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용진 카네기멜론대 컴퓨터공학·응용수학, 뱅크오브아메리카 메릴린치 파생상품팀 초단타 퀀트 트레이더, ‘인공지능 투자가 퀀트’ 저자
권용진
카네기멜론대 컴퓨터공학·응용수학, 뱅크오브아메리카 메릴린치 파생상품팀 초단타 퀀트 트레이더, ‘인공지능 투자가 퀀트’ 저자

국내 교과 과정에서 문과·이과의 구분은 중·고등학교 때부터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어린 시절 수학과 과학에 관심이 많으면 이과를 택하고, 수학을 싫어하면 선택권 없이 문과로 가게 된다. 이렇게 선택된 문·이과 구분은 학교 교육 과정에 큰 차이를 만든다. 이과는 수학·과학을 심도 있게 공부하는 한편, 역사를 포함한 인문사회 과목은 거의 접근조차 않는다. 문과 또한 마찬가지로 사회과학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미적분 등 기본적인 수학·과학 과목에 대한 깊이 있는 교육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고등학교 시절의 문·이과 구분이 대학교 전공 과정까지 나눠버린다는 점이다. 고등학교에서 이과였던 학생들은 대학에 진학해서도 이학과 공학으로 대표되는 이공계를 전공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인문학적 소양보다는 과학적인 접근만을 모든 문제의 정답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끼리 모이게 된다. 이공계 대학생들의 생각방식이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문과생들이 대학의 법학이나 인문학 계통을 전공하면 정량적인 분석이나 과학적인 접근보다는 철학적인 접근을 중시하게 되고 이런 사람들이 많이 모여 집단을 이룬다.

대학 교육에서의 이런 문·이과 구분은 직업이나 전문 분야에서도 구분을 만들어낸다. 이공계 학생들이 주로 종사하는 직업이나 전문 분야에는 문과생들이 접근할 수 없다는 인식이 퍼지고 금융이나 법조계 같은 문과생들이 주로 종사하는 영역은 이공계 인재들의 진입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는 전문 분야 종사자들의 문제 해결 능력에 있어서 치명적인 편협함으로 이어진다. 특정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두 문과 출신 또는 이과 출신으로 채워져 있으면 자신들이 받아온 교육과 사고방식만이 문제 해결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재 여러 분야에서 융합 학문을 외치며 다양한 학과가 생겨 연구를 진행하고 있고 실제 산업 현장에서도 많은 노력이 있지만 이런 근본적인 인식과 환경 차이가 융합 학문의 발전에 큰 장벽으로 가로놓여져 있다.

혁신의 중심인 미국 실리콘밸리(IT업계)나 월스트리트(금융가)는 어떨까? 미국에는 문·이과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물론 이공계와 비(非)과학계열로 크게 구분을 하지만 이 때문에 교육 과정이나 전공, 혹은 문제 접근 방식 자체를 제한하지는 않는다. 이는 고등교육 기관에서 두드러지는데, 대부분의 미국 대학에서는 전공에 따른 수업 수강 범위를 제한하지 않는다. 또 이학 계열의 문제를 인문학적인 접근으로 다루거나 과학과 철학이 융합된 문제 해결에 관한 수업들이 굉장히 많다. 심지어 아이비리그(미 북동부 8개 사립명문대) 중 한 곳인 브라운대학 같은 곳은 전공 자체를 없애고 자유롭게 과목을 조합해서 졸업을 하는 방식도 도입하고 있다. 필자 또한 컴퓨터과학을 공부했지만 따로 전과(轉科)를 하거나 전공을 하지 않아도 금융이나 철학을 수강할 기회가 많았다.

미국 대학들이 이렇게 자유로운 교과 과정을 운영하는 이유는 미국의 교육 과정에서 문·이과는 문제 해결을 하는 접근 방식의 차이일 뿐, 분야를 나누는 기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대에도 (심리학 등 인문학적 방법으로 공학적인 문제를 연구하는) 문과적인 공대가 있고 전통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이과적인 공대가 있다. 사회 문제 또한 (이과적인 방식인) 정량적·과학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으로 접근할 수도 있고, 사람의 심리나 행동으로 분석할 수도 있다.

이런 교육방식과 접근은 산업으로까지 이어진다. 실제 산업 현장에서도 문·이과 출신들이 융합된 인력 구성이나 프로젝트를 쉽게 볼 수 있다. 월스트리트에서는 신입 사원 중 70% 정도가 이공계 전공이라는 통계가 있다. 마찬가지로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자 중심의 산업이 많은 실리콘밸리에서는 인문학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중요성이 매우 강조되고 있다. 프로젝트 매니저나 그로스해커(데이터 분석을 통한 마케팅 전문가), 사용자경험(UX) 디자이너와 같은 직업은 단순히 기술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아닌 상황을 분석하고 원인을 찾아가며 이를 효과적인 수단으로 전달해야 하는 전문 분야다.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을 공부한 소프트웨어개발자나 기술 전문가들의 실리콘밸리 진출이 두드러지고 있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 학생들이 하교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서울의 한 고등학교 학생들이 하교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융합형 인재 양성해야

이렇게 인문학적 소양과 이공학적 분석력을 갖춘 사람들이 많다 보니 전혀 다른 분야로 경력을 바꾸는 일도 많다. 글로벌 비즈니스 인맥 사이트 링크드인의 2016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 전문가들이 한 회사에서 근무하는 평균 재직기간은 3.2년 정도인데, 완전히 다른 분야로 이직하는 비율이 34%, 전문 기술직에서 다른 분야로 이직하는 비율은 8%에 달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회계사였다가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된다든가, 의사에서 금융 전문가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뜻이다.

4차 산업혁명의 가장 큰 특징은 ‘공개돼 있는 도구와 방법, 숨겨져 있는 의미와 아이디어’로 요약된다. 기존의 산업에서는 기술력 자체가 가장 큰 산업 경쟁력이었다. 때문에 높은 기술력을 가진 기업이나 인재가 산업을 이끌 수 있었고, 그 결과 글로벌 경쟁 시대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의 대표적인 기술인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은 모두 기술력 자체를 공개하고 확장 가능성이 있도록 만든 개념들이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 기술 자체는 공개돼 있지만 이를 이용해서 ‘자율주행차’를 만들지, ‘인공지능 진단 의사’를 만들지, ‘맞춤형 코디네이터’를 만들지에 관한 경쟁인 것이다. 이 때문에 실리콘밸리와 같은 혁신 중심지에 인공지능의 작동구조를 이해하고 있는 패션 전문가와 같은 융합형 인재들이 활약하고 있다.

하지만 문·이과 구분의 장벽에 막혀있는 국내에서는 이공계 출신인 인공지능 전문 개발자를 먼저 양성하는 데에만 시간을 모두 빼앗겨 인공지능을 활용해 새로운 분야의 사업으로 확장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당장 문·이과를 통합하거나 대학 학제를 바꾸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는 형평성, 입시제도, 사교육까지 연관된 거대한 개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 집중하기보다는 정부나 기업이 현재 산업에서 어떠한 인재들이 필요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서 어떤 마인드를 가져야 할지 고민하고 이과와 문과를 인위적으로 구분해온 인식을 개선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여의도(한국 금융가)에서는 경상계 전공자를 선호하며, IT 업체들은 문과생의 능력을 경시하고 있다. 글이나 말로만 융합형 인재와 창의성을 부르짖기보다는 인식 개선과 실천이 선행돼야 한다.