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설명 3월 3일(현지시각) 미국 14개 주에서 개막한 ‘슈퍼화요일’에서 조 바이든 민주당 경선 후보가 10곳에서 승리하며 선두주자로 나섰다. 그동안 1위였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4개주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최종 승자를 장담할 수는 없다. 민주당은 주별 득표율에 따라 대의원을 배분하고, 이들이 당 후보를 선출한다. 바이든이 주별로는 승리했지만, 대의원 수로는 차이가 근소하다. 샌더스는 대의원 수가 가장 많은 캘리포니아에서 격차를 벌렸다. 샌더스는 민주당에서 극단적인 좌파 인물이다. 클린턴, 오바마 등 민주당 주류는 그동안 월스트리트와 타협해 선거 자금을 받았다. 반면 샌더스는 대규모 정치 자금을 거부하고 풀뿌리 자금만으로 선거를 치르고 있다. 대표 공약이 전 국민에게 단일 의료보험을 제공하는 ‘메디케어 포 올’. 학자금 대출 탕감과 공립대 무상 등록금, 최저임금 15달러로 인상 등을 내세운다. 따라서 그는 월스트리트와 대척점에 설 수밖에 없다. 진보 성향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는 샌더스를 공개 지지한다.
제프리 삭스(Jeffrey D. Sachs) 컬럼비아대 교수, 컬럼비아대 지속가능한개발센터 디렉터, 하버드대 경제학
제프리 삭스(Jeffrey D. Sachs)
컬럼비아대 교수, 컬럼비아대 지속가능한개발센터 디렉터, 하버드대 경제학

월가(街) 엘리트들의 나르시시즘(nar cissism·자기애적 욕망)과 낙천주의적인 멍청함은 보기에 경이롭다. 권력 최상단에 앉아 세제 혜택과 치솟는 주식시장을 즐기는 그들은 모든 것이 가능한 이 세상이 최고라고 확신한다. 자신들을 비평하는 사람은 바보거나 악마가 틀림없다는 게 그들의 생각일 것이다.

① 내가 그들의 회사에서 버니 샌더스를 지지한다고 언급했을 때, 사람들이 그 순간 숨을 ‘헉’ 하고 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말해서는 안 되는 악마의 이름을 부른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샌더스가 당선될 수 없다고 믿고 있으며, 만에 하나 그가 당선된다면 그들의 공화국이 붕괴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같은 진보 언론 매체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

유럽이라면 샌더스는 주류의 사회 민주주의자 정도에 위치할 것이다. 그는 미국인이 기본적인 것들을 회복하길 바라고 있다. 모든 이들을 평등하게 지원하는 의료보험, 정규직 근로자 최저 임금 인상, 육아를 위한 가족 휴가, 질병 유급 휴가, 젊은 성인을 평생 부채로 몰아넣지 않는 대학 교육, 억만장자들이 돈으로 살 수 없는 선거 그리고 기업 로비가 아니라 여론이 결정하는 정책(2019년 미국의 기업 로비자금 규모는 34억7000만달러에 달했다) 등이 그가 추구하는 정책 방향이다.

미국 대중 대다수는 샌더스의 이런 주장을 지지한다. 미국인들은 정부가 모두를 위해 건강 보험을 보장해주기를 원한다. 또 부자가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정치에서 큰돈을 제한하기를 원한다. 이것은 모두 샌더스의 핵심 정책이며 유럽에서는 흔한 일이다. 그럼에도 샌더스가 경선에서 승리할 때마다 당황한 월가 엘리트들은 샌더스 같은 ‘극단주의자(extremist)’가 어떻게 투표에서 이겼는지를 두고 머리를 쥐어짜고 있다.

최근 로이드 블랭크페인 전(前) 골드만삭스 회장의 파이낸셜타임스(FT) 인터뷰를 보면 월가 엘리트들의 멍청함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매년 수천만달러씩 벌어들이는 블랭크페인은 이 인터뷰에서 자신이 부자가 아니라 ‘잘사는 사람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기이한 부분은 그가 진심이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② 100억달러 이상 자산을 가진 억만장자가 50명을 넘어가는 미국 사회에서 그의 자산은 10억달러대에 불과하다. 또래 집단에 따라 비교하게 되는 법이다.

엘리트 대다수는 미국인의 삶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미국인 수천만이 기본적인 의료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매년 약 50만 명이 의료비 때문에 파산을 신청한다는 것, 5가구 중 1가구가 제로 또는 마이너스 순자산이 있다는 것, 전체의 40% 정도가 최소 생활을 보장받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신경쓰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약 4400만 명의 학자금 대출 규모가 총 1조6000억달러에 달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는다. 이는 다른 선진국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주가가 상승할 때 엘리트층의 삶은 풍요로워지지만, 서민은 금융과 심리적 불안에 더 빠져들게 되면서 이들의 자살률이 치솟고 ‘절망적 죽음(아편계 약물 과다 복용)’도 급증했다.

엘리트층이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이 오랜 기간 이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미국 정치권은 1981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40년간 감세, 노조, 슈퍼 부자들을 위한 특혜 등과 관련해 일해왔다. 월스트리트와 워싱턴의 조화는 2008년 한 사진에 잘 드러나 있다. 도널드 트럼프와 마이클 블룸버그, 빌 클린턴이 함께 골프를 치고 있는 사진이다. 행복한 한 가족의 모습이 아닐수 없다.

이는 20세기 초 공화당원들에게는 일반적인 것이었지만, 월가와 민주당과의 밀접한 관계는 더 최근 들어 생긴 일이다. 클린턴은 1992년 대선 후보 시절 ③ 로버트 루빈 당시 골드만삭스 공동 회장을 통해 민주당을 골드만삭스와 연계시키는 공작을 벌였다. 루빈은 후에 재무부장관이 된다.

월가의 지지로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때부터 양당은 선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월가에 신세를 졌다. 버락 오바마도 2008년 대선에서 클린턴 방식을 따랐다. 그가 취임한 후 경제팀의 막후 실세로 루빈이 지목되기도 했다.

월가가 뿌린 선거자금은 확실한 보답으로 돌아왔다. 클린턴이 금융시장 규제를 완화한 덕분에 시티그룹 같은 거대 금융 기업이 탄생할 수 있었다(그리고 루빈은 클린턴 행정부를 떠난 후 시티그룹 디렉터로 돌아갔다). 클린턴은 또 가난한 미혼모에 대한 복지 수당을 폐지하고 수많은 젊은 아프리카계 미국 남성들을 감옥으로 보냈다. 또 오바마는 2008년 위기를 불러온 은행가들에게 면죄부를 줬다. 그들은 마땅히 받아야 했을 감옥살이 대신 구제금융과 백악관 만찬 초대장을 받았다.


버니 샌더스 민주당 경선 후보. 사진 블룸버그
버니 샌더스 민주당 경선 후보. 사진 블룸버그

클린턴·오바마의 월가-정치권 결속

거대 억만장자의 메가톤급 자만심. ④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은 620억달러의 재산 중 10억달러를 쓰면 민주당 후보 지명을 받아 11월 또 다른 억만장자 도널드 트럼프를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역시 멍청하다. 블룸버그의 생각은 샌더스를 비롯한 다른 후보들과의 토론 자리에서 꺾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공화당 경선 후보에 나섰던 과거, 여성에 적대적인 블룸버그 업무 환경, 젊은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라틴계에 대한 경찰의 가혹한 기술에 대한 지지 등으로 공격받았다.

트럼프와 월스트리트가 샌더스를 향해 쏟아낼 히스테리의 홍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트럼프는 샌더스가 미국을 베네수엘라로 만들려고 한다고 비난하는데, 이는 잘못됐다. 캐나다나 덴마크가 비교 대상이 돼야 한다. 실제로 블룸버그는 네바다주 토론에서 샌더스를 ‘코뮤니스트’로 부르기도 했다. 샌더스가 노동자 편에서 기업 이사진에 맞서고 있는 사실을 비꼰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 유권자들은 의료보험, 교육, 괜찮은 임금, 유급 병가, 재생 에너지 그리고 슈퍼 부자에 대한 세금 감면과 이들에 대한 적법한 처벌 등 그동안과는 다른 것에 귀 기울이고 있다. 샌더스가 말하는 것들은 대단히 합리적이고 정말로 주류처럼 들린다.


Tip

제프리 삭스는 진보 성향의 경제학자다. 2011년 탐욕스러운 자본주의 체제에 항의하는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 당시 대학생들과 함께 거리로 나서기도 했다. 그는 “상위 1%가 부(富)를 독점하는 현 자본주의 체제는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빈곤 퇴치는 물론 탄소 배출량 감소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그래서 그의 주장은 버니 샌더스 민주당 경선 후보와 잘 맞는다.

‘포브스’에 따르면 2019년 기준 미국의 억만장자 중 자산이 가장 많은 사람은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다. 그의 자산은 1115억달러. 2위는 빌 게이츠로 1082억달러, 3위는 워런 버핏으로 888억달러를 기록했다. 마크 저커버그(763억달러), 래리 엘리슨(664억달러), 래리 페이지(611억달러) 등이 뒤를 이었다.

그는 골드만삭스 회장 시절 ‘아칸소 시골뜨기’였던 빌 클린턴 대선 후보를 만난 뒤 “잘 닦으면 대성할 인물”로 평했다고 한다. 그는 클린턴에게 월가와 글로벌 경제에 대한 감각을 가르쳤고 클린턴은 취임 후 루빈을 백악관 경제정책 보좌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클린턴이 처음 설치한 국가경제위원회(NEC) 초대의장에 올라 경제정책을 지휘했다. 이후 재무장관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는 은행·증권·보험 간 장벽을 허물어, 금융위기 시발점인 대형 투자은행과 파생상품을 조장한 인물로 비난받기도 한다.

3월 4일(현지시각)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하차했다. 전날 슈퍼화요일에서 참패하자 내린 결정이다. 경선 출마 선언 101일 만이다. 이 기간 그는 5억달러(약 6000억원)를 선거 운동에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