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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원  세종대 경영경제대학장 전 대성합동지주 사장,  전 디큐브시티 대표, 전 CJ 그룹 전략총괄기획 부사장, 전 삼성경제연구소 전무,  전 삼성증권 리서치센터장
김경원 세종대 경영경제대학장 전 대성합동지주 사장, 전 디큐브시티 대표, 전 CJ 그룹 전략총괄기획 부사장, 전 삼성경제연구소 전무, 전 삼성증권 리서치센터장

1│잘못 알려진 나폴레옹의 유언

나폴레옹은 1815년 워털루에서 패하고 영국에 의해 세인트 헬레나라는 외딴섬에 유배됐다. 약 6년간의 유배 끝에 쓸쓸히 병사하면서 남긴 그의 마지막 유언은 ‘프랑스, 군대의 선봉, 조세핀(아내 이름)’이라는 세 단어였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어떤 이유에선지 “오늘 나의 불행은 언제인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복수다”라는 말이 최후의 말로 잘못 알려져 있다. 


2│등 부러질 때까지 버티는 낙타

아랍에 “낙타의 등을 부러뜨린 것은 마지막 바늘 한 개”라는 속담이 있다. ‘카라반(隊商)’은 ‘낙타 등에 짐을 싣고 떼를 지어 먼 곳으로 다니면서 교역하는 상인 집단’인데, 이 여정을 떠날 때는 낙타 한 마리에 보다 많은 짐을 실어야 이문이 커지므로 상인들은 낙타가 버틸 수 있는 한계까지 짐을 실으려 한다. 그런데 참을성 많은 이 동물은 짐을 한계치까지 실어도 힘든 내색 한 번 안 하다가 욕심이 지나친 상인이 ‘조금 더, 조금 더’ 하다 그 한계를 넘겨 짐을 실으면 갑자기 등이 부러지며 주저앉는다고 한다.


3│스태그플레이션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 다녔던 학원에서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말을 배웠다. 물가 급등과 경기 침체가 겹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1970년대 초 4차 중동전을 거치면서 아랍 세계가 석유 무기화를 선언하며 유가를 크게 올렸고, 이 여파로 크게 오른 물가 등으로 침체에 빠지게 된 세계 경제 상황을 묘사하려고 생겨난 말이었다. 당시 학원 선생님은 영어가 그리 능숙하지 않은 탓인지 이 말을 스태그(stag) 즉 ‘수사슴’과 인플레이션의 합성어라고 설명하면서 본인도 왜 이런 합성어가 나왔는지 궁금하다는 말을 덧붙인 적 있다. 필자가 한참 후에 대학에 들어가서야 그 말이 스태그네이션(stagnation·침체)과 인플레이션의 합성어인 것을 알고 실소했던 적이 있다. 스태그플레이션은 수요가 공급보다 많아 생기는 전형적인 수요 견인(demand-pull)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원자잿값 상승 등에 의해 비용이 크게 뛰며 생기는 비용 상승(cost-push) 인플레이션이다. 그런데 이것이 통화당국자의 입장에서 큰 고민거리가 되는 것은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면 경기 불황을 더 심화시키는 문제를 감수해야 한다는 점이다. 더구나 스태그플레이션 상황에서는 물가를 잡으려는 금리 인상의 약발이 잘 듣지 않아 금리를 계속 올리게 되고 그 약발이 듣는 징후가 나타날 때쯤에는 낙타 등에 올린 ‘마지막 바늘’처럼 이미 금리 인상이 과도하게 이루어져 경기를 필요 이상으로 고꾸라뜨리는 문제가 있다. 실제로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 미국 중앙은행의 수장인 폴 볼커(Paul Volcker)가 겪었던 일이다.


4│바람의 방향 잘 맞춰 태풍 버티면 ‘만선’

어린 시절에 필자의 집안은 배 몇 척으로 수산업을 했는데, 그중 한 배의 선장이 그 항구에서 몇 년 동안이나 최고의 어획고를 올렸었다. 신기한 것은 보통 태풍철에는 어선들의 실적이 좋지 않은데 그는 이 시기에 더 많은 고기를 잡아 오는 것이었다. 호기심에 그 선장 아저씨를 따라다니며 그 비법이 무엇이냐고 집요하게 물었더니, 대답해준 그의 말은 이랬다. “비결은 태풍이 부는 바다에서 잘 버티기 때문이다. 조업 중 태풍 예보가 뜨면 다른 배들은 모두 철수하지만 내 배만은 그 자리에 닻을 내리고 남아 바다에서 몇 시간 동안 태풍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이후 태풍이 바다 바닥까지 뒤집어 놓으니 이때 떠오른 플랑크톤을 따라 큰 고기 떼가 따라오고 여기다 그물을 던지면 바로 만선이다. 태풍에 버티는 중에 배가 침몰할 수 있는 위험이 문제이기는 하나, 배는 바람의 방향으로 뱃머리가 향해 있으면 태풍에도 끄떡없는 법이다. 단 바람의 방향을 잘 예상해서 제때 바람 방향으로 뱃머리를 돌려놓는 것이 중요한데 이는 선장의 경험, 판단력뿐만 아니라 미리 태풍의 예상 경로 등의 정보 수집 노력도 중요하다. 또한 태풍이 지나간 후 만선의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그물이 태풍에 손상되지 않도록 잘 보전해야 한다.” 

지금 세계는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의 긴 터널을 지나 터널 끝 빛을 보는 듯하다. 코로나19 신종 변이도 우려되지만, 백신과 치료제 개발이 계속 이뤄지고 있고, 주요국에서는 이미 집단 면역이 이뤄지고 있는 모습이다. 이 기간을 힘들게 보낸 각국 정부는 이 감염병과 싸우면서 지난 2년간 가라앉는 경제를 받치기 위해 통화 및 재정 정책을 총동원해 막대한 양의 돈을 풀었다. 여기에다 유통, 물류 부문에서 수많은 노동자가 해고됐고, 전 세계의 주요 생산 거점에서도 방역 목적의 봉쇄 등으로 생산 차질도 생겼다. 이 결과 작년 하반기부터 회복세를 보이던 미국 등 주요국의 수요 회복을 물류와 생산이 따라가지 못하는 데다 그간 풀린 돈이 기름을 부으면서 전형적인 수요 견인 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났다.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을 당하는 모습이었다. 이에 미국 중앙은행부터 금리 인상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런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원유, 천연가스값이 오르면서 이제는 비용 상승 인플레이션까지 가세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금리 인상 속도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베이비’ ‘빅’ ‘자이언트’ 등 그 속도를 묘사하는 단어가 계속 바뀌는 와중에 진짜로 큰 우려는 금리 인상이 ‘마지막 바늘’처럼 뒤늦게 작용해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불황을 파국적인 상황으로 몰고 갈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저기서 ‘퍼펙트 스톰’ 같은 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한국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지난 정부는 잘못된 정책으로 집권 초부터 과도한 금리 인하와 통화팽창 정책을 폈고 코로나19 팬데믹 대처 과정에서 이 기조가 심화되며 집값 폭등, 가계부채 폭증, 재정건전성 훼손 등의 구조적 문제를 안게 됐다. 물가와 환율 불안으로 불가피해진 금리 인상이 이런 시한폭탄의 기폭제가 될지도 많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단 하나 희망적인 것은 러시아의 전쟁수행 능력이 바닥에 가까워졌다는 언론 보도를 통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도 조만간 끝날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1970년대 초부터 한국 경제의 지난 궤적을 보면 항상 위기 이후에 기회를 잡아 성장동력으로 삼은 것을 보게 된다. 곧 다가올 확률이 매우 높은 ‘포스트 팬데믹, 포스트 워’ 시대에 한국은 매우 좋은 위치를 점하고 있다. 마치 ‘바다 한가운데에서 태풍을 견뎌낸 어선’의 모습과도 같다. 향후 수십 년간 인공지능(AI), 전기차, 친환경, 바이오 등 세계 경제의 주력으로 떠오를 신산업의 기초를 한국이 잡고 있기 때문이다. K반도체, K배터리, K조선, K바이오 등을 필두로 한류 바람을 타고 떠오른 K엔터, K푸드에다, 각국의 재무장 움직임에 큰 폭의 수요 증가 조짐이 보이는 K방산까지 한국 산업이 가지는 기회는 참으로 많아 보인다. 이는 거의 다 우리 기업과 기업인들의 노력 덕분이며, 지난 10여 년간, 특히 지난 진보 정부하에서 기업들의 활동을 제약하는 법과 규제가 엄청나게 증가한 가운데 이룬 귀한 성과다. 게다가 신산업의 ‘방향 예측’과 적기 투자 등 이들의 선전(善戰)이 없었다면 한국 경제는 팬데믹 위기를 잘 지나올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새 정부가 기업 및 기업인들에게 가해진 이런 부담을 줄여 준다면 한국 경제는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큰 기회를 잡아 도약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새 정부는 적어도 ‘그물’을 찢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