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훈 한국외국어대 졸업, 한화 갤러리아 상품총괄본부 기획팀
장지훈
한국외국어대 졸업, 한화 갤러리아 상품총괄본부 기획팀

2000년대 후반 삼성전자의 전략 기조를 나타내는 말은 ‘스마트 앤 그린’이었다. 그리고 삼성의 비메모리 분야를 대표하는 모바일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스마트폰의 두뇌 역할을 하는 시스템 반도체) 브랜드 엑시노스는 이 ‘스마트 앤 그린’의 그리스어를 합쳐 탄생한 이름이다.

초창기 아이폰의 AP를 만들던 당시 삼성전자 시스템 LSI 사업부의 기술력과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속해온 투자와 연구원들의 노력 속에 엑시노스는 이제 세계적인 수준의 모바일 AP로 성장하였고, 최근 IT 시장에 가장 큰 불안 요소인 미·중 무역갈등, 특히 미국의 화웨이 제재 속 불투명한 시장 환경에서도 반사이익을 기대하게 만드는 중요 요소 중 한 가지로 이야기되고 있다.

그 당시 개별 산업들의 시장 상황과 지금의 모습 그리고 산업 간의 연관성과 시너지 창출 가능성을 다시 한 번 복기해보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주문 생산 회사)와 통신칩, 모바일 AP로 이어지는 삼성의 비메모리 분야에 대한 장기 계획은 매우 훌륭한 전략이었음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 물론 아직 그 계획들에 완성이라는 단어를 꺼낼 시기는 아니다. 여전히 해결해야 할 몇 가지 문제들이 있고, 오늘의 주인공인 엑시노스 역시 마찬가지다.

현재 안드로이드 모바일 AP 시장에서 가장 높은 경쟁력을 갖춘 AP는 퀄컴의 스냅드래곤이다. 스냅드래곤과 경쟁에서 엑시노스는 GPU(그래픽처리장치) 부문에서 특히 약점을 보이는데, 우선 스냅드래곤이 강력한 GPU를 보유하게 된 배경에 대해 정리해 보면 좋을 것 같다. 과거 PC 그래픽 시장을 양분하던 ATI와 엔비디아, 그중 ‘라데온(RADEON)’이라는 브랜드로 친숙한 ATI를 AMD가 인수했고, 그중 모바일 관련 사업부 일부를 다시 퀄컴이 인수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ATI RADEON의 철자를 고스란히 간직한, 현세대의 모바일 GPU 중 가장 뛰어난 성능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퀄컴의 아드레노 GPU다. 퀄컴은 이 아드레노 GPU를 오직 스냅드래곤에만 탑재하고 타사에는 판매하지 않는, 배타적 판매정책을 폈다. 그리고 이런 정책에 힘입어 스냅드래곤은 가장 뛰어난 AP로 시장에 군림하게 됐다.

반대로 아드레노 GPU를 사용하지 못하는 삼성은 차선책으로 ARM의 말리 GPU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말리의 성능이 아드레노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탓에 삼성은 엑시노스에 상대적으로 더 많은 수의 GPU 코어를 배치해 성능의 열위를 극복할 수밖에 없었고, 전력 소비 크기 등 측면에서 많은 고민이 있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삼성은 독자 GPU 개발을 추진하게 된다. 하지만 2016년부터 들려오기 시작한 삼성의 독자 GPU프로젝트인 S-GPU는 여전히 시장에 등장하지 못하고 있고, 삼성은 이미 최고 수준의 CPU와 독자적인 통신칩을 개발했음에도 스냅드래곤과 경쟁에서 후한 평가를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최근 삼성이 AMD의 최신 GPU 아키텍처인 RDNA에 대한 라이선스 계약을 맺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아드레노를 견제할 수 있는 더욱 강력한 모바일 GPU 출현에 대한 기대감이 점점 커지고 있다. 문제는 그러면서 이것을 최근 미국 정부의 반화웨이 정책에 의한 반사효과로 해석하는 의견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물론 어느 정도는 영향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 더욱 연관성이 있고 비중 있게 다뤄야 할 점은 바로 파운드리에 대한 부분이다.


5월 14일(현지시각) 미국 샌타클래라에서 열린 ‘삼성 파운드리 포럼 2019’에서 참석자들이 정은승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 사장의 기조연설을 듣고 있다. 사진 삼성전자
5월 14일(현지시각) 미국 샌타클래라에서 열린 ‘삼성 파운드리 포럼 2019’에서 참석자들이 정은승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 사장의 기조연설을 듣고 있다. 사진 삼성전자

오랜 계획들이 현실이 되는 시간

극자외선(EUV)을 활용한 최신 공정을 기점으로 이 EUV 공정을 제공할 수 있는 파운드리가 대만의 TSMC와 삼성 단 두 업체로 더욱 확실히 좁혀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앞으로 늘어나게 될 EUV 공정의 수요는 두 업체가 나눠 가질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대만 TSMC는 다수의 팹리스(반도체를 직접 생산하지 않고 설계와 기술개발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 업체들이 요구하는 EUV 공정의 생산물량을 다 생산할 능력이 없다. EUV 공정에서는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의 펠리클(반도체 회로를 새기는 노광 공정에서 미세한 입자들에 의한 오염을 최소화시켜주는 안전장치)이 개발이 되지 않은 탓에 생산량을 늘리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EUV 공정에서 TSMC보다 한발 앞선 기술력을 획득한 삼성은 팹리스 기업들 입장에서 장기적으로 함께할 매력적인 파운드리로 인식되고 있다. 만약 삼성이 지금과 같은 기술 격차를 앞으로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파운드리 분야에서 영향력은 지금보다 훨씬 강력해질 것이다.

이 같은 이야기들이 벌써 하나둘씩 현실이 되고 있다. 세계적인 GPU 제조사인 엔비디아가 먼저 삼성 파운드리의 문을 두드렸고, 이어 AMD 역시 삼성과의 파트너십을 더욱 공고히 하는 모양새다. 그중 무엇보다 관심이 가는 내용은 AMD의 최신 GPU 아키텍처 라이선스 계약에 양사가 합의하면서 오늘의 주제인 삼성 모바일 AP의 최대 약점 중 하나인 엑시노스 GPU에 대한 보완이 기대된다는 점이다. 만약 성공적으로 GPU 개발이 완료되면 스냅드래곤을 위협할 수 있는 수준의 엑시노스가 탄생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다시 기존에 삼성이 가지고 있는 여러 핵심 역량들과 함께 새로운 시너지를 창출하게 될 것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엑시노스와 삼성의 비메모리 분야에 시장이 거는 기대가 단지 미 행정부의 반화웨이 제재 등과 같은 단기적이고, 우연한 호재에 의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오랜 시간 준비해온 장기 계획들이 뿌리를 내리고, 하나둘씩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다. 물론 누군가 반도체 시장의 미래를 묻는다면 ‘아직 아무도 모른다’가 정답이겠지만, 오래전부터 삼성이 준비해온 비메모리 분야의 전략들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다면, 이제 ‘반화웨이 효과’가 아닌 ‘파운드리 효과’에 주목해보자. 그리고 앞으로 파운드리가 만들어낼 작은 변화들이 지금보다 더욱 굳건한 반도체 대한민국의 초석이 되리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