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연정 스탠퍼드 경영학석사(MBA), 핌코(PIMCO) 미국 회사채 분석 담당 www.inclineim.com
양연정 스탠퍼드 경영학석사(MBA), 핌코(PIMCO) 미국 회사채 분석 담당 www.inclineim.com

 1│스탠퍼드 대학이 있는 캘리포니아주 팰로 앨토는 ‘실리콘밸리’가 시작된 곳이다. 팰로 앨토 시내 유니버시티 애비뉴(University Avenue) 근처에 있는 HP 창고(Garage)를 미국 정부가 실리콘밸리의 탄생지로 공식 지정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윌리엄 휴렛과 데이비드 팩커드가 1938년 HP를 창업한 장소다.  

여기서 몇 블록 떨어진 유니버시티 애비뉴 165번지는 실리콘밸리에서 ‘행운의 장소(Lucky Spot)’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구글과 로지텍, 페이팔 등 잘나가는 정보기술(IT) 기업의 창업자들이 이 건물을 거쳐갔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보면 20명 정도의 인원을 수용하기에도 빠듯한 크기다. 성장세에 접어든 이들 기업이 이 건물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창고에서 출발한 스타트업들이 굴지의 IT기업으로 성장한 발판을 마련한 곳인 만큼 재미있는 일화도 많다. 이를테면 가난했던 창업자가 인근 양탄자 가게에서 구입 대금을 현금이 아닌 회사 지분으로 준 덕에 주인이 엄청난 거부가 되었다는 식이다. 

미국 정부가 실리콘밸리의 탄생지로 공식 지정한 캘리포니아주 팰로 앨토의 ‘HP창고’. 사진 트위터 캡처
미국 정부가 실리콘밸리의 탄생지로 공식 지정한 캘리포니아주 팰로 앨토의 ‘HP창고’. 사진 트위터 캡처


2│실리콘밸리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금융과 법률 등 기술 발전을 지탱하는 시스템 확립이 필수적이다. 팰로 앨토의 중심가를 관통하는 페이지 밀 로드(Page Mill Road) 양 옆에는 어림잡아 약 30개의 로펌이 밀집해 있다. 이들 로펌들은 스타트업 창업과정부터 특허 출원과 관리, 소송, 기업 인수∙합병(M&A) 등 다양한 법무 서비스를 제공한다. 새로운 기술의 특허 출원 가능 여부와 상용화를 위한 법적 이슈들을 검토하고, 소송 등 잠재적 위험 요소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것도 중요한 업무다. 특히 이전에 없었던 혁신 기술의 경우, 기존의 법 체계에서 분명한 답을 도출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 다각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블록체인과 암호화폐가 좋은 예다. 


3│세계적으로 블록체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관련 특허 출원 건수는 매년 늘어나는 추세다. 미국은 블록체인 특허 출원의 양과 질에서 압도적인 선두를 유지하고 있다. 누구도 배타적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블록체인의 특성 때문에 관련 특허 출원은 주로 보안, 운용, 활용 등 주변 기술에 몰려있다. 미국의 최대 유통업체 월마트는 블록체인을 적용한 다수의 특허 기술을 보유 중이다. 

지난해 5월 드론 배송 시스템에 블록체인을 적용한 특허를 마친 데 이어, 올 6월에는 블록체인 데이터베이스에 환자의 중요한 의료 기록을 저장하기 위해 기술의 특허를 획득하는 등 블록체인 관련 특허를 늘려가는 중이다. 독일 자동차 업체 폴크스바겐은 얼마 전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차량 간 커뮤니케이션을 활성화하는 기술 특허를 출원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블록체인 관련 특허를 출원한 기업은 뱅크오브아메리카(BoA)다.

미국 특허청(USPTO)의 블록체인 관련 특허 출원 기준은 매우 까다롭다. 블록체인 관련 기술은 소프트웨어 성능 향상에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미국 특허청이 특허를 잘 내주지 않는 영역이다. 성공 확률을 높이려면 내용 설명에 비즈니스나 금융 관련 용어는 될 수 있는 대로 피하는 것이 좋다. 독창성(Novelty)과 비자명성(Non-obviousness)을 부각시키고 하드웨어 관련  내용을 포함시키면 도움이 된다.  

블록체인 기술과 관련된 다양한 라이선싱 계약도 빠르게 성장하는 영역 중 하나다. 초기 기술 개발자는 특허를 통해 투자 비용을 충당하고 배타적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다. 하지만 오픈 소스를 기반으로 상호 경쟁하며 성장하는 소프트웨어와 블록체인 기술의 특성을 고려하면 특허를 통해 타인의 접근을 제한하는 것은 단점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같은 네트워크 안의 기업끼리는 특허 침해 소송을 걸지 않겠다는 방어적 특허 계약(Defensive Patent License)을 맺거나, 공동으로 특허를 구매해 상호간 무상으로 라이선싱을 제공하기도 한다. 

블록체인 산업이 초기 단계인 만큼, 관련 특허 서비스도 변화하며 성장 중이다. 블록체인 기술 자체가 아직 초기 단계라 관련 산업 규범(Industrial norm)이 명확하지 않다. 또 기술 특성상 특정 기술의 소유권자를 명시하거나 관련 기술의 가치를 정확히 환산하기 어렵다. 특허 관련 소송과 판례도 드물다. 그래서 초기 시장 진입자들은 특허 출원과 라이선스 계약을 통해 시장 선도자로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 한다. 블록체인 관련 기업이라면 이런 움직임에 대응해 신상품 개발 시 사용 기술에 대한 특허를 꼼꼼히 점검, 소송에 휘말릴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라이선스 계약을 통해 비용을 낮추는 전략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4│법률 서비스가 블록체인 기술을 지원하는 것처럼 블록체인 기술도 법률 서비스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에 따르면 세계 100대 로펌의 4분의 1(지난해 기준)이 이더리움을 기업 환경에서 사용하기 위해 출범한 엔터프라이즈 이더리움 얼라이언스(EEA)에 가입되어 있다. 대형 로펌은 물론 중소형 로펌들도 블록체인 기술을 접목해 새로운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블록체인 기술이 법률 시장의 효율성과 비용구조를 개선할 것이라는 기대도 크다. 블록체인 기술이 부동산과 주식 거래 등의 분야에서 이미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만큼, 관련 기술 접목을 통해 법적 증거나 계약서의 진위 여부를 파악하고 입수 경위를 추적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또 수작업으로 이뤄져 온 반복적인 문서 작성 업무가 줄어들면 변호사들은 문제 해결과 고객 상담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법과 규제는 기술 혁신의 장애물이 아니라,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신기술 도입으로 인한 새로운 도전과 질문에 해결책과 답을 찾아주는 것이 실리콘밸리 변호사의 역할이다. “구글 변호사는 (언제나) ‘예스’라고 말한다(Google lawyers say Yes)” 구글 법률팀 대표 변호사 켄트 워커(Kent Walker)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