래, 지분가치 변동을 초래하는 안건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의사 결정에 참여한다.

국민연금 측은 대한항공 주주총회를 앞두고서는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지배주주 일가에 대한 재신임 제한에 나설 것이라고 했고, 주주총회에서 재신임 동의안을 부결시킨 후에는 스튜어드십 코드에 따른 결정이었다고 했다. 혹자는 지분대결이라는 가장 시장 친화적인 방식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오너 일가에 제재를 가한 경우라 포장할지 모르겠으나, 국민연금은 공공기관이라는 점에서 공적인 권력으로 개인과 대립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또한 오너 일가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킴으로써 국민연금이 보유한 주식 가치를 얼마나 떨어뜨렸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 재신임 동의안이 통과될 경우와 부결될 경우에 각각 국민연금이 보유한 주식 가치가 어떻게 될지에 대한 사전적 분석이 없었다면 국민연금을 납부한 국민에 대한 기만적 변명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절차적 정당성이다. 앞서 언급한 국민연금이 자의적으로 개입한 두 사건 모두에서 의결권 행사 여부는 국민연금 내부의 소위 ‘위원회’에서 결정했다. 국민연금 측은 객관성을 보장하기 위해 전담 위원회를 두고 여러 심의를 거쳐 결정한다고 변명할지 모르나, 국민연금이 자의적으로 판단한 것에 형식적 정당성을 제공할 뿐이다.

객관성은 동일 사건에 대해서는 같은 정보를 가진 누가 판단하든 동일한 결론이 도출돼야 함을 의미한다. 반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인수∙합병의 경우에는 의결권 행사 여부를 결정할 투자위원회 소집 2일 전 인사발령을 통해 위원들까지 바꿨다. 이후 쓰라린 경험을 토대로 국민연금은 수탁자책임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 의결권 행사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지만, 이름만 바뀌었을 뿐 누가 위원이 돼도 같은 판단에 도달할 만큼 객관성을 확보했는지 의문이다.

이렇게 객관성 담보 없이, 위원회만 거치면 된다는 생각은 너무 쉽게 공권력 남용으로 이어진다. 과거 5공화국에서 국제그룹을 공중분해시켰던 것과 같은 사태가 국민연금을 통해 반복될 수도 있고, 국민연금을 위협 수단으로 해서 유력 정치인들 캠프에서 불법 정치자금 모집에 나설 수도 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공적인 권력은 어떠한 공익을 목적으로 실행된다고 하더라도, 객관성 확보가 우선이다. 국민연금도 동일한 사안에 대해서는 누가 판단하더라도 같은 판단에 도달하게 되는 시스템을 먼저 마련하고 난 후, 진정한 스튜어드십 코드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