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 양승용
일러스트 : 양승용

“연구원을 정부의 싱크탱크(두뇌)가 아니라 마우스탱크(입) 정도로 생각하는 현 정부에 연구의 자율성과 독립성은 한갓 사치품일 수밖에 없습니다.”

2009년 초 이동걸 금융연구원장(현 산업은행장)이 임기 1년 반을 남기고 중도 사임하면서 한 말이다. 이 원장은 당시 이명박 정부가 금산분리 규제완화를 추진하는 데 반대하며 갈등을 빚다 사표를 던졌다. 그는 이임사에서 “정부 정책을 앞장서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않는 연구원이나 연구원장은 현 정부 입장에서는 아마 제거되어야 할 존재인 것 같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금융연구원은 정부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지 않는다. 은행연합회가 출연한 민간기관이다. 그런데도 정부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국책연구기관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좌우를 막론하고 역대 정부는 국책연구기관에 대해 ‘나팔수’ 역할을 주문하고 강요했다.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연구원장을 정권의 코드에 맞는 인물로 교체하고, 연구 주제도 국정과제에 맞추는 일이 되풀이됐다.

문재인 정부는 처음부터 소득주도성장을 내세우며 주류 경제학계와 대립각을 세웠다. 대부분 비주류 학자들을 국책연구기관장으로 발탁했다. 그로 인해 연구원 내부 갈등이 과거보다 더 심화됐고, 국책연구기관의 독립성 논란도 증폭됐다. 연구원을 떠나는 박사들이 큰 폭으로 늘어난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경우 한 해 평균 5명 수준이었던 퇴사자가 작년에 17명으로 급증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정부에 할 말을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KDI는 작년 6월 국책연구기관으로는 처음으로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일자리 감소 효과를 지적하는 보고서를 냈다. 주요 연구기관 중 유일하게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대로 낮춰 주목받기도 했다. 경기 흐름이 꺾이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지적한 것이다.

올 들어 청와대와 기획재정부가 경기낙관론을 고집하는 가운데서도 KDI는 “경기가 점차 부진해지고 있다”는 의견을 고수했다. 지난 5월엔 “단기적인 경기 부양에 치우친 재정정책은 위험하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같은 날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재정의 과감한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된다”고 밝힌 것과 정반대 주장이어서 파장이 컸다.

KDI가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과 관련해 최정표 원장의 역할에 주목하는 시각이 있다. 최 원장은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시절 경실련에서 활동하며 재벌개혁을 주장했던 학자다. 문재인 정부와 코드가 맞기 때문에 원장으로 발탁됐다. 이념적 지평이 달라져 KDI가 제 목소리를 내기 힘들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최 원장은 작년 4월 취임 이후 소신 있는 연구를 강조하며 연구자들의 자율성과 시간을 최대한 보장하는 조치를 취했다. 연구 주제와 결과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는 평가다. 정부와 코드가 맞는 원장 덕분에 연구원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더 확대된 것은 역설적이다.

KDI 정원에는 팔정도(八正道) 비석이 세워져 있다. 불교의 팔정도, 즉 정견(正見·바르게 보기) 정사(正思·바르게 생각하기) 정어(正語·바르게 말하기) 정업(正業·바르게 행동하기) 정명(正命·바르게 생활하기) 정근(正勤·바르게 정진하기) 정념(正念·바르게 깨어 있기) 정정(正定·바르게 집중하기)의 열여섯 글자가 새겨져 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에 관여했고, KDI 설립 초기 초빙 연구원으로 재직하기도 했던 이르마 아델만 교수가 이 비석을 기증했다. 팔정도 정신으로 연구를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KDI가 앞으로도 정견·정사·정언의 팔정도 정신을 살려 한국을 대표하는 싱크탱크의 자부심을 지키기를 기대한다.

김기천 조선비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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