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석 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 기업 근무, ‘오타쿠 진화론’ 저자
이진석 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 기업 근무, ‘오타쿠 진화론’ 저자

“승객 여러분에게 안내 말씀… 드립니다. 이… 이 열차는 지금…”

기관사의 떨리는 목소리가 출근 시간 도쿄의 열차 안을 헤집는다. 끝까지 듣지 않아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이 간다. 열차의 급정거로 휘청거리던 승객들이 몸을 추스를 때부터, 몇 가지 비슷한 생각이 동시다발적으로 모두의 뇌리를 스쳤을 테다. ‘또 누군가가 뛰어내렸다’ ‘회사에 지각하겠군’ ‘오늘은 운이 없어… 이 무슨 민폐람’.

일본 국토교통성이 2005년부터 2014년까지 10년간 집계한 바에 따르면 도쿄·사이타마·가나가와 등 수도권 15개 노선에서 벌어진 ‘인신사고(人身事故)’ 수는 3145건. 인신사고란 ‘철도 인신(人身) 상해사고’의 줄임말이다. 열차 운전에 의해 사상자가 발생한 사고를 뜻한다. 충돌이나 탈선, 화재 등은 포함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철도에 사람이 들어가 벌어진 사고다. 수도권에서만 연간 300여 건의 인신사고가 발생하며 그중 60%가 자살이다.

적어도 이틀에 한 명은 열차에 치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를 받아들이는 감각은 무뎌지기 마련이다. 예정 도착시간을 훌쩍 넘은 열차에서 내려 개찰구를 빠져나오는 승객들은 익숙한 듯 역무원들이 나눠주는 지연증명서를 손에 쥔다. 손바닥 절반 크기의 종이에는 발생 일시와 지연된 시간 그리고 ‘민폐를 끼쳐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는 상투구가 적혀 있다. 평생을 안고 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짊어지는 것은 온전히 사고를 낸 기관사와 유해 뒤처리를 하는 일용직들의 몫이다.

일본 철도종합기술연구원은 출근시간인 오전 7~10시에 인신사고로 지연이 발생했을 때의 경제적 손실을 분석했다. 지연이 발생했을 때 승객의 76%는 운행 재개를 기다린다. 택시비가 비싼 일본, 특히 도쿄에서는 열차 외의 통근수단이 많지 않다. 서울에 비해 대중버스 노선이 다양하지 않고 운행 횟수도 적다. 연구에 따르면 승객 1만 명의 출근길이 30분 늦어졌을 때 경제적 손실은 984만엔(약 9600만원)이다. 1분이라는 시간에 32.8엔의 가치를 매겼을 경우다.

인신사고는 중요한 계약을 위한 약속에 늦게 된 회사원, 제 시간에 시험장에 도착하지 못한 수험생에게는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갈 수도 있는 민폐다.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하면 철도회사가 유족들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청구한다’는 소문은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지만 사실은 아니다.

그럼에도 일본에서 인신사고는 오랜 시간 방치된 문제였다. 스트레스, 우울증, 채무 등 근본적인 원인이야 각자의 몫이겠지만, 이를 방지하려는 대책은 시원찮았다. 가장 간단히 생각할 수 있는 스크린도어의 효과는 절대적이다. 도쿄 중심부를 순환하는 야마노테선(山手線)은 정차역 29개역 중 23개역에 스크린도어를 설치했다. 이후 해당 역의 인신사고로 인한 자살자는 0명이 됐다. 대신 많은 이용자 수에도 불구하고 스크린도어를 설치하지 않은 시부야·신주쿠·도쿄역에서는 여전히 사망자가 끊이지 않는다.

사실 일본 기차역은 스크린도어를 설치하기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같은 선로를 지나는 열차의 종류가 다양해 규격을 통일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막대한 비용은 차치하더라도, 일부 노후화된 역은 스크린도어 무게를 견딜 수 없을 만큼 승강장의 지반이 약하다. 무게를 줄이고 다양한 열차 규격에 길이를 조절해 대응할 수 있는 가변식 스크린도어 등의 도입을 검토하고 있지만 진전이 더디다.

결국 정부가 나섰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2020년 도쿄올림픽 개최 전까지 도쿄 내 모든 역에 스크린도어를 설치할 것을 지시했다. 2027년까지는 일본 전역에 스크린도어를 설치하기로 했다. 예상 비용은 1조엔에 달한다. 정부와 철도 사업자들이 절반씩을 낸다.

일본 열차가 안고 있는 문제는 인신사고뿐만이 아니다. 열차 내 성추행은 연간 3400여 건에 달한다. 성범죄 신고율이 낮은 일본의 특성상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치한 행위가 발생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일부 노선에서는 여성 전용차량을 운영하지만 그 효과는 미미하다는 평가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일본 여성의 66%가 치한 피해를 입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도쿄에서 가장 혼잡한 전철역인 신주쿠 역에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도쿄에서 가장 혼잡한 전철역인 신주쿠 역에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열차 내 성추행·폭행사건 빈발

숱한 치한 행위만큼, 무고한 승객이 성추행범으로 몰리는 일도 벌어진다. 만원 열차에서는 남성 승객들이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독특한 포즈를 취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팔짱을 끼거나,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손잡이를 잡는다.

수오 마사유키 감독의 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2007)’는 2005년 요코하마에서 열차 내 성추행 혐의로 체포돼 실형을 선고받은 한 남성의 사례를 모티브로 삼았다. 이 남성은 무죄를 주장하며 항소했지만 1년 6개월의 징역이 확정됐다. 죄목은 ‘민폐방지조례 위반의 치한사범’이다.

폭행사건도 만만치 않다. 좁은 차량 안에서 몸이 부딪히거나 발을 밟아 벌어진 실랑이 끝에 분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이어폰에서 새어나오는 음악소리나 앞으로 돌려 메지 않은 가방, 넓게 펼친 신문과 마스크를 하지 않은 채 내뱉은 재채기가 민폐로 여겨져 싸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연간 2500여 건, 하루 평균 7건의 역 내 폭행사건이 벌어진다. 역무원이 승객에게 두들겨 맞는 일도 한 해 800건 이상 벌어진다.

이러다 보니 일본의 역무원들은 극한의 스트레스를 견뎌내야 한다. 이들의 가장 큰 책임은 열차가 제 시간에 출발하고 도착하게 하는 일이다. 일본 철도회사의 정시운행 준수는 강박관념과도 같다. 지난해 11월, 동일본여객철도주식회사(JR東日本)는 최근 열차를 예정시각보다 20초 빨리 출발시켰다는 이유로 보도자료를 내고 사죄해야 했다. 단 7분 만에 차량 내 청소를 끝내고 완벽하게 승객을 맞이하는 신칸센은 이들의 크나큰 자랑거리다.

일본인들은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큰 수치로 생각한다는 게 널리 알려진 정설이다. 외부에서는 ‘높은 시민의식’으로 평가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이 통근시간 열차에서 견뎌내는 스트레스는 위험 수준에 올랐다.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규범에 얽매인 이들 중 일부는 인내의 끈이 끊어지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

가수 오자키 유타카(尾崎豊)는 35년 전에 ‘열차 안 서로를 미는 사람들의 등에서 드라마를 느낀다’(17세의 지도)고 노래했다. 매일 아침 콩나물시루 같은 도쿄의 통근열차에 시달리며 그만한 감성도 옅어져간다. 언젠가부터는 걱정이 앞선다. 부디 시비에 휘말리지 않기를. 옆에 선 여성이 내 움직임을 오해하지 않기를. 그리고 오늘도 무사히 회사에 도착해 모두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