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금융사들의 보수적인 데이터 정책 때문에 오픈 플랫폼이 쉽게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 / 금융결제원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시대가 열리면서 기업들이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약국이나 대형 마트, 패션회사처럼 데이터와 관련 없어 보이는 업종에서도 데이터 과학자를 고용하지 않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예컨대 디즈니 같은 기업도 디즈니월드와 리조트 이용자의 움직임과 패턴을 기록하고 분석하기 위해 빅데이터 분야에 1조원을 투자했다. 빅데이터 덕분에 디즈니월드 이용자가 20%나 늘었다고 한다.

월스트리트나 핀테크 산업 같은 금융 분야는 더욱 적극적으로 새로운 기술을 활용한다. 골드만삭스는 주식을 사고파는 트레이더가 2000년대만 해도 600명에 달했는데, 지금은 단 두 명만 남았다. 대신 AI 기술을 관리하는 개발자가 크게 늘었다. JP모건은 코인(COIN·Contract Intelligence)이라는 AI를 도입해서 애널리스트 노동 시간을 연 36만 시간 정도 절감했다. 제스트 파이낸스라는 금융 회사는 개인의 생활 패턴이나 인터넷 이용 현황, 쇼핑 현황 등을 파악해서 신용도를 측정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사치스러운 소비 습관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된 사람과 갑작스러운 병원비로 신용불량자가 된 사람을 같은 선상에 놓으면 안 된다는 발상에서 나온 기술이다.

브라이트리온(Brighterion)이라는 회사는 개인의 소비 패턴을 분석해서 평소와 다른 이상 소비를 발견하면 카드사에 알려주는 솔루션을 개발하기도 했다. 평소 패턴과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막는 것도 아니고,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크리스마스 시즌같이 과소비가 있음직한 기간에는 이상 패턴을 허용하는 기능까지 갖추고 있다.

빅데이터와 AI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해외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한국 금융업계에서도 첨단 기술에 대한 관심이 높다. 한국 금융 기업들도 앞다퉈서 AI 전문가를 고용하고, 관련 콘퍼런스도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많은 자금과 인력이 투입되는 것에 비해 눈에 띌 만한 성과가 없는 게 현실이다. 급기야 AI는 효용성이 없다는 회의론까지 한국 금융업계에서 나오고 있다.

같은 AI 기술을 도입했는데, 월스트리트와 한국 금융업계는 왜 정반대의 결과를 얻고 있는 걸까. 사실 AI 기술 자체는 대부분 공개돼 있는 데다 AI 전문가가 있다고 해서 좋은 결과물을 얻는다는 보장도 없다. AI 시스템의 성능을 좌우하는 건 결국 AI에 투입하는 데이터의 양과 질이 얼마나 좋으냐에 달려 있다. 한국 금융업계에서 AI를 도입해서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는 건 ‘학습시킬 데이터가 없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에서는 개인종합자산관리(PFM) 서비스가 뜨고 있다. 대표적인 서비스가 민트(MINT)다. 민트는 금융자산은 물론 부동산 같은 비금융자산까지 한꺼번에 확인하고 맞춤형 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앱이다. 은행과 증권사, 연금 등을 하나의 애플리케이션(앱)에서 통합 관리할 수 있는 건 오픈 API(응용프로그램 인터페이스·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 덕분이다. API는 앱 개발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를 말한다. API를 활용하면 다른 사람이 만들어놓은 프로그램을 내 프로그램으로 손쉽게 사용할 수 있다. 블로그 API를 가져오면 블로그에 직접 들어가지 않고도 글을 쓸 수 있고, 유튜브 API를 쓰면 내가 원하는 곳에서 동영상을 볼 수 있게 되는 식이다. 과거에는 API를 기업 내부에서만 쓰기 위해 폐쇄적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최근에는 이를 대중에게 공개하는 ‘오픈 API’가 일반적인 방식이 되고 있다. API를 개방하면 서비스 이용자가 스스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면서 서비스를 더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방송국에서만 동영상 콘텐츠를 만들었는데, 최근 들어 사람들이 직접 동영상을 찍어서 올리는 유튜브가 등장하면서 동영상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한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오픈 API 시대가 되면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과 이용자 모두 새로운 데이터를 얻고 더 발전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 수 있게 됐다. 스트리밍 음악 서비스 업체인 스포티파이는 오픈 API를 통해 이용자의 음악 취향을 분석하고 이에 맞춰서 음악을 추천해주는 서비스를 고안했다. 금융업계도 마찬가지인데, 미국 금융업계는 API의 90% 정도를 오픈했다. 미국 핀테크 업체들은 오픈 API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이용자의 편의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유럽연합(EU)도 2016년 오픈 API를 전면 허용했다.

미국의 맞춤형 자산관리 서비스 앱인 민트. / 민트 캡처


오픈 API 외면하면 AI 활용도 낮아져

인터넷 세상의 만국 공통어가 되고 있는 오픈 API지만, 한국 금융업계에서는 제대로된 대접을 받지 못한다. 미국의 인기 자산관리 앱인 민트만 해도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서비스라는 반응이 많다. 한국 핀테크 업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한국에서는 민트 같은 앱이 절대 나올 수가 없다”고 단언한다. 민트 같은 서비스가 가능하려면 은행이나 증권사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를 공개해야 하는데, 개방과 공유에 보수적인 한국 금융업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은행이나 증권사 입장에서는 오픈 API에 참여하지 않아도 기존 사업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내는데, 굳이 자신들의 사업 영역이 침범당할 수도 있는 새로운 서비스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 기업들도 API나 오픈 API의 중요성을 알고는 있다. API 개발의 중요성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한국 기업이 70%나 됐다. 문제는 실천이다. 같은 조사에서 API 개발을 시도한 적이 있다고 한 기업은 18%밖에 되지 않았다. API 개발에 나서더라도 기업들이 API를 기존 서비스의 부가기능 정도로만 여기기 때문에 결국에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끝나는 경우가 많다. API는 한 번 개발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업데이트해야 이용자들이 믿고 사용할 수 있다.

일회성으로 API를 개발하면 오히려 이용자의 외면을 받는 이유만 늘어나게 되는 셈이다. 하물며 오픈 API 개발은 말할 것도 없다. 한국에서도 2016년부터 은행권 공동 API 개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지만, 복잡한 이용자 인증과 건당 400~500원에 달하는 높은 수수료 때문에 실효성이 없다.

AI를 금융 서비스에 접목하기 위해서는 양질의 데이터가 있어야 한다. 이런 대규모의 데이터를 하나하나 모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수많은 API를 통해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시너지를 내는 게 실현 가능한 방법일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빅데이터는커녕 스몰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는 API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에서 유행이라고 빅데이터나 AI 기술 개발에 나서는 건, 도로도 깔지 않고 수퍼카부터 만들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한국에서도 의미 있는 움직임들이 있다. 네이버와 카카오에서 다양한 오픈 API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정부에서도 공공데이터를 개방하는 계획을 공개했다. 이런 움직임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기업들이 API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AI나 빅데이터를 외치기에 앞서 기초라고 할 수 있는 API에 대한 확실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차근차근 스몰데이터부터 수집하고 분석해나가는 환경을 만들고 난 뒤에야 빅데이터와 AI 시대가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