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석 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 기업 근무, ‘오타쿠 진화론’ 저자
이진석
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 기업 근무, ‘오타쿠 진화론’ 저자

일본은 관민(官民)사회다. 정부가 국가의 운영 주도권을 쥐고 시민들이 순응한다. 정부의 공식 자료에서도, 신문과 방송에서도 당연하다는 듯 관(官)을 민(民)의 앞에 둔다. 한국에서는 민관협력이라고 쓰지만 일본에서는 관민협력이 공식 표기다.

중앙부처 공무원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던 것이 최근까지의 일본이다. 일상생활에서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규칙들, 예컨대 쓰레기의 배출 요일이나 도로의 간격 같은 촘촘하고 세밀한 규정 하나하나에 그 흔적이 배어있다. 1990년대 ‘주식회사 일본’의 탄생은 정부가 제시한 발전 방향에 기업이 일치단결해 빚어낸 산물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2001년까지 일본 사회를 좌지우지한 것은 ‘관료의 꽃’이라 불리는 대장성 관료들이었다. 일본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인 대장성은 메이지유신 때부터 존재해 온 중앙행정기관이다. 재정정책과 국가 예산편성, 금융 감독 권한까지 쥔 대장성은 조직 개편으로 해체되기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관치(官治)의 나라’ 일본의 공무원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 먼저 최근 대장성의 후신인 재무성에서 모리토모(森友) 학원 공문서 위조 스캔들이 발각되며 행정부 전체의 신뢰도가 크게 떨어졌다. 윗사람의 의중을 헤아려 행동한다는 ‘촌탁(忖度·손타쿠)’이라는 말이 2017년 ‘올해의 유행어’로 선정될 정도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어진 후쿠다 준이치(福田淳一) 전(前) 재무성 사무차관의 여기자 성희롱 파문은 떨어져가는 정부 신뢰도에 결정타를 안겼다. 재무성 차관은 정치인이 아닌 공무원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다.

직업으로서의 인기도 떨어지고 있다. 일본의 국가공무원 채용 경쟁률은 매년 최저치를 경신하고 있다. 일본 공무원 채용을 담당하는 기관인 인사원에 따르면 2018년도 국가공무원 간부 후보 종합직 채용시험 출원자 수는 전년 대비 4.8% 감소한 1만9609명이었다. 2년 연속 감소이자 1970년대 이후 최저치다. 전성기인 1996년(4만5254명)의 절반 이하다. 낙폭이 두드러진 이공계 출원자 수는 전년 대비 10.8% 감소한 3752명에 그쳤다.

대졸 일반직 시험의 평균 경쟁률은 4.9 대 1로 한국의 2018년도 행정부 5급 공채 경쟁률(37.3 대 1)에 비해 크게 낮았다. 베이비붐 세대의 정년퇴직으로 일자리는 늘었지만 지원자는 줄고 있기 때문이다.

인사원 측은 “기술직 경쟁률이 특히 떨어지고 있다. 전문 인력을 채용하려는 의욕이 강한 민간 기업으로 기술직 인재들이 몰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최근 물의를 빚은 재무성 문서위조 스캔들에 대해서는 “당장의 직접적인 영향은 없다 해도 장래 공무원을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일본 공무원들의 직업 만족도도 크게 떨어졌다. 인사원이 30대 중앙부처 공무원 6264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중 71.3%가 장래에 불안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업무 의욕 저하의 이유로는 ‘과도한 업무량이나 장시간 근무로 일과 생활의 균형을 유지할 수 없다’가 48.5%로 가장 많았다. 일본 중앙부처 공무원의 평균 잔업 시간은 월 100시간으로 민간 기업의 7배에 달한다. 이 밖에도 ‘사회에 공헌한다는 보람이 느껴지지 않는다(31.8%)’ ‘상사가 도움을 주지 않는다(31.4%·이상 복수응답)’ 등이 뒤를 이었다.

이에 따라 ‘명문 사립고 졸업 후 도쿄대를 나와 관료가 되어 가스미가세키(霞が関·일본 행정부가 밀집한 지역)를 활보한다’는 전통적인 엘리트 코스도 변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올해 중앙부처 공무원 합격자 중 도쿄대 출신은 329명으로 출신대학 통계를 내기 시작한 1998년 이래 가장 적었다.


일본 도쿄 지요다구 가스미가세키에 있는 재무성(낮은 건물)과 금융청(뒤편 높은 건물). 사진 조선일보 DB
일본 도쿄 지요다구 가스미가세키에 있는 재무성(낮은 건물)과 금융청(뒤편 높은 건물). 사진 조선일보 DB

공무원보다 컨설턴트 선호

도쿄대학신문은 7월 3일자에서 ‘외국계 컨설팅 약진’ 기사를 1면 머리기사로 실었다. 중앙부처 공무원 합격자보다 액센추어(20명), 맥킨지앤드컴퍼니(11명) 등 외국계 컨설팅업체 취업에 성공한 이들에게 주목했다. 대장성 해체 후 도쿄대생의 가장 큰 선망의 대상이던 재무성 공무원은 11명으로 지난해보다 6명이나 줄었다. 이 신문은 “중앙부처 공무원 지원자 감소는 최근 젊은이들이 일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라는 학생들의 목소리를 소개했다. 즉 ‘무슨 일을 하는가’보다 ‘어떻게 일을 하는가’에 더 관심을 갖는다는 의미다.

일본 중앙부처 공무원의 평균 급여는 600만엔 안팎. 민간 기업과 비교했을 때 비교적 높지만 일류 대기업보다는 낮다. 연차를 더해갈수록 격차가 벌어진다. 치열한 출세 경쟁 끝에 살아남은 중앙부처 과장급(45세 전후)이 1200만엔 수준인 데 비해 민간 대기업은 30대 후반에 이 수준을 넘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서 경기 수준을 파악하는 데 즐겨 쓰는 지표인 하계 보너스 평균액은 올해 행정직 공무원이 65만2600엔, 대기업은 역대 최고인 96만7000엔이다.

고위 공무원의 퇴직 후 ‘낙하산 인사’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2007년 국가공무원법 개정으로 현직 직원의 재취업 알선이나 중개가 금지되면서부터다. 관료는 퇴임 후 원칙적으로 자력으로 다시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재무성과 국세청 출신 고위 관료의 ‘지정석’이라 불리던 은행 임원자리도 사내 승진으로 대체되고 있다.

공무원의 인기가 떨어지자 인사원은 정년을 65세로 연장하고 급여 수준을 높이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법안이 통과된다 한들 일본에서 공무원의 인기가 다시 높아질지는 미지수다. 분명한 것은 일본 사회의 주도권이 관(官)에서 민(民)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점이다. 1998년 대장성 해체 후 20년, 그 어느 때보다 좁아진 일본 행정부처의 입지는 일본 사회의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