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훈한국외국어대 졸업, 한화 갤러리아 상품총괄본부 기획팀
장지훈
한국외국어대 졸업, 한화 갤러리아 상품총괄본부 기획팀

“반도체 집적회로의 성능은 18개월마다 두 배씩 증가한다.” 1965년에 주창된 그 유명한 무어의 법칙이다. 해당 법칙의 주창자인 고든 무어가 동료인 로버트 노이스와 함께 설립한 인텔은 그 스스로 무어의 법칙을 증명하는 주체로 반도체 시장의 기술 발전을 이끌어왔다.

반도체의 설계와 생산을 모두 해내는 종합 반도체 기업(IDM)으로 각 분야에 걸쳐 업계 최고 수준의 역량을 두루 갖춘 인텔에 뚜렷한 적수가 없어 보였다. CPU 설계 측면에서는 AMD 정도가 유의미한 인텔의 경쟁자였는데, 애슬론의 히트로 주가를 올리던 AMD가 ‘불도저’ 아키텍처에 이르러 심각한 발열 문제로 시장의 외면을 받으면서 시장은 점점 더 확고한 인텔 1강 체제로 굳어갔다.

생산 측면에서 살펴보면 인텔의 압도적인 기술력에 관한 부분이 더 명확히 다가오는데, TSMC를 비롯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들의 기술 추격이 어느 정도 현실화한 2010년 당시에도 여전히 인텔은 가장 빠르게 14나노 공정 양산에 돌입한 기업이었다. 트라이 게이트(핀펫·3면을 게이트로 활용해 절연효과를 높이는 반도체 구조), 하이-K 메탈 게이트(전류 누설을 감소시키는 신물질)와 같은 혁신적인 공정 기술도 인텔에 의해 세상에 등장했다.

하지만 2020년이 된 지금, 인텔은 설계와 생산 양 축에서 모두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설계와 관련해서는 AMD의 추격이 거세다. 앞서 언급한 불도저 사태 이후 절치부심한 AMD는 라이젠이라는 역작을 등장시키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생산 분야는 훨씬 더 심각하다. 공정 미세화에서는 이미 경쟁자들의 추격을 허용했고 이미 경쟁자들은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인텔이 14나노 공정에서 다음 세대인 10나노 공정으로 이행하는 데 걸린 5년간, TSMC와 삼성은 조만간 5나노를 넘어 3나노 공정을 향해 가고 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한 이유를 고민하며 반드시 살펴봐야 하는 것이 정보기술(IT) 산업의 패러다임 변화다. 기본적으로 1인 1보급이 보편적인 스마트폰과 2.5명 이상으로 이뤄진 가구를 기준으로 보급되는 PC 수요의 특성 그리고 상대적으로 긴 PC의 교체 주기 등 기본적인 부분만 비교해봐도 수요 측면에서 스마트폰은 PC에 비해 압도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사의 제품만을 생산하는 인텔은 여러 기업의 반도체를 함께 생산하는 파운드리 기업들과 경쟁에서 매우 불리한 조건에서 싸움을 이어왔다.

인텔은 설비를 구축하는 데 드는 천문학적 비용을 대부분 자사의 제품만을 생산하며 감당해야 했고, 설계하는 데 필요한 수많은 선결 과제 역시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반면 경쟁자들의 경우 스마트폰으로 패러다임 전환 속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한 모바일 AP(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 통신칩 물량을 그대로 흡수하며 고정비를 효율적으로 상각해나갔다. 또 그들에게 수주를 안긴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들과 힘을 모아 공정 활용의 최적 설계를 함께 찾을 수 있었다.

스마트폰 시대의 도래와 물량의 열위, 설계와 생산에 대한 해답을 모두 홀로 제시해야 하는 인텔이 파운드리와 경쟁에서 공정 경쟁력이 비교 열위에 놓인 것은 어쩌면 예견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2020년이 된 지금 인텔의 미래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극자외선(EUV) 공정 도입을 병행하며 2021년 7나노 공정으로 직행하겠다던 인텔의 컨틴전시 플랜은 2022년 말 혹은 2023년 초로 다시 한번 연기됐다.

이어 신제품 개발을 주도하던 인텔의 최고기술책임자(CTO) 머시 렌더친탈라가 사임하고 사업부가 다시 한번 재편되면서 시장은 인텔에 기술적, 운영상의 명확한 문제가 있음을 확신하고 있다. 스마트폰으로의 시대 전환 흐름을 정확히 공략한 애플이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으로 부상하는 동안, 넘볼 수 없을 만큼 거대해 보였던 인텔의 시총은 팹리스 기업 엔비디아의 추월마저 허용했다. 거대한 CPU 제국이 조금씩 무너져 가고 있다.


밥 스완 인텔 CEO. 사진 블룸버그
밥 스완 인텔 CEO. 사진 블룸버그

인텔은 여전히 견고하다

인텔이 위기에 놓여있다는 점에 대해 시장에서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하지만 그 정도가 어느 수준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우선 10, 7, 5 등의 숫자로 대변되는 각 사의 미세공정 기술력에 대한 평가 차이가 이견이 발생하는 중요한 원인이다. TSMC를 비롯한 파운드리 기업들이 이야기하는 미세공정 숫자는 마케팅 요소가 다분한 숫자다. 숫자를 도출하는 통일된 기준 없이 제조사들의 발표에 따라 정해지는 임의의 숫자에 불과하다. 일례로 인텔과 삼성, TSMC의 공정을 동일 세대를 기준으로 정리해보면 인텔의 공정이 밀도가 높고, TSMC의 1세대 7나노 공정은 인텔의 10나노 공정과 비슷한 집적도를 구현하는 식이다.

물론 현재 파운드리들은 5나노 공정의 양산에 다다른 상황이기 때문에 이제 막 10나노에 들어선 인텔과 공정 수준을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우리 눈에 보여지는 숫자, 10과 5의 차이만큼 인텔이 공정 열위에 놓인 상황이 아니라는 점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두 번째로 살펴볼 부분은 IT의 패러다임이 PC, 스마트폰에서 다시 데이터 센터로 넘어가는 시기라는 점이다. 인텔이 CPU 수급난 속에서도 주력해왔던 곳이 바로 데이터센터 시장이다. PC 시장에 비해 표준화가 상대적으로 어려운 서버 시장에서 제온 CPU를 비롯한 인텔의 서버 솔루션은 그 자체로 업계 표준이며 수요자들에게 가장 안정성 높은 선택지다.

이미 인텔 기반의 데이터 센터를 구축해놓은 기업들은 기존 설비와 연계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앞으로 인텔이 공정 열위를 확실히 극복하지 못하더라도 서버용 CPU가 현재의 점유율을 어느 정도 유지해 나갈 것으로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점은 이제 인텔 역시 파운드리들의 최신 공정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밥 스완 최고경영자(CEO)는 7월 실적 발표에서 “자체 제조를 고집하지 않고 외부 파운드리에 칩 생산을 맡기겠다”는 방향성을 다시 한번 분명히 했다. TSMC에 GPU(그래픽을 처리하는 로직 반도체)의 생산을 맡기고 이후 CPU를 비롯한 인텔의 메인 제품들이 최신 공정 파운드리에서 제조되는 것도 기대해 볼 수 있는 상황이다.

만약 현재 공정 열위 속에서도 AMD의 제품에 비해 성능우위를 점하고 있는 인텔의 제품이 AMD와 동등한 조건에서 생산되는 순간 데이터 센터 시장은 물론이고 PC 컨슈머 시장에서도 AMD와 CPU 경쟁 양상에 다시 한번 변화가 찾아올 것이다.

PC 컨슈머 시장의 위기를 근거로 인텔의 몰락을 예견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점이다. 반세기 동안 IT 시장을 이끌어온 CPU 제국에는 아직 충분한 기회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