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설명 8월 5일 미국이 중국을 25년 만에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며 미·중 경제 전쟁의 전선을 넓혔다. 이 결정을 내리기 몇 시간 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제롬 파월 의장을 겨냥한 트윗을 올렸다. “중국이 위안화 가치를 떨어뜨렸다. Fed(연준)는 듣고 있는가? 이것은 앞으로 중국(위안화 가치)을 매우 약하게 할 중대한 위반이다!” 트럼프는 파월 의장을 꾸준히 공격하고 있다. 자신의 경제 정책 성과를 드러내려면 연준이 금리를 더 인하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통화 정책 독립성을 가진 연준으로서는 미국 경제를 고려해서 정책을 펼쳐야 한다. 압박이 거세지자 지난 4일 폴 볼커, 앨런 그린스펀, 벤 버냉키, 재닛 옐런 등 전 연준 의장 4명은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미국은 독립적인 연준이 필요하다’는 제목으로 공동 기고문을 내기도 했다.
라구람 라잔(Raghuram G. Rajan) 시카고대 부스경영대학원 교수, 인도중앙은행 총재, 국제통화기금(IMF) 수석이코노미스트
라구람 라잔(Raghuram G. Rajan)
시카고대 부스경영대학원 교수, 인도중앙은행 총재, 국제통화기금(IMF) 수석이코노미스트

최근 중앙은행 독립성이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금리를 너무 높게 유지하고 있다’며 연준을 비난한다. 소문에 의하면 트럼프가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을 강제로 퇴출시킬 가능성도 타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터키에서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① 중앙은행 총재를 교체했다. 신임 총재는 현재 급격한 금리 인하를 시도하고 있다. 이처럼 포퓰리즘 정부가 중앙은행을 정조준한 ② 사례는 굉장히 많다.

이론적으로 중앙은행 독립성은 통화 정책 결정권자들이 ‘반대가 많지만 꼭 필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자유를 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 독립성은 중앙은행이 물가와 재정 과잉에 맞서 싸울 때 반드시 필요하다. 만약 중앙은행장이 선거로 뽑힌 선출직 공무원이라면 통화 정책 결정을 할 때 장기적인 비용이 들더라도 당장은 부드럽게 대응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것이다. 정치권은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중앙은행에 통화·재정 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하는 권한을 넘겨줬다.

이 역할 분담으로 국가는 통화·금융 시장 안정성과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이 이론대로라면 한 나라는 물가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 금융 시장 안정성까지 확보해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된다.

③ 1980년대 많은 중앙은행이 독립성을 추구했고, 이 방식은 1990년대 들어 세계 금융계에 하나의 ‘만트라(mantra·眞言)’로 굳어졌다. 중앙은행 총재는 존경을 받았고, 그들이 하는 말은 (많은 말이 생략됐거나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음에도) 깊은 경외심을 갖고 다뤄졌다. 특히 1980년대 초반, 물가가 급격히 상승했던 사태가 재현되는 것을 우려한 정치인들은 중앙은행에 더 많은 자유를 줬고,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도 공개적인 언급을 삼갔다.

그러나 지금 세 가지 상황이 이 상식을 흔들고 있다. 첫째,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다. 금융 위기 발발은 ‘중앙은행들이 운전대를 잡은 채로 잠들었다’는 비판으로 이어졌다. 위기 발생 이후 각국 중앙은행이 강압적인 조치에 나서는 것으로 자신들의 존재감을 더 강력하게 뽐냈지만, 한편으로 이런 상황은 정치권에 빌미를 제공하는 꼴이 됐다. ‘선출되지 않은 구원자들’과 무대를 나눠 갖는 것에 대해 정치권이 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둘째, 위기 이후 각국 중앙은행의 물가 상승률이 인플레이션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는 중앙은행들이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남겼다. 하지만 사실은 통화 완화책에 쓰일 전통·비전통적 정책 도구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중앙은행의 추가 완화 조짐은 더 많은 금융 리스크를 지도록 부추기는 것과 같고, 이는 결국 중앙은행 스스로가 자신들이 만들어낸 마술의 볼모가 되는 것과 같다. 대중이 중앙은행의 ‘수퍼파워’를 믿기 시작할 때, 정치인들은 왜 그런 힘이 자신들의 명령을 이행하는 데 쓰이지 않는지를 묻기 시작할 것이다.

셋째, 최근 몇 년간 많은 중앙은행의 소통 방식은 기존 수수께끼 같은 스타일에서 완전히 투명한 방식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동시에 금융위기 이후 성장과 인플레이션에 대한 전망치는 예측을 빗나갔다. 이게 당시로서는 최고의 추정치였을지도 모른다는 점은 아무도 납득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중앙은행의 예측이 틀렸다는 것뿐이었다.

이 모든 사태는 중앙은행에 대한 정치권의 비판 근거가 됐다. △금융위기를 막지 못한 데다 이에 대한 대가도 치르지 않았다는 점 △중앙은행이 해야 할 일(물가 안정)을 하지 못했다는 점 △중앙은행이 정치인들보다 아는 것이 더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중앙은행은 포퓰리즘 정권의 희생양

포퓰리즘 지도자들이 중앙은행에 대한 반감이 큰 쪽 중 하나라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들은 자신이 국민으로부터 ‘엘리트’가 가진 제도권 지위를 빼앗아오는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믿는다. 사실 그 엘리트라는 이들이 하는 일은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자들이 전문용어로 말한다거나 주기적으로 스위스 바젤 같은 곳에 모여 비공개 회담을 진행하는 것일 뿐인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포퓰리스트들에게 중앙은행은 완벽한 희생양이 됐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경기 침체가 자신의 계획에 차질을 주고, 자신의 이미지가 나빠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앙은행 독립성에 대한 공격이 계속되고 있지만 시장은 이상할 정도로 평온하다. 투자자들은 포퓰리즘 정부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 탓에 벌어진 정책 불확실성과 이에 따른 디플레이션이 중앙은행 독립성 훼손에 따른 피해보다 훨씬 크다고 결론 내린 것 같다. 투자자들은 중앙은행들이 포퓰리즘 정부의 기대에 반응해주기를 원하는 것 같다. 투자자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포퓰리즘 정부의 ‘멋진’ 정책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역효과를 상쇄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중앙은행이 위임받은 ‘권한’은 정부 정책에 문제가 있더라도 경제 성장이 정체될 때 통화 완화책을 펼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중앙은행은 자율성을 유지하면서도 종속적인 위치에 빠질 수 있다. 이 경우 상황은 심각해진다. 필요할 경우 중앙은행이 나서서 경제를 구할 것이라는 가정하에 정부가 더 위험한 정책을 펼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 나쁜 것은 정치권이 중앙은행의 역할을 과대평가하게 된다는 점이다. 중앙은행이 정책 실수로부터 경제를 구하기 위해 실제로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오해다.

중앙은행은 대중의 공격에 대해 면역력이 없다. 중앙은행은 자신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신뢰성을 훼손하고 미래 행동 능력과 인재 채용 등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먼저 중앙은행은 대중에게 자신들의 역할과 그 역할이 왜 단순히 금리를 변덕스럽게 올리거나 내리는 것 이상의 이유가 있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파월 의장은 그동안 기자회견과 연설에서 중앙은행의 역할과 경제 불확실성 등에 대해 솔직하고 투명하게 말했다. 중앙은행을 둘러싼 신비감을 걷어내면 단기적으로는 공격받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대중이 중앙은행의 역할이 ‘괴로운 상황에서 한정된 도구를 써서 어려운 일을 하는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빨리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이들에 대한 기대감은 줄어들 것이다. 중앙은행이 정치권 실수를 뒷수습하는 ‘마법’을 부릴 것이라는 기대감 말이다. 지금 상황에서 이것만이 중앙은행 독립성을 지키는 최고의 방법이 될 것이다.


Tip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7월 6일 중앙은행 총재를 교체했다. 앞서 터키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서 집권당은 경기 침체와 고물가 문제 때문에 야당에 패했는데, 이 사태가 총재 교체의 단초가 됐다. 신임 무라트 우이살 총재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바람대로 움직이고 있다. 7월 말 터키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기존 24%에서 19.75%까지 4.25%포인트 인하했다. 2002년 이후 인하 폭이 가장 컸다. 그러면서 올해 추가 인하 가능성을 시사했다.

인도와 중국 중앙은행도 독립성 훼손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성장을 중시하는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지난해 인도 중앙은행에 대출 규제 완화와 금리 인하를 요구했고, 압박에 못 이긴 전 총재는 사퇴했다. 이강 런민은행 총재도 위안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떨어뜨린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지난 5일 위안화 환율이 심리적 마지노선인 달러당 7위안까지 올라가자(달러화 대비 위안화 가치 하락) 미국 재무부는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했다.

1980년대 이후 ‘중앙은행 독립성=물가 안정’이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미국 경제를 지켜냈다는 평가를 받은 폴 볼커 전 연준 의장이다. 1979년 연준 의장으로 취임한 그는 오일쇼크로 치솟은 물가를 잡기 위해 1981년 정책 금리를 19%까지 올리는 대담한 통화 정책을 구사했다. 볼커 의장은 지난해 낸 회고록에서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우회적으로 ‘선거 전까지 금리를 인상하지 마라’는 메시지를 보냈다고도 했다. 중앙은행 독립성이 하나의 이론으로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들어서다. 알베르토 알레시나,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는 1993년 ‘중앙은행 독립성과 거시경제 성과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중앙은행이 독립적일 때 인플레이션을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관료가 중립성을 보장받아야만 통화 정책을 효과적으로 수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