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설명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디지털 화폐 도입에 불을 지폈다. 스웨덴 중앙은행은 연내 디지털 화폐 상용화 테스트를 완료하기로 했다. 최근 중국과 일본을 비롯해 디지털 화폐 도입에 속도를 내는 국가가 늘고 있다. 특히 주요 20개국(G20)까지 디지털 화폐에 포용적인 입장을 취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현금 없는 사회’가 곧 도래할 것이라는 전망에 힘이 실리고 있다. 오는 10월 G20 중앙은행 총재 회의에서 현금을 대신하는 결제 수단으로 디지털 화폐를 사실상 수용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시작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감염 우려 탓에 지폐나 동전 등 실물 화폐는 뒷전으로 밀린 것처럼 보인다. 지폐를 주고받는 문화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왔다. 하지만 영국 금융감독청(FSA) 청장을 지낸 금융감독 전문가 하워드 데이비스는 실물 화폐의 ‘종말’을 말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본다. 그는 이번 칼럼에서 코로나19 사태 속 현금과 디지털 화폐 관련 사례와 논란을 나열하면서 현금의 존재 가치를 피력한다. 결과적으로 여러 가지 지불 수단이 공존하는 “혼합경제식 지불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워드 데이비스(Howard Davies)로열뱅크오브스코틀랜드(RBS) 이사회 의장, 런던정경대학(LSE) 총장, 영국 금융감독청(FSA) 청장
하워드 데이비스(Howard Davies)
로열뱅크오브스코틀랜드(RBS) 이사회 의장, 런던정경대학(LSE) 총장, 영국 금융감독청(FSA) 청장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지낸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가 지금으로부터 4년 전 종이 화폐의 단계적 축소에 대한 당위성을 피력했다. 그는 저서 ① ‘화폐의 종말’에서 특히 고액권 지폐가 탈세와 마약 거래를 부추긴다고 주장했다. 1999년 영국에서 나온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런던에서 수거한 500장의 지폐 중 단 4장에서만 코카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게다가 현금의 존재는 통화 정책을 제약하기도 한다. 금고를 100달러 지폐로 가득 채우는 투자자가 많다면 각국 중앙은행이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펼치기 어렵다. 로고프 교수의 주장은 당시에는 난해하게 보였지만,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는 미국을 제외한 몇몇 국가에 지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퍼뜨렸다.

로고프 교수의 책이 나온 뒤로 현금은 지불 수단으로서 후퇴하고 있다. 가령, 스웨덴에서 크로나 지폐의 종말은 가시권에 들어온 것처럼 보인다. 소액 결제 대부분은 모바일 송금 애플리케이션 ② 스위시(Swish)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최근 스톡홀름에서 맥주를 사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현금 두둑한 지갑만으로 맥주를 살 수 없다.

코로나19 위기는 사람들에게 지폐를 멀리할 또 다른 이유를 만들어줬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지폐를 통해 전염될 수 있다는 말이 퍼졌고 많은 상점에서 ‘현금 받지 않음(no cash)’이라는 안내문을 내걸었다. 사실, 지폐가 바이러스를 옮길 수 있다는 괴담에는 근거가 없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플라스틱 카드 표면에 더 오래 남아 있으며, ‘누군가 재채기를 할 때 지폐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면’ 지폐는 바이러스 전파의 매개체가 될 수 없다고 영국 에든버러대의 감염 및 면역 전문가 크리스틴 테이트 버커드는 영국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러나 이미 지폐를 기피하는 현상이 퍼지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이 선언된 3월 영국에서 현금 사용량은 60% 이상 줄었다. 거래액도 반 토막 났다. 한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75% 정도가 앞으로 현금을 덜 사용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러한 현상은 선진국을 중심으로 확산했고 디지털 은행과 비은행권 결제 시스템 사업자에게 힘을 실어줬다. 애플페이와 페이팔은 성업 중이다. 지속적인 수익 창출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고 있지만 많은 ③ 네오뱅크(neobank)가 이용자 저변을 확대하고 있다. 페이스북의 디지털 화폐 ④ 리브라 지지자들은 리브라 발행을 기다리면서, 규제 당국을 대상으로 리브라가 안정적이며 자금 세탁 방지 규정에도 적합하다고 설득하고 있다.

현금의 입지가 좁아지면서 각국 중앙은행은 디지털 화폐 도입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개인과 기업은 수 세기 동안 지폐를 매개로 중앙은행에 직접적인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현금은 사라지고 디지털 화폐는 논란 없이 도입될 수 있을까.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몇몇 중앙은행이 적극적으로 디지털 화폐 도입을 검토하고 있는 가운데 스웨덴 중앙은행인 릭스방크(Riksbank)가 세계 최초로 디지털 화폐인 e-크로나(e-krona)를 상용화할 것으로 보인다.


스웨덴 중앙은행과 민간은행이 합작해 출시한 모바일 송금 애플리케이션 ‘스위시’.
스웨덴 중앙은행과 민간은행이 합작해 출시한 모바일 송금 애플리케이션 ‘스위시’.

그렇다면 현금과의 작별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일까. 녹색 지폐는 미래에 자취를 감추게 될까. 쉽사리 답을 내놓기는 어렵다. 이미 현금을 이용한 거래 건수는 감소하고 있지만, 많은 나라에서 유통되는 현금 규모는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BIS에 따르면 지난해 말 이후 유통 중인 화폐 가치는 이탈리아의 경우 8%, 미국은 7% 각각 증가했다. 현금을 가치의 저장소로 보는 사람은 마약상이나 탈세자만이 아니다. 최대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중국만 국내총생산(GDP) 대비 실물 화폐 비중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현금을 취급하는 시설이 사라지는 데 대한 반발 조짐도 일고 있다. 캐나다 중앙은행(Bank of Canada)은 금융 배제 문제를 지적하며 은행 계좌와 카드를 사용할 수 없는 고객의 현금을 받아달라고 소매업자에게 요청했다. 미국 뉴욕·샌프란시스코·뉴저지주는 소매업자가 현금을 거부하지 못하도록 했다. 스웨덴에서조차 스위시 이용자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웨덴의 행동주의 단체 ‘현금 반항(Cash Rebellion)’은 가난한 사람들의 종이 화폐 사용 보장 운동을 펼치고 있다. 영국에서는 이용률이 빠르게 떨어지고 있지만, 현금자동입출금기(ATM)의 유지 및 보수를 의무화하는 내용의 ‘현금 접근성(access to cash)’ 대책이 마련됐다.

요약하자면 지폐의 부고를 쓰는 일은 시기상조다. 여전히 현금을 통해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 수요가 강하기 때문이다. 각국 중앙은행이 디지털 화폐를 발행한다면, 한편으로는 페이스북를 배불리는 대신 정부의 화폐주조세를 보장할 수 있다. 그러나 중앙은행이 신용할당 사업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전격적인 탈중개화를 피하고 싶을 것이다.

우리는 머지않아 일종의 혼합경제식 지불 시스템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현금은 비록 과거보다 중요성이 떨어지더라도 다양한 종류의 카드 및 결제 시스템과 공존하며 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Tip

‘탈(脫)화폐론자’로 유명한 로고프 교수는 2016년 펴낸 이 책에서 “100달러 이상 고액권을 순차적으로 없애 궁극적으로 동전만 남겨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지폐를 중심으로 한 실물 화폐는 추적이 어렵기 때문에 마약 거래나 인신매매 등 범죄 집단 자금 유통이나 탈세 수단으로 악용되며, 마이너스 금리의 정책 효과를 반감시키기 때문이다. 금리가 마이너스로 내려가면 사람들은 은행에 화폐를 맡기느니 집에  쌓아놓는데, 이러면 실물경제에 자금을 흐르게 해 경기를 부양시킨다는 애당초 정책 취지가 퇴색된다.

2012년 스웨덴 중앙은행과 민간은행이 합작해 출시한 모바일 송금 애플리케이션이다. 휴대전화 번호와 은행 아이디만 있으면 수수료 없이 송금할 수 있다. 2018년 출시 7년 만에 거래액 4400억크로나(약 60조원) 규모로 성장했다. 반면, 스웨덴에서 최근 오프라인 상점에서 현금으로 결제했다고 응답한 사람의 비중은 약 13%에 그쳤다. 스위시가 현금의 경쟁력 하락에 일조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오프라인 지점 없이 모바일이나 인터넷만으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은행을 의미한다. 디지털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기반으로 고객과의 접근 방식을 넓힌 인터넷 은행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 컨설팅업체인 액센추어는 올해 네오뱅크가 기존 은행 점유율의 35% 이상을 빼앗을 것으로 전망했다. 또한, 네오뱅크의 확산으로 기존 은행이 25% 이상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봤다.

페이스북은 2019년 6월 미국 달러화나 유로화, 미 재무부 채권 같은 다양한 통화로 구성된 통화 바스켓에 연동되는 단일 디지털 화폐 리브라 출시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자 각국 정치인이나 규제 당국은 리브라가 통화 정책을 통해 시장에 관여하고 시장을 보호하는 중앙은행의 권한을 약화할 수 있다며 우려했다. 또 리브라가 돈세탁 같은 불법 거래에 이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리브라에 대한 전 세계 금융 당국의 반발이 커지자 페이스북은 리브라 사업 계획을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리브라를 주관할 리브라 협회는 올해 4월 미국 달러화 같은 국가별 현행 화폐의 디지털 버전처럼 작동하는 다양한 리브라 스테이블 코인을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스테이블 코인은 가격 변동성을 최소화하도록 설계된 가상화폐로 ‘1달러=1코인’ 등 기존 화폐에 고정된 가치로 발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