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석 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 기업 근무, ‘오타쿠 진화론’ 저자
이진석 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 기업 근무, ‘오타쿠 진화론’ 저자

“괜찮아, 남자애도 공주님이 될 수 있어!”

일본 여자아이들에게 압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애니메이션 ‘허긋토! 프리큐어(HUGっと!プリキュア)’의 한마디 대사가 일본 성소수자 사회를 뒤흔들었다. 소녀들이 전사로 변신해 악을 물리친다는 내용을 담은 이 애니메이션은 2004년 첫 방영된 이래 ‘미소녀전사 세일러문’에 이어 국민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6월 10일 공중파 TV아사히를 통해 방영된 프리큐어의 새 에피소드는 보수적인 젠더관을 크게 뒤흔드는 내용을 담았다. 주인공 소녀 중 한 명은 ‘여자도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주제를 담은 패션쇼를 준비하고 있었다. 소녀의 오빠는 “영웅은 남자를 위한 말”이라고 힐난한다. 그런 오빠가 악당에게 잡혀가자 여자아이들이 전사로 변해 구출에 나선다. 오빠는 “이러면 내가 공주님 꼴이 되지 않느냐”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이 에피소드가 방영된 직후 트위터에서는 5000여 건의 관련 트윗이 쏟아졌다. 상당수가 ‘용기를 얻었다’는 성소수자들의 목소리였다. 비교적 성(性)문화가 개방적인 것으로  알려진 일본이지만, 아이들이 보는 만화에서까지 가부장적 젠더관을 부정하고 나선 것은 ‘세상이 변했다’는 의미를 담은 일종의 신호로 여겨지는 듯하다.

일본 사회에서 젠더관이 빠르게 변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 몇 년이다. 도쿄도 시부야구와 세타가야구는 2015년 동성을 ‘파트너’로 인정하는 조례안을 가결하고 ‘준결혼’ 관계를 인정하는 증명서를 발급하기 시작했다. 대기업 파나소닉은 2016년 동성 커플을 결혼에 해당하는 관계로 인정하는 사내 규정을 도입했다. ‘여장남자 교수’로 유명한 야스토미 아유무(安富歩)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교수는 오는 7월 사이타마현 히가시마쓰야마에서 열리는 시장선거에 출마를 선언했다.

매년 4~5월 일본의 황금연휴 기간에 맞춰 요요기공원에서 열리는 도쿄 레인보우 프라이드 위크에 올해 사상 최대 규모인 7000여 명이 모였다. 축하 공연에는 인기 가수 하마사키 아유미(浜崎あゆみ)가 등장했다. 도쿄 도심 곳곳에 위치한 외국계 기업들은 6월을 LGBT(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 임직원을 격려하는 ‘프라이드 먼스(Pride Month)’로 지정하고 다양한 사내 행사를 열고 있다.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 성소수자들은 지금처럼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도쿄 신주쿠 2번가는 이들의 오랜 피난처다. 일본을 대표하는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가 태어난 이곳은 매춘부들의 넋을 기리는 사당이 있을 만큼 유명한 환락가였다. 1945년 패전 직후 일본 최초의 게이바가 들어서면서 신주쿠 2번가는 ‘게이들의 성지’로 거듭났다.

이곳이 성황을 이루게 된 배경은 흥미롭다. 근처 가부키초가 야쿠자들의 세력 다툼으로 험악한 분위기에 둘러싸인 반면, 신주쿠 2번가는 ‘어쨌거나 몸은 남자인’ 접대부들이 강한 결속력으로 집단을 이루고 있었으므로 폭력단의 개입이 뜸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마음 편하게 술자리를 즐기고 싶은 여성들과 색다른 경험을 원하는 샐러리맨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게이바는 450여 곳으로 늘어났다. 신주쿠 2번가의 존재감에 힘입어 인근에는 레즈비언을 위한 ‘백합의 샛길’이 생겨났다.

버블 경제로 들끓던 1990년대 일본은 공전의 ‘게이 붐’에 휩싸였다. 신주쿠 2번가를 배경으로 한 히루마 히사오(比留間久夫)의 소설 ‘YES YES YES(1989)’가 일본 문예상을 수상하며 사회적 관심을 끌었다. 광범위한 표현의 자유를 토대로 일본 대중문화에는 동성애를 다룬 작품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서브컬처(subculture)계에서는 ‘백합물(여성 간 동성애)’이나 ‘보이스러브(BL·남성 간 동성애)’가 고유의 장르로 정착했다.

이처럼 일본의 성소수자는 대중문화를 토대로 사회에 수용돼 왔다. 최근 일본 연예계에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여장 개그맨 ‘마쓰코 디럭스’는 어릴 적부터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인지했고, 게이 잡지 기자를 거쳐 연예계에 데뷔해 ‘국민 MC’가 됐다. 트랜스젠더 겐킹, 여장남자인 미쓰 망그로브도 일본 TV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연예인들이다. 일본 여성들은 ‘여자보다 더 여성미를 추구한다’며 찬사를 보낸다.

따지고 보면 여장남자, 남장여자가 등장하는 일본 예능의 역사는 짧지 않다. 에도시대에 시작된 전통 공연예술인 가부키는 남성 배우가 기모노를 입고 여성의 역할까지 소화한다. 이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헤이안시대(794~1185년) 남장 무희인 시라뵤시(白拍子)가 있다. 동성애자인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의 칼’에서 구시대 일본의 사무라이, 승려 등 고위 계급에게 동성애란 공인된 쾌락이었다고 썼다.

1914년 창립된 다카라즈카 가극단은 소속 배우 전원이 미혼 여성이다. 남성 역할을 맡는 단원은 일본 여성들에게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를 누린다. 대표작인 ‘베르사이유의 장미’는 남장여자 오스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만화가 원작이다. 

이 극단이 본거지를 두고 있는 효고현 다카라즈카는 2016년부터 관서(関西)지방 최초로 동성결혼을 인정하고 있다. 다카라즈카 출신으로 일본 LGBT 지원활동에 종사하고 있는 히가시 고유키(東小雪)는 2013년 도쿄 디즈니랜드에서 열린 동성결혼식 사회를 맡았다.

일본 애니메이션 ‘허긋토! 프리큐어’의 한 장면. 사진 TV아사히 화면 캡처
일본 애니메이션 ‘허긋토! 프리큐어’의 한 장면. 사진 TV아사히 화면 캡처


일본의 남녀 평등도는 세계 114위

이처럼 성소수자의 인권이 나날이 존중되고 있는 일본이지만 대조적으로 남녀 성평등이나 인종차별 문제는 답보 상태에 머물고 있다. 

퓨(PEW)리서치센터에 따르면 일본은 동성애자 수용의식이 세계에서 열 번째, 아시아에서는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일본 법무성은 2017년 설문조사에서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약 40%가 차별 행위를 당한 적이 있다고 발표했다. 2018년 세계경제포럼(WEF)의 남녀 평등 국가 순위에서 일본은 114위였다. LGBT의 성적 정체성은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여전히 여성의 사회 진출을 저해하는 풍토, 아시아인과 유색인종, 심지어는 출신에 따라 자국민마저 차별의 대상으로 삼는 배타적인 태도는 기이한 모순을 빚는다.

덴쓰종합연구소는 2015년 일본 전체 인구의 약 7.6%가 성소수자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왼손잡이나 혈액형이 AB형인 사람보다 많다. 이들의 소비 규모는 연간 6조엔(약 59조원)에 달한다는 분석도 있다. 경제활동의 주체이자 정치적 영향력을 낼 수 있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거대 집단이 된 것이다. 기업들은 LGBT에게 친화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국회의원들은 관련 법안을 내놓는다.

오래전부터 용인돼 왔던 동성애가 대중문화를 통해 친숙함을 더했고, 양적 증가로 세력화된 셈이다. 결국 일본에서 성소수자의 입지가 넓어진 것이 딱히 인권의식의 발로라기보다는 쾌락에 관대하고 미의식을 추구하며 집단에 약한 고유의 특성에 따른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누군가 또 쏘아붙여주지 않으려나. “괜찮아, 누구라도 평등할 수 있어”라고.


Keyword

LGBT
레즈비언(lesbian)과 게이(gay), 양성애자 (bisexual), 트랜스젠더(transgender)의 앞 글자를 딴 것으로 성소수자를 의미하는 대표적인 용어다. 최근에는 무성애자(Asexual), 간성(Intersex), 성적 지향에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Questioner)을 더해서 'LGBTAIQ'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뀌면서 LGBT를 지지하는 글로벌 기업들도 늘고 있다. 구글, 애플, 페이스북 등 실리콘밸리 60여개 IT 기업이 동성 결혼을 지지한다는 의견서를 미국 연방대법원에 제출한 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