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11 테러 직후 등장한 ‘아이 러브 뉴욕 모어 댄 에버(I♥NY More Than Ever)’는 위기 극복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사진 아이 러브 뉴욕 홈페이지
2001년 9·11 테러 직후 등장한 ‘아이 러브 뉴욕 모어 댄 에버(I♥NY More Than Ever)’는 위기 극복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사진 아이 러브 뉴욕 홈페이지
황부영 브랜다임앤 파트너즈 대표 컨설턴트 아시아 브랜드 프라이즈(ABP) 심사위원, 전 제일기획 마케팅연구소 브랜드팀장
황부영 브랜다임앤 파트너즈 대표 컨설턴트 아시아 브랜드 프라이즈(ABP) 심사위원, 전 제일기획 마케팅연구소 브랜드팀장

브랜드는 사람들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연상·단어·문장·그림 등의 집합체다. 브랜드 전략을 세우기 위해서는 사람들 마음속에 우리 브랜드에 대해 ‘무슨 생각이 나도록 하고 어떤 단어나 그림이 떠오르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우선 정해야 한다. 목표를 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우리 브랜드를 접할 때 특정 방향으로 떠올리도록 목표로 정한 생각이나 단어, 연상 등을 ‘브랜드 아이덴티티’라고 한다. 정체성이라고 직역해선 안 된다. 목표 연상이 브랜드 아이덴티티다. 목표 인식이 잘 떠오르게 만드는 모든 작업은 브랜딩이다.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은 경험

특정한 연상이나 단어를 잘 떠올리게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브랜드를 접할 때 목표 연상이 바로 경험될 수 있게 만들면 된다. ‘와서 보니 정말 그렇다’라고 반응하게 만드는 건 직접 경험이다. 내가 가보지 않았어도 광고를 본다거나 직접 경험한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서 경험하는 건 간접 경험이다. 브랜드를 직간접적으로 경험시켜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잘 떠오르게 만드는 것을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통상 ‘브랜딩’이라고 한다.

브랜딩,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은 경험이다. 따라서 도시 브랜딩은 어떤 도시의 목표 인식을 경험하게 만드는 활동, 모든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의미한다. 브랜딩은 브랜드 커뮤니케이션과 크게 구분되지 않고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브랜딩이란 말은 좁은 의미의 기술적인 용어였다.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잘 떠오르게 만들기 위해 이름을 짓고, 디자인하고 슬로건을 만드는 등의 작업을 지칭하는 말이 브랜딩이었다.

최근에는 좁은 의미의 브랜딩을 두 종류로 나눠서 말하기도 한다. 비주얼 브랜딩(Visual Branding)은 심볼·로고·캐릭터 등을 만드는 작업이다. 버벌 브랜딩(Verbal Branding)은 이름을 짓거나 슬로건을 도출하는 작업을 뜻한다. 도시 브랜딩에서 도시 이름을 바꾸는 사례는 거의 없다. 도시 브랜딩에서의 버벌 브랜딩은 슬로건을 뜻한다.


슬로건의 역할

우리가 다른 사람의 행동을 평가할 때, 평가 대상이 이러한 사람이란 정보를 미리 알고 있는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 같은 행동을 보고도 평가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이 사람은 명랑한 사람이다’라는 정보를 미리 가지고 있는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 사람이 농담할 때, 미리 정보를 접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정보에 따라 ‘농담을 좋아하는 명랑한 사람’이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만약 정보가 없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가볍고 못 믿을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브랜드는 소비자가 우리를 ‘이렇게 생각해줬으면⋯’ 하는 인식의 방향성을 커뮤니케이션 활동으로 표출하기 마련이다.

특히 많은 경우 브랜드의 방향성은 슬로건에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브랜드 슬로건을 보면 그 브랜드가 소비자로부터 얻고자 하는 인식의 방향성을 알 수 있다. 일단 공감하기만 하면 소비자는 그 인식 방향대로 제품을 보게 된다. 공포 영화를 본다고 치자. 공포 영화라고 미리 알고 무서워할 준비를 하고 보는 것과 무슨 장르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보는 것 사이에는 관객 반응에 엄청난 차이가 있게 된다. 영화 장르를 미리 얘기해 주는 것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브랜드 슬로건이다. 브랜드의 핵심 가치(목표 인식, 즉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쉽게 나타내 소비자가 그 브랜드의 의미를 바로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브랜드 슬로건의 역할이다. 목표 인식을 반영하는 브랜딩 요소 중에서도 가장 유용한 도구가 바로 슬로건이다.


밀턴 글레이저가 만든 ‘I♥NY’ 로고는 비주얼 브랜딩의 전설적인 사례로 꼽힌다. 사진 어도비스톡
밀턴 글레이저가 만든 ‘I♥NY’ 로고는 비주얼 브랜딩의 전설적인 사례로 꼽힌다. 사진 어도비스톡

I love NY, I love NY more than ever

브랜딩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한번쯤은 들어본 뉴욕의 슬로건이다. 로고는 작년에 세상을 떠난 밀턴 글레이저의 1977년 작품이다. 1970년대 뉴욕은 심각한 경기 침체로 파산을 걱정하는 상황이었다. 경제 불황이 심각해지면서 기업과 노조 사이의 갈등이 커졌고, 범죄율은 치솟았으며, 거주민 80만 명이 뉴욕을 떠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파산 위기에 내몰린 뉴욕에는 돌파구가 필요했다.

결론은 외부인이 많이 와서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게 하는 것, 즉 관광 활성화였다. 1977년 선출된 휴 캐리 뉴욕 주지사의 역할이 컸다. 그는 시장조사기관의 조언에 따라 볼거리 많은 타임스스퀘어, 조명이 비친 브로드웨이의 모습 등을 대표 이미지로 활용하고 자연환경과 금융센터 등을 내세우는 것을 홍보의 기본 방향으로 설정했다. 그리고 범죄, 교통 체증, 높은 노조 가입률 등의 내용은 아예 감출 것을 지시했다.

동시에 관광객에게 어필할 강력한 한 방이 필요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I love New York’이라는 슬로건이다. 슬로건은 ‘웰스, 리치 앤드 그린(Wells, Rich and Greene)’이라는 광고 회사에서 제작했으나 아직도 사용되는 ‘I♥NY’ 로고를 만든 이는 밀턴 글레이저였다. 버벌 브랜딩(슬로건)과 비주얼 브랜딩(로고)의 전설적인 사례는 이렇게 시작됐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훌륭한 작품이 전설의 반열에 놓일 수 있게 된 것은 작품에 대한 권리를 뉴욕시가 독점하지 않은 덕분이었다. 바로 지식재산권을 포기한 것이었다. 신의 한 수였다. 뉴욕은 이 로고에 대한 저작권을 갖지 않는 대신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로고를 활용한 상품을 만들어 팔 수 있게 했다. 예쁜데 무료로 쓸 수 있으니 로고는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먼저 관광객이 쉽게 살 수 있는 소품에 빠른 속도로 적용되기 시작했다. 배지도 유행하기 시작했다. I♥NY의 로고를 이용한 티셔츠, 컵 등 다양한 문화 상품은 뉴욕시의 중요한 수익원이 됐다. 뉴욕이 패션과 디자인 감각이 있는 도시로 자리 잡도록 만들었다.

외부인의 방문 제고를 위한 전략에서 시작됐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뉴욕 시민의 도시에 대한 애착과 자긍심도 커졌다. 암울했던 도시는 세계인이 사랑하는 곳이 되었다. 지난 45년 동안 뉴욕은 다양한 캠페인과 마케팅 활동을 펼쳤지만 슬로건과 로고는 단 한 번도 바꾼 적이 없다. 미국의 수도는 워싱턴 D.C.이지만 세계의 수도는 뉴욕이 되었다.

2001년 9월 뉴욕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테러 현장이 되기도 했다. 9·11 테러다. 이때 토종 뉴요커이기도 했던 밀턴 글레이저는 자신의 로고를 다시 디자인했다. 빨간색 하트의 왼쪽 아랫부분에 검게 불타버린 자국을 그려 넣었다. 세계무역센터는 뉴욕의 왼쪽에 있었다. 그리고 절절한 마음을 담아 몇 단어를 슬로건에 추가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뉴욕을 더욱 사랑한다고. I♥NY, 그 뒤에 따라붙는 ‘More than ever’는 뉴욕 사람의 간절함이었다.

만들어진 이래 한 번도 바뀐 적 없었던 슬로건과 로고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아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 밀턴 글레이저는 ‘아이 러브 뉴욕 모어 댄 에버(I♥NY More Than Ever)’를 포스터로 만들어 배포했다. 2001년 9월 19일 뉴욕데일리뉴스는 신문의 앞면과 뒷면에 이 포스터를 실었다. 포스터로 쓰라고 한 것이다. 이후 뉴욕의 거리 곳곳에는 이 포스터가 부착됐다. 이 새로운 로고는 뉴욕시에 의해 공식적으로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시민 차원에서 널리 확산돼 힘든 시절을 돌파하는 데 구심점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