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 양승용
일러스트 : 양승용

“삼성전자가 세계적인 회사로 크는 데 50년 걸렸다. 5~10년 만에 세계적인 금융회사가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10∼20년이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당장 글로벌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를 만드는 건 무리다. 우선은 ‘실버만삭스’라도 만들어 국내 자본시장에서 소외받는 중소기업들에 직접 금융 서비스를 하는 등 단계를 밟아야 한다.”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인 2008년 이동걸 금융연구원장(현 산업은행장)이 한 말이다. 정부가 ‘자본시장통합법’을 제정하며 ‘한국판 골드만삭스’ 육성을 내건 데 대한 쓴소리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지만 한국은 아직 골드만삭스가 아니라 ‘실버만삭스’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투자은행(IB)을 키워내는 것은 삼성전자 같은 기업을 또 하나 만들어내는 것만큼이나 지난한 과제다.

독일 최대 은행인 도이체방크가 그 방증(傍證)이다. 150년 역사의 도이체방크는 산업혁명의 후발주자였던 독일이 유럽 최대 경제대국으로 올라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은행과 보험사 등 금융회사가 주요 대기업의 이사회에 참여해 기업 경영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독일식 기업지배구조를 대표하는 은행이기도 하다. ‘독일 주식회사의 지배주주’로 불릴 정도로 국가 경제와 산업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도이체방크는 1980년대 들어 월스트리트 투자은행들에 대한 도전에 나섰다. 1989년 영국의 모건 그렌펠을 인수한 데 이어 1999년 미국 8위 은행인 뱅커스트러스트를 사들이는 등 적극적인 공세로 투자은행 업계의 수퍼루키로 떠올랐다. 2007년엔 세계 투자은행 순위에서 골드만삭스에 이어 2위에 오르기도 했다. 전통적인 상업은행에서 글로벌 투자은행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하지만 뒷심이 달렸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가 터지고, 고위험 투자은행 산업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면서 도이체방크의 성장세에 제동이 걸렸다. 리스크 관리가 뒷받침되지 않은 무리한 확장의 결과로 과징금 폭탄을 맞는 등 악재가 잇따랐다. 미국의 부동산 거품이 절정이었던 2005~2007년에 주택저당증권(MBS)을 불완전 판매한 혐의와 ‘2012년 리보금리 조작사건’, 러시아 자금세탁 방조 혐의 등의 스캔들과 관련해 모두 34억유로(약 4조6000억원)의 벌금·과징금을 냈다.

그 영향으로 2015년부터 2017년까지 3년간 87억7000만유로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작년엔 흑자로 돌아섰지만 올 2분기에 다시 28억유로의 순손실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도이체방크의 주가는 금융위기 직전의 10%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시가총액이 JP모건의 20분의 1도 안 된다. 작년엔 유럽 대표 상장회사들로 구성된 유로스톡스50 지수에서도 빠졌다. 오랫동안 유럽 금융산업의 최강자였던 도이체방크로서는 뼈아픈 굴욕이었다.

국제 금융시장에서는 제2의 리먼 브러더스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해 도이체방크는 지난 3월 위기 돌파 카드로 독일 2위 은행인 코메르츠방크와 합병을 들고나왔다. 2016년에 이어 두 번째 시도였다. 독일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도 있었다. 하지만 노조와 주주들의 반대로 무산되면서 기사회생의 희망도 사라졌다.

결국 도이체방크는 최근 대규모 구조조정 방안을 발표했다. 9만1500명인 직원 수를 2022년까지 7만4000명으로 줄이고, 740억유로(약 98조원)의 위험자산을 정리하기로 했다. 직원 5명중 1명을 감원하고, 전체 자산의 절반가량을 줄이는 고강도 조치다. 도이체방크의 위기와 좌절은 글로벌 투자은행의 높은 벽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역대 정부가 내걸었던 ‘금융 선진화’의 평범한 구호가 아득하게 느껴진다.

김기천 조선비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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