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경화증(Eurosclerosis)’이란 1970년대 중반 이후 정부의 과도한 규제와 지나치게 관대한 사회 정책으로 나타난 유럽의 경제적 침체를 일컫는 말이다. 독일 경제학자 헤르베르트 기르시(Herbert Giersch)가 만든 용어로 유럽(Europe)과 의학용어 경화증(Sclerosis)을 결합한 단어다. 이 현상의 특징은 경제 침체의 원인을 뻔히 알면서도 못 고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화증이라고 부른다.

일본과 미국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고도성장과 더불어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성장의 과실이 사회 전체에 공유됐다. 반면 유럽에서는 경제성장률 감소와 함께 일자리 창출이 줄어들어 고실업의 고통을 겪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을 일으킨 원인으로 근로 의욕을 약화하는 사회 정책과 과도한 규제를 지목했다.

그러나 정책 방향을 결정하던 정치권은 지지층의 이탈을 두려워해 정책 전환을 시도하지 않았다. 당시 독일 총리의 경제 자문을 담당하고 있던 기르시는 경제 침체의 원인을 뻔히 알면서도 정치적 이해 때문에 고치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이 현상을 유럽 경화증이라고 칭했다.

한국 경제도 유럽 경화증 증세를 보인다. 저성장과 일자리 부족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증상이 비슷하다. 생산성의 제고 없이 급속히 증가하는 사회적 비용과 미래를 가로막는 과도한 규제가 경제 침체를 일으키는 점도 유사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제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점이 똑같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고치지 못하고 있는 우리 경제의 대표적인 문제는 과도한 규제다. 한국에서 규제 개혁은 김영삼 정부부터 모든 정부의 과제였다. 그러나 외환위기로 국제통화기금(IMF)의 서슬 퍼런 감독을 받아야 했던 김대중 정부 이외에는 실질적으로 규제 개혁의 성과를 보인 정부는 없다.


우리 기업의 발목을 잡은 건 일본이나 중국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규제다.
우리 기업의 발목을 잡은 건 일본이나 중국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규제다.

역대 정부는 규제 개혁을 위해 필요한 온갖 제도를 도입했다. 규제 총량을 늘리지 못하게 하는 규제총량제, 규제의 기한을 설정하는 규제일몰제, 임시허가로 규제 장벽을 넘게 하는 규제샌드박스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규제 개혁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다양한 행정 조직을 도입하기도 했다. 규제개혁위원회, 규제개혁장관회의, 규제개혁기획단 등이 대표적인 규제 개혁 기관으로 도입됐다. 일반 부처보다 위상이 높은 총리실이나 대통령 직속위원회가 규제 개혁을 담당하기도 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규제의 전봇대를 뽑겠다”고 한 적도 있고, 대통령 주재로 7시간 넘는 규제 개혁 끝장토론을 개최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하다. 스위스 세계경제포럼(WEF)은 2019년 국가 경쟁력 보고서에서 한국의 규제 관련 경쟁력 순위를 141개국 중 87위로 평가했다. 전년의 79위보다 더 떨어졌다. 수출 시장에서 우리와 경쟁하고 있는 중국은 13위다.

세계 주요국은 4차 산업혁명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사활을 건 경쟁 중이다. 최근 미국과 중국 간 무역 갈등의 배경도 미래 산업의 주도권 싸움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 기업의 발목을 잡은 건 일본이나 중국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규제다. 세계 100대 스타트업 중 53%가 한국에서는 규제 때문에 아예 사업을 할 수가 없다. 국회 발표에 따르면 2019년 국회에서 발의한 규제 입법 건수가 1200건이라고 한다.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최대치이며 전년도의 614건에 비하면 두 배 가까이 증가한 규모다. 우리 경제에 경화증을 유발하고 있는 주체가 누구인지 너무나 확실한 증거다. 정치권의 참여 없이 규제 개혁은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